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한테 물리면서 선거운동...공화당 텃밭에서 기적을 일으킨 한인

이희용 2026. 4. 20.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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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월드코리안 9화 ] 거지소년이 이룬 아메리칸 드림, 신호범

[이희용 기자]

"헬로! 깁미 초콜릿! 깁미 껌! 오케이?"

1950년대 한국 아이들은 미군이 탄 자동차를 보기만 하면 서툰 영어 발음으로 외쳤다. 대부분 그냥 지나쳤지만 가끔은 닭 모이 뿌리듯 던져주는 껌이나 초콜릿을 받았고, 엄청나게 운수 좋은 날에는 전투식량이 담긴 레이션 박스를 선물받기도 했다.

신호범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처음 보는 물건이어서 껌도 과자인 줄 알고 씹다가 삼켰고, 레이션 박스에 들어 있는 통조림은 따는 방법을 몰라 먹지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트럭에 탄 군인들이 껌 달라고 흔드는 그의 손을 잡아 태웠다. 행색이 고아처럼 보이니까 부대 안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하우스 보이로 쓰려고 데려간 것이다.

이 사건은 신호범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부대에서 만난 군의관의 양아들이 돼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훗날 그는 미주 한인 이민사에서도 획을 긋는 업적을 이뤄냈다. 미군에게 구걸하던 거지 소년이 대학교수를 거쳐 워싱턴주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이 된 것이다.

미군 부대 하우스 보이 시절 별명은 벅샷(총알)
▲ 미군 부대 하우스 보이 시절 1950년 가을, 15살의 신호범은 미군에게 껌을 달라고 외치다가 트럭에 태워져 하우스 보이 생활을 시작했다.
ⓒ 재외동포청
신호범은 1935년 9월 27일 경기도 파주군 금촌면(파주시 금촌동) 대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유방암을 앓다가 네 살 때 숨지는 바람에 일찍부터 외가에 맡겨져 할머니 손에서 컸다. 몇 년 뒤 재혼한 아버지한테 돌아갔으나 새어머니와 이복동생들 틈바구니에서 마음을 붙이지 못해 외가로 되돌아갔다. 그곳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해 집을 나가고 말았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다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서울 남대문 근처에서 부랑아로 지냈다. 그 시절에는 굶는 사람이 많아 거지 생활도 쉽지 않았다. 손수레에 실린 오이를 빼먹다가 오이장수한테 들켜 따귀를 맞는가 하면 서울역에서 구걸하다가 순사에게 몽둥이 찜질을 당하기도 했다.

장래 희망은 고사하고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겨웠으나 미군 부대에 들어오니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월급까지 주었다. 장교 막사에 배치돼 난방용 기름을 나르고 장교들의 옷을 다리고 구두를 닦는 것이 일과였다. 신호범은 눈치 빠르고 동작도 빨라 벅샷(buckshot·총알)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귀여움을 받았다.

치과의사인 군의관 레이 폴(Ray Paull) 대위는 특히 그를 아꼈다. 신호범도 틈날 때마다 피란민 봉사에 나서고 쉬는 시간엔 책과 성경을 읽는 폴 대위를 존경해 믿고 따랐다. 폴 대위는 신호범을 입양해 미국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그와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반가웠고,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난 뒤에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다. 인종차별을 걱정해주는 장교도 있었으나 그 정도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고 여겼다.

폴 대위가 전역해 귀국한 뒤에도 신호범이 신청한 여권은 3년 반이나 돼도 나올 기미가 없었다. 급행료가 없으니 서랍에 처박아둔 것이었다. 폴의 부탁을 받은 미국 연방 상원의원이 주한 미 대사관에 연락해 외무부에 알아보자 그제서야 여권이 나왔다. 마침내 1955년 9월 11일 부산에서 화물선을 타고 18일 만에 미국 시애틀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하루 3시간만 자며 1년 4개월 만에 대입 검정고시 통과
▲ 운명을 바꾼 양아버지 레이 폴 대위 미군 군의관으로 6·25에 참전한 레이 폴 대위. 전역 후 귀국하면서 신호범을 양아들로 삼아 미국으로 초청했다.
ⓒ 재외동포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양아버지 폴과 감격의 포옹을 했다. 양어머니와 동생 삼형제의 표정은 싸늘했다. 미국식 성명은 폴 신(Paull Shin)이라고 정했다. 한국 성을 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 양아버지 성을 이름으로 쓰기로 한 것이다. 학교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초등학교를 다니기엔 나이가 너무 많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려면 초·중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대학에 가려면 검정고시를 치르는 수밖에 없었다. 무학이나 다름없었는데도 하루 3시간만 자며 지독하게 공부한 끝에 1년 4개월 만에 통과했다. 유타주 브리검영대에 입학한 뒤 일본에 모르몬교 선교사로 파송돼 활동했고, 군에도 입대해 군종 하사관으로 독일에서 복무했다. 졸업 후 피츠버그대와 워싱턴대에서 각각 국제정치학 석사와 동양학 석·박사 학위를 땄다.
▲ 약혼녀 도나와 함께 1963년 9살 연하의 도나와 약혼식을 치르고 찍은 기념사진이다. 결혼식은 국제결혼을 허용하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올렸다.
ⓒ 재외동포청
대학에서 만난 9살 연하의 도나(Donna)를 만나 1963년 6월 결혼했다. 그때만 해도 국제결혼을 금지하는 주가 많아 국제결혼이 허용된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 신고를 마쳤다. 입양아들 폴과 친딸 리사를 두었다.

신호범이 한국을 다시 찾은 것은 브리검영대 하와이캠퍼스 교수로 재직하던 1966년이었다. 신입생 모집을 위해 동양의 여러 나라를 돌다가 들른 것이다. 친가와 외가 가족들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아내도 대동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리자 기자 한 명이 다가와 이것저것 물었다. 예전과 달라진 점에 관한 질문에 "웃는 사람이 많다"고 대답했다. 이튿날 신문에는 "거리 소년이 11년 만에 대학교수가 되어 미국인 부인을 데리고 과거의 찡그린 얼굴을 버리고 함박웃음으로 돌아왔다. (중략) 그가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보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 웃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신호범은 고향 금촌을 찾아 외할머니, 외숙모, 외사촌 동생들을 만난 뒤 서울 영등포에서 아버지, 새어머니, 이복동생들과도 해후했다. 구걸하다가 매 맞고 쫓기던 서울역과 남대문시장의 거지 합숙소도 찾았다. 11년 전 화물선을 타고 한국을 떠났던 부산항을 비롯해 논산, 광주, 목포, 경주 등지를 돌아보기도 했다.

그는 워싱턴대에서 동양학을 전공하며 워싱턴주 시애틀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한국학과 서두수 교수의 충고를 받고 한국어를 다시 배웠다. 어릴 때 거리에서 익힌 말은 상스러웠기 때문이다. 교환교수로 온 고병익 박사에게서는 한국 고대사와 현대사를 배웠다.

1972년이 되자 서 교수는 한인회 관계자를 하나씩 소개해주었다. 한국어 구사 능력도 충분해졌으니 이제는 동포사회에 봉사할 때가 됐다는 뜻이었다. 이민 오는 사람을 공항에 나가 마중하는 것을 비롯해 아파트 임대, 자녀 입학 수속, 직장 알선 등을 도왔고 가끔은 재판정에 나가 통역을 돕기도 했다. 시애틀한인회장을 두 차례 지냈고 이런저런 동포단체에도 이사와 고문으로 바쁘게 불려 다녔다.

박사과정을 마친 뒤에는 시애틀 근교의 쇼어라인대 교수로 부임했다. 부동산중개업을 겸업하며 돈을 벌어 한국의 부모와 이복동생 5명을 차례로 미국에 초청했다. 주지사 무역고문도 15년 동안 맡아 한국·중국·일본 등과의 교역 증진에 기여했다. 1992년에는 동포들과 함께 장거리 전화회사 TTI도 차렸다.

5개월간 1만 4000가구 일일이 돌며 선거운동

신호범이 정계 진출을 결심한 것은 1992년 2월이었다. 소수민족의 인권을 옹호하는 민주당을 택했다. 이전에도 주의원 출마를 권유받긴 했지만 3년간 한국에서 모르몬교 선교부장을 지냈기 때문에 미룬 것이었다. 두 달 뒤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나 한인타운이 쑥대밭이 됐다. 선거전에서는 악재였으나 동포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서라도 꼭 당선돼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만들었다.

그의 지역구는 94%가 백인이고 아시안은 3%에 불과한 공화당 텃밭이었다. 더욱이 상대는 3대째 장의업을 이어오는 터줏대감이자 3선의 중견이었다. 신호범은 5개월간 1만4000가구를 집집마다 돌며 자신의 인생 역정과 포부를 이야기했다. 인종차별이 담긴 험한 말을 들으며 문 앞에서 쫓겨나기 일쑤였고 개에게 물린 적도 여러 번이었으나 그의 사연과 정성에 감복하고 출마 취지와 공약에 공감해 지지를 약속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해 11월 초 치러진 선거에서 워싱턴주 최초의 한인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초중고도 졸업하지 못한 입양아 출신이 22년간의 공화당 아성을 무너뜨리고 기적을 이뤄낸 것이었다. 이전에도 송호윤, 김창준, 재키 영 등 한인의 정계 진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두 엘리트 코스를 밟은 후보였고, 캘리포니아주와 하와이주 등 비교적 동양계와 유색인종이 많이 사는 곳에서 당선됐다.

하지만 1994년 연방 하원의원과 1996년 워싱턴주 부지사에 도전했다가 연거푸 낙선했다. 부지사 선거의 표차는 불과 0.4%였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려고 한인교회 주선으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다. 강제 이주의 시련을 겪고도 민족정체성을 지키고 성공 신화까지 이뤄낸 고려인 동포들을 보고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한인 2세들과 입양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겠다는 각오로 처음 정계에 입문할 때보다 더 열심히 뛴 결과 1998년 워싱턴주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내리 4선에 성공했으며 2006년에는 무투표 당선이라는 초유의 기록도 만들어냈다. 상원 부의장과 무역경제발전 분과위원장도 지냈다.

편견 담긴 '오리엔탈' 대신 '아시안'으로 바꿔
▲ 상원의원 취임 선서 신호범 의원(오른쪽)이 1998년 워싱턴주 상원에 처음 등원해 의장 앞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 재외동포청
신호범은 당선 그 자체로도 역사를 쓴 것으로 평가될 뿐 아니라 의정 활동을 통해서도 숱한 업적을 남겼다. 1993년 초 하원 등원 직후 6·25 참전용사 기념비 조성을 제안해 미국에서 가장 감동적인 참전 조형물을 세웠다. 한인들이 해마다 6월 25일 전쟁 발발일과 7월 27일 정전 협정일에 참전용사와 유자녀들을 이곳에 초청해 사은 잔치를 벌이고 있다.

불어·스페인어·독어에 한국어·중국어·일본어를 추가하는 이중언어 교육법 개정안을 발의해 1994년부터 중·고교와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기술교육센터 건립도 주도해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청소년들이 다시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상원의원이 된 뒤에는 '오리엔탈(Oriental)'로 불리던 동양인의 호칭을 '아시안(Asian)'으로 바꾸는 법안을 제출했다. 오리엔탈이란 단어에는 서구 중심의 시각과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첫해에는 부결됐으나 "동쪽에 사는 사람들로서 코가 납작하고 눈이 생선처럼 조그많다"는 등의 부정적인 대영사전 뜻풀이를 의원들에게 알려주며 설득한 끝에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2003년 미국 연방을 비롯한 50개주에서 통과돼 모든 공문서에서 오리엔탈이란 단어는 아시안으로 대체됐다.

미주 한인 이주 100주년을 맞은 2003년에는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한인 노동자 102명이 입항한 날을 기념해 1월 13일을 '한인의 날'로 지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50개주 가운데서는 처음이었으며 2005년 연방의회가 이날을 '미주 한인의 날'로 제정하는 마중물이 됐다.

신호범은 한인 입양아 지원단체 KIDS(Korean Identity Development Society)를 조직하고 입양아와 동포 2세로 구성된 샛별예술단도 이끌었다. 한국을 다녀올 때마다 입양아 보모 역할을 하는가 하면 수많은 입양아의 멘토 역할을 자처해 미국 한인 입양아의 대부로 불렸다. 한미정치교육장학재단도 설립해 차세대 한인들을 정치 지도자로 키우는 일에 앞장섰다.

이 같은 공로로 KBS 해외동포 특별상, 미주동포후원재단의 자랑스러운 한국인상, 2003년 전미 최고 해외 이민자상, 워싱턴주 최우수 상원의원상, 세계YMCA 공로상 등을 받았고 재외동포재단 '자랑스러운 한민족'으로 뽑혔다. 2009년 명예제주도민으로 선정됐고 2008년 백제문화제 홍보대사, 2011년 우리문화재찾기운동본부 미주 홍보대사 등도 맡았다.

2014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며, 2021년 4월 12일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7월 11일 시애틀 페더럴웨이 코앰TV 공개홀에서는 워싱턴주 범동포사회가 주최하는 추모식이 열리기도 했다.

'아메리칸 드림'은 누구나 꿈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신호범은 가장 가혹한 역경을 딛고도 무지개를 잡는 데 성공했고, 개인적 성취에 머물지 않고 꿈을 나눠주는 데 여생을 바쳤다. 지난 12일 그의 5주기를 맞았다. 미주 한인사회에서도 너무 빨리 그를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 ‘미국 입양 한인의 대부’ 신호범 거지 소년에서 미국의 대학교수를 거쳐 정계 주요 인사가 된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의원.
ⓒ 시애틀한인회
▲ 신호범 박사 추모식 2021년 7월 11일 미국 시애틀 페더럴웨이 코앰TV 공개홀에서 워싱턴주 범동포사회가 주최하는 추모식이 열렸다. 가운데 한복을 입은 여성이 부인 도나 씨다.
ⓒ 시애틀한인회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사랑하며 섬기며> <공부 도둑놈, 희망의 선생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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