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재부흥 못 기다려… 신시장 눈 돌리는 K배터리

허경구 2026. 4. 2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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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산업군으로 대전환기 대응 분주
게티이미지뱅크·제미나이


“전기차 시장에서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이 나타나고 있지만 에너지저장장치(ESS)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휴머노이드 로봇 등 새로운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배터리 수요는 오히려 더 큰 산업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엄기천 한국배터리산업협회 회장(포스코퓨처엠 대표)은 지난달 국내 최대 배터리 전시회 ‘인터배터리 2026’에서 이같이 내다봤다. 배터리 수요가 전기차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 AI, 로봇 등 전 산업군으로 확장하는 ‘대전환기’를 맞이했다는 진단이다.

중국발 공급 과잉과 수요 정체라는 이중고 속에서도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ESS, 방산 등 미래 먹거리 선점을 위한 전략적 투자를 멈추지 않고 있다. 기술 초격차를 통해 ‘포스트 전기차’ 시대의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국내 배터리 업계의 미래 생존 전략을 짚어봤다.

‘제2의 반도체’라 불렸던 배터리

202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배터리 산업은 대표 효자 종목 중 하나였다. ‘제2의 반도체’로 불리며 한국 경제를 이끌 차세대 엔진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특히 2020~2022년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보였다. 2022년 중국을 제외한 세계 배터리 시장에서 53.4%로 절반을 웃돌았다. 당시 중국은 26.5%에 불과했다.


실적도 좋았다.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등은 사상 최대 매출과 조 단위 영업이익 실적을 올리며 전성기를 누렸다. 2023년 기준 LG에너지솔루션은 매출 33조7000억원과 영업이익 2조1000억원을, 삼성SDI는 매출 22조7000억원, 영업이익 1조6000억원을 기록했다.

하지만 호황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2024년 전기차 캐즘이 본격화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줄지어 전기차 전환 속도를 늦췄고, 리튬 가격 폭락까지 겹치며 실적 하락의 터널로 접어들었다. 주요 기업들의 영업이익은 반토막이 났고, 일부 기업들은 적자 전환했다.

여기에 저렴한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내세운 중국업체들의 거센 공세가 더해지면서 국내 업체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절반을 넘던 중국 제외 글로벌 점유율도 지난해 기준 36.3%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런 지형 변화는 역으로 국내 기업들에 ‘전기차 올인’ 전략의 위험성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제 배터리 3사와 소재 기업들은 더 이상 전기차 시장의 회복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중국발 공급 과잉과 수요 정체라는 이중고 속에서도 ESS, 방산, 우주, 항공 등 미래 먹거리 선점을 위한 전략적 투자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절박한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ESS·로봇·방산 포트폴리오 다각화

배터리 기업들은 비(非)전기차 사업 분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로봇, ESS 등 전동화 전환이 이뤄지는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전기차 배터리 사업의 비중을 줄이고 수익 모델을 다변화하는 전략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주총에서 ESS와 신사업 비중을 기존 20%에서 40%까지 늘리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동명 LG에너지솔루션 사장은 “지금은 산업의 성장 가치가 재편되는 ‘밸류 시프트’의 시기”라며 “전기차, ESS는 물론이고 휴머노이드와 같은 신사업에서도 차별화된 경쟁력을 제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글로벌 ESS 주류로 부상한 LFP 배터리도 도입했고, 전기차용 라인 일부를 ESS용으로 전환하며 수요에 대응하고 있다. 동시에 로봇과 도심모빌리티(UAM) 등을 겨냥한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와 건식 전극 공정, 소듐이온 배터리 등 차세대 기술 개발도 진행 중이다.

삼성SDI도 ‘수주 다변화’를 키워드로 제시했다. 최주선 삼성SDI 사장은 “차별화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고객 포트폴리오를 확대하고, 전기차와 ESS뿐 아니라 로봇용 배터리 등으로 수주 영역을 넓혀 중장기 성장 모멘텀을 확보하겠다”고 설명했다.

특히 삼성SDI는 꿈의 배터리로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 양산에 사활을 걸고 있다. 내년 양산이 목표다. 회사는 이를 바탕으로 휴머노이드와 ESS 등 신규 시장 진입을 모색하고 있다.

SK온은 ESS 전환에 무게를 실었다. 추형욱 SK이노베이션 대표이사는 “물량 확대보다는 수익성 개선과 자본 효율성 제고에 집중하고 기술 경쟁력을 높여 나가겠다”며 “북미 ESS 시장을 중요한 성장 축으로 보고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SK온은 ESS용 LFP 파우치 배터리를 개발했다. LFP 배터리의 에너지밀도를 높이기 위해 전극 고밀도화, 셀 내부 공간 축소, 전극 치수 최적화 등을 추진하고 있다. 업계 최초로 전기화학 임피던스분광법(EIS) 기반 예방·진단 시스템을 접목한 컨테이너형 ESS 데이터센터 블록도 개발했다.

소재사들 역시 LFP 양극재를 비롯한 소재 공급 준비에 주력하고 있다. 포스코퓨처엠은 자체 신공법을 도입해 소재 및 공정 혁신을 가속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배터리 가격이 킬로와트시(㎾h)당 100달러 이하로 낮아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 지분을 투자한 미국 전고체 배터리 기업 팩토리얼이 휴머노이드와 드론용 전지에도 포스코퓨처엠의 양·음극재를 활용해 개발 중이다. 엘앤에프는 올해 하반기 국내 최초 양산을 목표로 하는 비중국화 LFP 양극재 생산 계획을 발표했다.

업계 관계자는 “배터리 업계가 어려운 상황인 것은 맞지만 신수요 분야에서의 성장을 통해 회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며 “보호무역주의 기조 속에 중국 업체들에 대한 제약이 늘어나고 있는 점도 국내 배터리 기업에겐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허경구 기자 ni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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