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강사'라는 새 신분을 배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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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민 기자]
좋은 교실로 옮겨져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다시 낡은 건물 교실로 최종 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빔프로젝트만 설치된 교실이라 이동식 화이트보드가 있는지만 미리 확인하고, 첫 수업 날과 같은 긴장으로 두 번째 수업을 위해 일찍 출근했다.
지난 2일 오전, 이십여 명의 강사들이 모여드는 수업 준비실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수업에서 쓸 워크지를 학생수 만큼 복사하고, 출석부를 챙겨 서둘러 옆 건물로 건너갔다. 노트북을 바로 연결해 사용하긴 어렵다는 걸 확인한 뒤, USB를 꽂아 준비해온 수업 자료가 큰 화면에 제대로 출력되는지 점검했다.
'새싹반 OOO.' 초등학교 3학년이 된 둘째 아이가 유치원에서 월반할 때 받은 USB다. 쓸 일이 없어 굴러다니던 녀석이 수년 만에 제대로 할 일을 찾았다. 아이의 사진을 지우고, 강의자료를 담았다.
"폰트는 포기 못 하죠."
한때 디자인계에 몸 담았던 사람으로서 호기롭게 말했었는데, 자료 작성할 땐 기본 폰트만 사용한다는 선배 강사의 조언을 2주 만에 받아들이게 될 것 같다. 수정할 때마다 PDF로 바꾸는 것도 번거롭고, 실수할까 여러 번 확인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다. 무엇보다 현장에서 바로 수정하기가 어렵다.
처음 시작하는 수업도 수업이지만, '강사'라는 새 신분을 배우는 중이다. 여성 중심의 사회, 요일마다 다른 장소와 학생들을 만나는 근무 형태, 그때마다 달라지는 업무 환경과 인적 구조, 다음 학기에도 수업을 계속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불안정성. 이런 조건들이 만들어내는 상황과 분위기, 관계를 초보 강사는 그저 온 감각으로 배워가는 중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ㅋ,ㅌ,ㅍ,ㅊ'와 'ㄲ,ㄸ,ㅃ,ㅉ,ㅆ'. 격음과 경음을 중심으로 자음 소리를 배우는 날이다. 손바닥을 입 앞에 대고 바람이 나오는지 확인한다. 자음과 만난 표를 채우며 카타파차, 커터퍼처, 키티피치... 열심히 소리를 반복한다. 쓰고, 듣고, 고르고, 또 쓴다. 배운 글자로 만들 수 있는 어휘도 배운다.
100분 수업, 두 번의 연강. 50분 수업이 두 번 붙어있는 시간표가 아직 낯설다. 100분 수업 후에야 주어지는 10분의 휴식 시간까지 수업을 이어가는 건 무리다. 중간에 5분 정도 쉬어가려는데, 시간 계산이 아직 익숙지 않다. '몇 분 지난 거지?' 시간을 힐끔거리는데 학생들의 눈이 풀리고 반응이 느려진다. 수업 시작한 지 45분. 정확히 쉬어가야 할 타이밍이다.
BTS의 노래 한 곡이 재생되는 동안 쉬기로 했다. 다시 수업 시작. 힘을 주고 된소리를 발음해본다. 또 말하고, 쓰고, 듣고, 들리는 소리를 보기에서 고른다. 비슷비슷한 글자와 발음 사이를 오가느라 헷갈리는 학생들에게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강아지 이름 '뽀삐'를 알려주었다. '빼빼로 데이'도 소개했다.
"짜OOO 알아요?"
'짜'를 읽다가 20대 초반 학생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싶어 짜장 라면 이름을 물었는데, 하나 같이 갸우뚱거린다.
"짜장면 몰라요?"
아차차.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종교를 가졌지.
"꼬끼오~ 한국 치킨들은 이렇게 울어요. 방글라데시 치킨 소리는?"
서둘러 쌍기역으로 넘겼다. 방글라데시와 네팔 닭들의 울음소리가 학생들의 웃음과 함께 교실에 퍼졌다. 자신의 나라를 언급하고, 문화를 궁금해하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은 미소를 보이고, 한 걸음 다가와 준다.
4시간 수업을 마치고 나니, 온몸의 힘이 빠진다. 첫 수업 시간과 달리 중간중간 하품하기도 하고, 핸드폰을 꺼내기도 한다. 졸음에 눈이 풀린 몇몇 학생들의 얼굴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낯선 모양과 소리의 글자를 배우는 게 얼마나 지루할까. 학생들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더 재밌고 효율적으로 가르칠 순 없을까. 결국 나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런 마음으로 으쌰으쌰 힘만 내면 좋을 텐데, 내 부족함 때문인 것 같아 좌절감이 살짝 찾아오기도 한다.
'땅' 이야기로 십여 분간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이야기를 풀었다는 동료 강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 흥미로운 이야기도 좀 준비해야겠구나' 생각했다. 꼬끼오, 빼빼로, 뽀삐, 로띠 이야기를 수업에 녹여냈다고 내심 뿌듯해했는데. 너무 소소했다는 생각에, 괜히 민망함이 올라온다.
타고난 입담이라곤 없는 성격이니 이야깃거리와 유머도 성실히 준비해야겠다. 재미와 실력으로 듣는 이들의 마음을 붙들고, 좋은 내용을 전던 강사들을 하나 둘 떠올려본다. 그들의 노고가 새삼스럽다. 나도 내 역량과 스타일로 개성이 담긴 수업을 만들어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시작이 쉽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그런 수업이 만들어지겠지!
다음 수업 시간엔 초보 교사의 열정이 수업 내용뿐 아니라 재미로도 꽃피울 수 있기를 바라본다, 제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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