장석주 시인이 30년 넘게 매일 읽고 쓰며 만든 교양
파주 ‘시니어 공간 나날 책방’ 대표입니다. 한 달에 한번 책방에서 연 북토크 이야기를 씁니다. <기자말>
[오승훈 기자]
한국 현대사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4월은 유독 붉고 슬프다. 찬란한 봄의 서정과 동시에 집단적 슬픔이 공존하는 시기라 그러리라. 제주 4.3, 4.16, 4.19까지 시린 통증을 동반하는 4월은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의 시처럼 가장 잔인한 달이 맞다. 꽃이 피는 소리가 때로는 비명처럼 들리고,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이 누군가의 못다 한 생의 인사처럼 여겨지는 특별한 감정은 나만의 느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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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석주시인북토크진행사진 장석주시인 북토크진행사진입니다 |
| ⓒ 권혁주 선생님 |
<교양의 쓸모> 책을 읽다 보면 "청춘의 시절 주거조차 불안정했으니 꿈은 난망했다"는 구절이 있다. 시인의 어둡고 힘겨웠던 젊은 시절에 대한 고백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현재의 삶이 너무 좋다"고 말한다. 과거의 파란부터 최근의 행복한 인생 이야기까지, 시인의 긴 일생을 두 시간으로 압축해서 듣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장석주 시인은 스스로를 '문장 노동자'로 정의한다. 그의 삶과 철학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정의다. 그에게 책 읽기와 글쓰기는 단순한 예술가의 유희가 아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책상에 앉아 쉼 없이 책을 읽고 쓰는 노동을 한다. <교양의 쓸모>는 그 치열한 노동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 지혜의 정수다.
젊은 시절 출판사의 실패로 파란을 겪은 후 오직 매일의 규칙적인 독서와 쓰기라는 노동을 통해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시인이 말하는 교양이란 30년 넘게 매일 읽고 써온 삶의 궤적과 책 속에서 길어올 린 문장과 지혜를 자신의 삶과 결합하며 만들어진 내면의 근육이 아닐까 싶다. 자본의 논리와 속도에 매몰되기 쉬운 세상에서 문장을 갈고 닦는 노동만이 삶의 비속함에 저항하고 인간의 품격을 지키는 행위가 된다고 믿었던 것이리라.
시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대한 변곡점이 있다. 당대 최고의 출판기획자로 성공 가도를 달리던 시절과 1992년 '즐거운 사라' 사건이다. 이것은 그의 생애 물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잘나가던 출판기획자에서 구속수감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졌던 1992년의 사건, 마광수 교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를 출간했다는 이유로 구속당하는 초유의 사태를 겪으며 작가는 많이 억울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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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교양의 쓸모> |
| ⓒ 풍월당 |
이들은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가 절망의 시기에 만난 구원자들이자,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스승이었으리라. 그는 수천 년 전 성현들의 문장을 빌려, 우리가 고전을 비롯하여 좋은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를 강조했다. 모든 것이 막막했던 시절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책이었고 쓰기였기 때문이리라.
다양한 질문들이 오고 갔다. 시인은 장르의 벽을 허무는 유연함을 가진 작가다. 어떤 질문을 해도 거침없이 답하며 약속된 두 시간을 훌쩍 넘겼다. "교양 있는 어른으로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일단 말은 줄이고 지갑을 열어야 한다"고 말하자 책방엔 봄 햇살 같은 웃음이 일렁였다.
경기도 광주에서 오신 책을 좋아하는 지인(태성초등학교 교장 태정원)은 책의 77쪽의 "가끔 강가에서 주운 돌멩이처럼 혼자 울었다"는 구절을 언급하며 "그렇게 느낀 배경과 정서가 궁금하다"고 물었다. 작가는 "19살 때 자신을 덮친 건 지독한 불안과 주체할 수 없는 인식 욕구였다'며 "지독한 불안 속에서 만난 외로움과 고독을 오직 책과 음악을 통해 승화시켜냈다"고 답했다.
내가 장석주 시인을 알게 된 것은 파주 어느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때다. 학교와 아이들이 사는 동네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지각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중학생이 아침 8시 20분까지 등교하던 시절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멀리서 아침도 먹지 못하고 무거운 책가방을 둘러메고 학교에 와야 했던 그 시절도 여러 상처를 남기고 지나갔다.
그 시절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실행되는 불합리한 일들이 참 많았다. 전체 교직원 회의에서 "아이들 등교 시간을 좀 늦추자"고하니 "아이들이 더 게을러진다며 현행 유지를 해야 한다"던 분들의 단호한 말들을 잊을 수가 없다. 9시 등교를 하는 지금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여하튼 여러 가지 삶의 서사와 결핍속에서 지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에게 고민 끝에 벌칙으로 여러 시인들의 시를 외우게 했다.
아이들이 외워야 했던 시들 중 하나가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과,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와 이육사의 '청포도', 그리고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김수영의 '풀' 등이었다. 새삼 고백하지만 다 내가 좋아하던 시인들의 시였다. 착한 나의 제자들은 방과 후 청소를 끝내고 교실에 앉아 나와 함께 시도 낭송하고 외우며, 이런저런 삶의 서사를 나누고 간식으로 초코파이를 먹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지각을 자주 하던 아이 중 한 아이는 여러 시중에서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을 유독 좋아했다. 졸업을 앞두고 그 아이는 예쁜 손글씨로 쓴 편지를 들고 찾아왔다. "시도 좋았지만, 방과 후 외롭지 않아서 좋았다"며 수줍게 웃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다양한 곡절을 가진 삶의 서사 속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던 아이들이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멋진 청년이 되어 돌아왔다. 그 아이들이 바로 태풍과 천둥과 벼락을 맞으며 붉어진 대추 한 알이었다. 그 시절, 아이들과 함께했던 슬프고도 행복한 순간들을 떠올리며 국민 애송시 '대추 한 알'을 옮겨 본다.
대추 한 알 (시인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우리는 모두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그 파란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애쓰며 살아간다. 실패의 현장에서 도망치는 대신 책 속으로 침잠하며 길을 찾았던 작가의 이야기는 삶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독자들에게 묵직한 감동을 선사하며 각자의 삶을 성찰하게 했을 것이다. 이 책은 바쁘게 쫓기듯 살아오다 어느 순간 "나는 누구인가?", 혹은 "남은 삶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밀려올 때 읽어보면 참 좋을 책이다.
'교양의 쓸모'가 이 잔인한 4월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질문하지 못했지만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교양있는 사람이란 "누군가의 황무지 같은 마음속에 고인 슬픈 눈물의 깊이를 읽어내고, 그 곁을 묵묵히 지키며 다시는 그런 비극과 슬픔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함께 싸워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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