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캐나다 친구들이 <왕사남> 보고 오열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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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정 기자]
"엄마, 나 지금 친구들이랑 영화 보러 왔어."
4월 둘째 주 일요일 아침, 캐나다에 있는 딸에게서 온 보이스톡이다.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딸아이의 마음을 끌어당긴 영화는 무얼까. 바로 장항준 감독이 만든 <왕과 사는 남자>였다. 영화를 두 번이나 관람한 나는 내심 반가웠다. 딸아이는 공유 주택에서 함께 사는 외국인 친구 셋과 동행했다고 했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설렘 가득한 목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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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과 사는 남자> 포스터 |
| ⓒ 쇼박스 |
예약을 안 했다면 허탕 칠 뻔했다는 딸의 말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이보다 더 신나고 뿌듯한 일이 어디 있을까. 더군다나 외국인 관객 비율도 높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는 역사에 약한 딸아이가 영화 감상을 즐겁게 할 수 있도록 얼른 짧은 '팁'을 건네주었다.
"딸, 영화의 배경을 알고 보면 더 좋겠지? 1457년에 단종이 강원도 영월 '청령포'라는 곳으로 유배 간 곳에서 있었던 이야기야. 비극적인 왕의 죽음과 충신 엄흥도라는 인물의 실화에 상상력을 더해 만들어진 거지."
딸아이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호들갑이었다.
"아이돌 가수 박지훈을 아는 외국인도 많네."
솔직히 나는 단종 역을 맡은 배우를 잘 몰랐는데, 이미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은 가수 겸 배우라고 했다. 나는 역사적 배경을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설명을 계속 이어갔다.
"단종은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 세종과 아버지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어. 하지만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는 바람에 폐위되고 말았지. 그때 어린 왕이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겠니?"
딸에게 전해준 이 작은 지식이 영화를 즐기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했다. 한편으로는 함께 간 외국인 친구들이 과연 한국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염려되었다.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 가는 대목에서는 어떤 생각이 들까.
왕정국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면 그나마 낫겠지만, 현대 민주주의 시스템에 익숙한 그들한테는 어려운 숙제가 될 터였다. 권력을 찬탈 당하는 역사적 비극이 외국인의 눈에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너무 궁금했다. 모든 건 함께 간 딸아이의 설명에 달렸다고 봤다.
어쨌든 유해진 배우의 신들린 연기에 울다가 웃기를 반복할 것이고, 박지훈 배우가 펼치는 단종의 눈빛 연기에 눈물 흘리게 될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이 기회에 딸아이에게도 역사 의식이 싹텄으면 하고 은근히 기대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영화 필름을 되감아 그날의 감동을 재생해 보았다. 왕을 위해 정성껏 차려낸 밥상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왕의 건강을 염려하는 마을 사람들이 밥그릇을 비웠다는 소식에 환호했을 때, 내 마음도 그들 틈에 껴있었다.
밥상을 사이에 두고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나눌 때, 나는 단종의 엄마라도 된 듯한 심정이었다. 부모를 잃고 궁궐이 아닌 첩첩산중으로 쫓겨난 어린 왕의 처지가 가련해서 마음이 아렸다. 두 번째 관람에서 눈물을 더 많이 쏟은 건 순전히 단종의 그 처연한 눈빛 때문이었다. 커다란 눈망울에 맺힌 눈물 너머로 펼쳐지는 연기에 빨려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영화 산업에 검은 장막이 내려졌다는 말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왕과 사는 남자>가 보여준 열풍 앞에서 그런 걱정은 완전히 무색해졌다. 관객 1600만 관객을 넘어서며 짧은 기간 내에 역대 흥행 2위에 당당히 올라섰기 때문이다. 다시 찾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보는 것만 같아 영화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반갑고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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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
| ⓒ 쇼박스 |
"엄마, 나 막동어멈 밥상을 보고 엄마가 해주던 밥이 생각나서 울었어."
나는 역사 배경을 열심히 설명해줬건만, 딸아이는 역사가 아닌 '밥상'을 먼저 봤다. 평소 통화할 때마다 엄마 밥이 그립다며 말끝을 흐렸는데, 결국 영화 속 밥상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하얀 쌀밥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을 딸아이 얼굴이 떠올라 내 마음도 짠했다.
나 역시 영화 속 장면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상을 보자 딸의 얼굴부터 떠올랐다. 집밥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대형 화면 위로 엄마가 차려주던 밥상이 겹쳐 보였을까. 단종의 눈물 어린 밥상이 현실에서는 딸의 그리운 밥상으로 이어진 셈이다. 영화는 낯선 땅에서 홀로서기 하고 있는 딸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건네준 엄마 대신의 응원이 아니었을까. 마을 사람들이 단종을 응원하기 위해 지극정성으로 차려낸 밥상처럼.
"외국인 친구들 반응은 어땠어?"
"단종이 죽는 장면에서 친구들이 손을 잡고 펑펑 울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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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
| ⓒ 쇼박스 |
"죽음은 누구에게나 슬픈 거잖아."
이 한마디가 가슴에 먹먹한 울림을 주었다. 영화 한 편이 국경과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남의 나라 역사는 낯설지 몰라도, 죽음이라는 슬픔은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바로 예술의 힘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딸이 집으로 오는 날,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고 싶다. 그날의 밥상 위에는 슬픔 대신 가족의 풍성한 웃음꽃이 한가득 올려질 것이다. 아무쪼록 딸아이가 캐나다에서 친구들과 함께 건강하고 즐겁게 지내기를 바란다. 딸을 만날 그날이 빨리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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