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선생님? 밤엔 180도 변한다…‘독장미’의 짜릿한 이중생활

박린 2026. 4. 21.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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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러 말로리 존스(왼쪽)가 같은 프로레슬링 단체에 몸 담고 있는 예니에게 헤드락을 걸고 있다. 링네임 ‘포이즌 로즈’는 아름답지만 위험한 독장미라는 뜻이다. 우상조 기자

예쁘고 자상한 원어민 영어 선생님은 어둠이 내리면 장미와 해골이 그려진 옷으로 갈아입고 링 위에 올라 반칙왕이 된다. 한국 프로레슬링 PWS(프로 레슬링 소사이어티)의 여자부 챔피언 말로리 존스(30)의 링네임은 ‘포이즌 로즈’다.

그녀의 필살기는 로프 밖으로 거꾸로 매달린 채 다리로 상대 목을 옭아매는 ‘장미속박’, 등 뒤에서 상대의 목을 잡고 함께 떨어지는 넥브레이커 ‘포이즌 키스’다. 심판 몰래 독 안개라 불리는 물감을 내뿜는 ‘포이즌 미스트’ 같은 비열한 반칙도 서슴지 않는다. 반칙에 항의하는 상대에게는 “고작 그것밖에 안 되냐”며 콧방귀를 뀐다. 가수 엄정화의 ‘포이즌’에 꽂혀 콘서트까지 다녀왔다는 그녀의 테마곡 가사는 “독을 품은 장미처럼 무서운 분노는 없지”다.

링 밖 모습은 180도 다르다. 19일 경기도 평택의 한 체육관에서 만난 그녀는 구경 온 꼬마 여아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링 밖에서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친 선생님이다. [사진 말로리]

미국 코네티컷주 출신으로 국제학을 전공한 그녀는 2017년 배우 공유가 출연한 드라마 ‘도깨비’와 닭갈비에 매료돼 한국에 정착했다. 서울 삼전초 등에서 원어민 강사로 일했고, 2주 전 일반 회사로 이직하기 전까지 10년 가까이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 가르쳤다.

이중생활은 2023년 우연히 SNS에서 여성 프로레슬러 모집 공고를 보면서 시작됐다. 그런데 순전히 우연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말로리는 어릴적 본 잭 블랙 주연의 2006년 영화 ‘나쵸 리브레’가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멕시코 수도원의 요리사가 낮엔 수사로, 밤엔 마스크를 쓴 루차도르(레슬러)로 활약하는 내용이다.

칼 융은 인간 내면에 평소 억눌린 어둡고 충동적인 자아, ‘그림자(Shadow)’가 있다고 했다. 착하게 살아온 사람일수록 그림자는 더 짙다. 교실에서 늘 상냥하고 바르게 살아온 말로리에게 반칙왕 포이즌 로즈는 출구였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 체조, 트램펄린, 승마, 펜싱, 테니스 등을 섭렵한 말로리는 이듬해 데뷔해 3000명 관중 앞에서 싸우는 프로레슬러가 됐다.

프로레슬러 말로리 존스가 같은 프로레슬링 단체에 몸 담고 있는 예니를 상대로 바디 슬램을 시도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말로리는 “아이들에게는 늘 인내심을 가지라고 가르쳤지만, 링 위에만 올라가면 참을성이 사라진다. 조명이 켜지고 관중의 환호성이 터지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해방감을 느낀다. 기술로 몸집이 큰 선수를 이길 때 특히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이어 “어느 날 초등학생 제자가 귓속말로 ‘티처, 두 유 노우 포이즌 로즈?’라고 묻길래 ‘누군지 모르겠는데’라고 연기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했다.

예쁘고 자상한 원어민 영어 선생님은 어둠이 내리면 장미와 해골이 그려진 옷으로 갈아입고 링 위에 올라 반칙왕이 된다. 우상조 기자


“손목이 부러진 줄도 모르고 끝까지 싸워 이긴 뒤에야 응급실에 간 적도 있다. 남녀 8명이 뒤엉켜 싸우는 경기를 보러 온 엄마가 링 위로 뛰어올라올 뻔한 일도 있다”며 웃었다. “레슬링은 쇼 아니냐”고 하자 “링 위에서 직접 고통과 전율을 느껴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라고 했다. “시나리오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엔 “글쎄, 난 잘 모르겠다”며 능청스럽게 웃어 넘겼다.

수입은 소액의 출연료가 전부다. 낮에 일하고 밤과 주말에 훈련해야 한다. 올해 1월 위민스 챔피언에 오른 말로리는 다음 달 9일 서울 KBS 아레나에서 ‘악몽의 여왕’ 서큐버스를 상대로 타이틀 방어전을 치른다. “챔피언이 됐으니 정정당당하게 타이틀을 지켜 내겠다”며 선역 전환 가능성을 열어뒀다.

“한국 여성 레슬링 씬에 대한 관심을 더 키우고 싶다. 여성도 강인하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 아이들에게도 세상에 도전하는 용기를 심어 주고 싶다.”

올해 1월 위민스 챔피언에 오른 말로리는 다음 달 9일 서울 KBS 아레나에서 ‘악몽의 여왕’ 서큐버스를 상대로 타이틀 방어전을 치른다. [사진 PWS]

평택=박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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