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아래 '핫핑크' 차주전자, 봄의 절정을 마셨습니다

노시은 2026. 4. 20.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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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모봉과 귀비우롱... 두 개의 완벽히 다른 봄을 누리게 해준 차들

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 <기자말>

[노시은 기자]

 곡우즈음에는 참으로 다양한 연둣빛이 산과 언덕을 빼곡하게 채운다.
ⓒ 노시은
 자작나무의 어린 잎사귀의 색깔이 참 오묘하게 반짝여서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 노시은
곡우(穀雨, 4월 20일)를 코앞에 두고 우당탕 몸살이 찾아왔습니다.
봄비가 내려 땅을 윤택하게 한다는 넉넉한 절기지만, 저는 창밖으로 짙어가는 초록을 초조하게 바라보다가, 병원 약 털어 넣고 이불 동굴로 돌아오는 일만 반복했습니다. 약기운에 취해서인지 정말 많이 아파서인지 기운이 하나도 없이 꾸벅꾸벅 졸다가,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일어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났죠.
 녹색의 봄이 우러나는 중...
ⓒ 노시은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몸에 남은 모든 기운을 쥐어짜 전기 포트에 물을 올렸습니다. 다가올 곡우에 가장 잘 어울릴 차는 뭘까 고심 끝에 안휘성 황산의 안개를 먹고 자란 황산모봉(黃山毛峰)을 꺼냈습니다. 청명 무렵의 특급 차처럼 날 선 화려함은 덜할지 몰라도, 봄볕을 충분히 받아 넉넉하고 수더분해진 곡우 무렵의 차입니다.
 봄에 직접 캐낸 쑥을 듬뿍 넣고 만들어 맛도 향도 진한 쑥떡. 너무 말랑말랑 쫀득쫀득 맛있어서 요즘 나의 최애 간식이다.
ⓒ 노시은
다식으로는 며칠 전부터 완전 푹 빠져 매일 먹고 있는 투박한 쑥떡을 골랐습니다. 쑥을 충분히 넣어 검어 보이고 쌉쌀한 맛까지 장착한 쑥떡이 여린 녹차의 맛과 향기를 죽일까봐 약간 걱정은 됐지만 곧 기우였음이 밝혀졌어요. 황산모봉의 맑은 산 기운이 제법 다정하게 어우러지며 아픈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줍니다.
 찻물이 맑았고 맛은 오묘하고 복잡한 쌉쌀한 맛 끝에 단맛이 있었다.
ⓒ 노시은
 찻잎이 뜨거운 물을 만나 제 몸의 성분을 물에 내어주는 걸 멍하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 노시은
눈부신 새봄에 어울리는 차

봄의 신록을 닮은 연둣빛 찻물 속에 가라앉은 찻잎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문득 최고급 황산모봉을 감별할 때는 찻싹 곁에 붙은 작고 누르스름한 잎사귀, 이른바 황금편(黄金片)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찾아보니 이 작고 반짝이는 금빛 조각의 정체가 다름 아닌 여엽(余叶, 남은 잎)이라고 하더군요. 지난해에 맺혀 미처 자라지 못한 싹이 추운 겨울 동안 웅크린 채 견뎌냈다가, 마침내 따뜻한 봄이 오자 연두색 새싹 곁에 묻어서 함께 피어난 첫 잎이라는 것이지요. 지난해의 고단했던 시간과 올해의 눈부신 새봄이 '황금편'이라는 예쁜 이름으로 찰싹 달라붙은 셈입니다.
 늘씬하게 쭉 뻗은 황산모봉의 마른 찻잎을 보며 안휘성 황산의 안개를 떠올리게 된다.
ⓒ 노시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 황산모봉에도 발견되지 않을까 싶어 집게로 마른 찻잎을 요리조리 헤집어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반짝이는 금빛 조각이 숨어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운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아름답고 유쾌했던 '나만의 황금편'이 떠올랐거든요.
 피어난 꽃들은 모두 탐스럽게 흐드러졌던 봄날.
ⓒ 노시은
그날은 봄비가 만개한 벚꽃들을 휩쓸어가기 직전이었습니다. 사실 그날 저는 책상 앞에 앉아 어떻게든 원고에 집중해 보려 애를 쓰고 있었죠. 하지만 창밖으로 살랑이는 봄바람과 흐드러진 벚꽃의 유혹 앞에 그만 백기를 들고 말았습니다.

'이런 날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건 계절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서둘러 합리화를 마친 저는, 고심 끝에 고른 다구들, 찻잎, 쑥떡, 돗자리, 작은 차테이블을 바리바리 싸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마감은 몇 시간 뒤의 저에게 맡기기로 했어요. 다음 날부터 이틀이나 내린다는 비를 맞으면 벚꽃의 절정은 강제로 끝을 맞을 것이고, 그걸 즐기기 못한 채 지난다면 저는 내년에 벚꽃이 다시 필 때까지 후회할 것이 뻔했으니까요.
 싱가포르에서 구한 청나라 시대(믿거나 말거나)의 핫핑크 차호에 대만의 귀비우롱을 우려 차 한 모금, 벚꽃 구경 한 번 하며 홀짝홀짝.
ⓒ 노시은
가장 완벽하고도 유쾌했던 봄날의 풍류

룰루랄라 나간 그날 벚꽃놀이의 다구 라인업은 제법 파격적이었습니다. 간편해 밖에서 차 마실 때마다 들고 나가는 휴대용 다구 대신, 싱가포르에서 발품 팔아 구했던 청나라(물건이라고 주인은 주장했던) 빈티지 '핫핑크' 차호를 챙겼거든요. 푸른 하늘과 흩날리는 연분홍 벚꽃 사이에서 소심하게 기 죽지 말라고 골랐죠. 여기에 어울릴 잔은 커다란 핑크빛 복숭아가 새겨진 유리잔에 공도배까지 세팅하고 나니 제법 근사한 찻자리가 될 것 같았습니다.

마시게 될 차는 대만의 귀비우롱(貴妃烏龍)이었습니다. 이 차로 말할 것 같으면, 소록엽선이라는 작은 벌레들이 찻잎을 갉아먹은 상처가 아물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콤한 꿀과 꽃향기를 뿜어내는 아주 매력적인 녀석이죠. 화사하게 피어난 벚꽃에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맛과 향기를 가졌기에 선택!

가장 적절한 자리를 찾기 위해 꽃그늘 아래를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모릅니다. 겨우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아 돗자리를 펴고 찻상을 차렸습니다.
 벚꽃그늘 아래서 향긋한 귀비우롱을 마셨다.
ⓒ 노시은
'핫핑크' 차호에 뜨거운 물을 부어 귀비우롱을 향긋하게 우리고, 공도배로 옮겼던 차를 잔에 쪼르르 따라 한 모금 머금으며 벚꽃 한 번 봐주는 일을 반복했어요. 너무 행복했죠. 이제 집에서부터 소중히 챙겨 온 진득한 쑥떡을 크게 한 입 베어 물 차례였습니다.
그때 살랑이는 봄바람을 타고 연분홍 벚꽃 잎 하나가 복숭아 유리잔 속으로 톡, 떨어졌습니다. 보통 때 같았으면 황급히 건져냈겠지만, 그날은 달랐습니다. 잔에 뜬 꽃잎을 보며 씨익 웃고는 후후 불어가며 마셨어요.
 버드나무는 막 깨어난 연둣빛으로 뒤덮였다.
ⓒ 노시은
옛날에 물도 급히 마시면 체한다며 버드나무 잎을 하나 띄워서 건넨 마음을 자연이 제게 건넨 것이라 믿으면서요. 옛 선비들이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즐겼다는 풍류가 별건가 싶었습니다.
꿀맛과 꽃향기가 강렬한 귀비우롱을 홀짝이며, 하늘하늘 떨어진 벚꽃잎 가니시까지 곁들여 마시는 일. 비록 우아한 정자 위는 아니었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날 제가 찾은 가장 완벽하고도 유쾌한 봄날의 풍류였습니다.
 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노랑 꽃들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 노시은
내 안에 스며드는 황금편

그날의 감각을 떠올리며 방안의 찻잔을 다시 내려다봅니다. 찻잎 사이에서 황금편의 흔적은 끝내 찾지 못했지만, '핫핑크' 차호와 함께했던 찬란한 기억이 쑥떡의 짙은 향기를 타고 이 고요한 찻자리로 훅 밀려 들어 왔습니다. 물리적인 이파리 대신, 가장 화려했던 봄날의 쾌활한 추억이 현재의 적막한 찻자리 위에 다정하게 포개어지는 순간. 그것이 바로 지금 제가 마시는 황산모봉의 황금편이었던 셈이죠.

벚꽃 아래서 마셨던 귀비우롱이 통통 튀는 봄의 절정이었다면, 아픈 몸을 달래며 넘기는 황산모봉은 지나가는 화려한 봄을 차분히 정리하고 싱그러운 여름을 맞이할 준비를 돕는 연둣빛 위안입니다. 약 기운에 취해 방안에만 갇혀 있다고 억울해했는데, 가만히 보니 저는 이 찻물과 떡 한 조각을 매개로 두 개의 완벽히 다른 봄을 아주 충만하게 겹쳐 누리고 있었네요.

곡우의 비가 정말 내리려는지 창밖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집니다. 꽃잎 불어가며 마셨던 향긋한 풍류도, 며칠째 몸을 무겁게 누르던 고단함도, 마지막 남은 맑은 차 한 모금과 함께 기분 좋게 삼켜봅니다. 봄은 그저 아쉽게 스러지는 것이 아니라, 찻잔 속에 가라앉은 나만의 황금편이 되어 제 안으로 아주 깊고 달콤하게 스며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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