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전쟁영웅, 아들은 테러리스트... 엇갈린 운명
[김상목 기자]
*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포화상태에 놓인 지구를 떠나 본격적으로 우주 이민을 개시하며 서력에서 '우주세기', U.C.(Universal Century)로 달력까지 바꾼 후 105년이 지났다. 강제 이민정책과 우주에 정착한 이들을 일컫는 '스페이스노이드'에 대한 차별정책은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U.C.0079년 '1년 전쟁'은 인류 과반이 몰살되는 파멸적 결과로 끝났다. 지구연방은 간신히 승리했지만, 전란의 불씨는 꺼지지 않는다.
전쟁영웅 '브라이트 노아'의 아들 '하사웨이'는 샤아의 반란에 휘말린 후 12년이 지났으나 후유증에 시달리는 상태다. 그는 지구로 향하던 중 '마프티'라 불리는 반정부 조직의 습격을 받는다. 선내에 연방 회의 참석을 위해 다수의 고위 관료가 승선한 탓이다. 긴박한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해 제압한 그는 임지로 부임하던 '케네스 슬렉' 대령과 정체불명의 소녀 '기기 안달루시아'와 만난다. 그들의 운명은 엇갈리기 시작한다.
하사웨이는 실은 마프티의 진짜 리더, '마프티 나비유 에린'이다. 그는 연방 회의가 열리는 호주 애덜레이드를 습격하는 대규모 테러를 준비하고 있다. 케네스 대령은 회의 경비 책임자로 발탁된 인물. 서로에게 깊은 인상을 받지만, 대립할 운명인 셈. 여기에 신비한 직감을 가진 기기가 끼어든다. 그녀로 인해 극복할 수 없는 상처를 떠올리며 심경이 복잡해진다. 한편 케네스는 마프티 섬멸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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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 키르케의 마녀> 스틸 |
| ⓒ 미디어캐슬 |
한편 자원 고갈과 전쟁으로 입은 상처로 지구 생태계는 악화 일로다. 연방정부는 환경보존 명목으로 지구 거주를 부유층과 권력자에게만 허용한다. 거주 허가를 받지 못한 이들을 사냥하는 '맨헌터'가 기승을 부린다. 기득권만 챙기는 부패 정치에 불만 품은 이들의 저항은 아무리 진압해도 다시 타오른다. 인류 전체의 우주로 이민과 지구 정화를 주창하는 반정부 조직 마프티는 연방에 반감을 품은 이들에게 상징으로 떠오른다.
마프티는 연방 고위 관료를 암살하고 테러를 일으켜 정부를 곤혹에 빠지게 한다. 청년은 조직을 이끄는 리더로 암약하며 '마프티 나비유 에린'으로 불린다. 과거 자신의 아버지와 그의 동료이자 전설적 에이스 파일럿 '아무로 레이'가 맞서 싸웠던 숙적 '샤아 아즈나블'의 환생이라 불리는 얄궂은 처지다. 마프티의 주장도 샤아와 판박이다. 이런 모순이 또 없다. 하지만 아무로와 수많은 이들의 희생에도 교훈을 얻지 못한 지구연방에 실망한 결과다.
지구와 인류의 미래에 관한 대립은 우주세기 내내 전란을 불러왔다. 논쟁은 변주되며 여러 이념이 명멸해 왔지만, 갈등의 본질은 한 세기 넘게 변화가 없다.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필연적 갈등 해소를 위해 만인이 수용할 합의를 이룰 수 있는가 문제다. 그러나 지구권 전체를 통합한 연방정부는 열망에 부응하긴커녕, 부패한 기득권으로 전락한 상태다.
불만이 쌓여만 가는데 개혁은 가망이 없다. 조직적 저항은 끔찍한 피해와 함께 남김없이 분쇄당했다. 증오가 증오를 낳고, 전쟁은 애꿎은 희생자만 양산한다. 출구 없는 분노 또는 무기력한 체념만 남았다. 이제 체계적 사상과 정치적 타협을 대체한 건 과격한 행동주의다. 뭐든 저지르고 보자! 거대 관료 체제라는 실체가 보이지 않는 유령 대신 고위 인사를 타격하며 민중을 선동하는 소수 급진파가 떠오르기 완벽한 토양이다. 마프티가 저항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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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 키르케의 마녀> 스틸 |
| ⓒ 미디어캐슬 |
그러나 작전을 앞둔 하사웨이, '마프티 나비유 에린'의 운명에 두 사람이 끼어든다. 하나는 기구하게도 '적장'인 케네스 대령이다. 그들은 어렴풋하게 서로의 정체를 느끼며 기이한 관계를 형성한다. 반드시 쓰러뜨려야 할 적이지만, 뭔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둘 다 서로가 속한 신념에 일말의 의심을 간직하지만, 대의 혹은 책임감으로 버틴다. 사적으론 묘한 우정을 형성해도 전장에서는 숙적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아버지와 아들이 적으로 만날 수도 있다.
되풀이되는 전쟁은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도 무차별 끌어들이게 마련. 하사웨이 역시 10대 초반 샤아의 반란을 겪으며 수많은 지인과 정신적 지주를 잃었다. 그중엔 소년의 풋풋한 첫사랑 상대도 있다. 그녀의 죽음에 죄의식을 지닌 주인공은 '뉴타입'이라 불리는 교감능력 탓에 더욱 힘들다. 우주로 진출한 인류에게 발현되기 시작한 특징, 타인과 공감하는 능력 극대화 결과다. 그러나 전란 와중에 이 초능력은 군사적 용도로만 취급당한다.
현실 '소년병'이 겪는 평생 트라우마처럼 하사웨이는 너무 일찍 전쟁 참화에 노출되고, 통제하기 어려운 능력 때문에 과거의 기억과 망령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도 없다.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 가득하니 속마음 드러내 도움 청할 수도 없다. 거창한 사명을 띠고 조직의 구심으로 활약하면서도 상처와 공허감은 내내 그에게 찰싹 달라붙은 채다. 그런 하사웨이에게 과거 연인을 떠오르게 하는 기기가 다가선다.
우주세기 '팜 파탈', 치명적 매력의 소녀와 거듭된 만남에 주인공은 중대 작전을 앞두고 그녀를 피해야 함을 잘 안다. 그러나 기기의 접근에 설레며 두려운 모순된 감정은 도리가 없다. 어쩌면 그녀가 자신이 갈구하던 치유의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공사 구분해야 한다고 수십 수백 번 다짐하지만, 평생 풀 수 없던 문제에 다시 직면한 흉중은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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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 키르케의 마녀> 스틸 |
| ⓒ 미디어캐슬 |
소설판은 역대 건담 시리즈의 방대한 영상/소설/만화/게임 세계 안에서도 '역대급' 암울한 결말로 악명이 자자하다.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전개다. 인류는 참혹한 전란에 별 교훈도 얻지 못한 채 부패와 분쟁을 안고 계속 시간만 흐른다. 거대한 구체제는 타도되지도, 개선되지도 않은 채 권력을 유지하며 썩어간다. 그런데도 수십억 인류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 변혁을 꿈꾸다 좌절하거나 타락하는 이상주의자는 끊이지 않는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현실에서 건담 시리즈 운명은 우주세기 '정사'와 닮은꼴이다. 1980년대 전공투 세대 신진 작가들의 시각이 녹아든 '리얼로봇' 애니메이션은 기존의 '슈퍼로봇'과 차별화를 확립한다. SF 장르 단골 요소인 거대로봇과 주변 인간 군상을 통해 현실 세계 거울 반영, 풍자를 전하려 한 것. 전쟁 병기 로봇에 탄 소년 소녀 주인공이 겪는 비극은 현실 역사와 고스란히 겹친다. 건담의 묘미 역시 그랬다. 특히 신작 속 이민자 탄압과 강제추방은 작금 세계 풍경과 판박이다.
하지만 어느새 건담 시리즈는 프라모델 업계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었다. 거대 기업 반다이는 '건프라(건담 프라모델)' 산업을 주도하며 건담 저작권을 움켜쥔다. 창작자인 토미노 요시유키도 고용 감독에 불과한 셈. 반다이는 어느새 반세기 가깝게 연속된 시리즈를 계속하려 한다. 설정 속에서 105년째 이른 우주세기를 닮으려는 욕망처럼. 스폰서의 입맛에 따라 깔끔하게 완결 짓고자 한 건담은 무한 수명연장에 돌입한 상태다. 막을 수가 없다.
<섬광의 하사웨이> 3부작은 다음 반세기를 끌고갈 동력을 삼기 위한 우주세기 확장 프로젝트의 중요한 가교다. 지구 연방정부 혹은 연방군과 마프티 양쪽에 최신 건담을 공급하는 죽음의 상인이자 지구권을 좌지우지하는 초거대 기업 '애너하임'의 흑막과 현실의 기업 반다이 행보는 소름이 끼치도록 유사하다. 현실이 영화 속 예언을 고스란히 따라갈 판이다. 그에 따라 건담 시리즈 오랜 팬들도 애증 섞인 시선으로 탄식과 열광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신세다.
이번엔 속지 말아야지 다짐해도 종국엔 다시 새로운 건담과 만나고 기하급수로 비싸진 프라모델 예약하느라 허리띠 졸라맬 올드팬에겐 야속하게도 이번 시리즈는 마블 유니버스가 난항을 겪는 신규 팬 유입에 초점을 맞춘다. 복잡한 정치-사회 설정 대신, 부모세대와 갈등하며 반항하는 청(소)년 정서를 부각한다. 그로 인해 영화 속 건담 파일럿의 고뇌는 <에반게리온> 주인공의 그것과 닮아간다. 이 또한 현실과 영화가 영향력을 주고받는 흥미로운 대목일 테다.
이러쿵 저러쿵해도 얼른 확인하러 극장에 달려갈 이들에게 신작은 3D 그래픽 효과 아낌없이 팍팍 친 현란한 로봇 전투 액션과 원작 소설과 다른 결말 가능성에 도파민 중독될 흥미로움으로 넘실댄다. 무엇보다 종반 플래시백과 이어진 '라스트 씬'의 흥분은 양보할 수 없는 노릇. 오랜 팬이라면 전율하지 않고는 못 배길 법하다.
P.S. 신작 개봉 전후로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와 OTT 직행했던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가 각각 재개봉/개봉을 예고했다. 초심자라면 함께 관람하는 게 유용하다.
<작품정보>
기동전사 건담: 섬광의 하사웨이 키르케의 마녀
2026|일본|애니메이션
2026.04.22. 개봉|108분|15세 관람가
감독 무라세 슈코
기획/제작 선라이즈
수입 ㈜에스피오엔터테인먼트코리아
배급 ㈜미디어캐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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