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서류 무덤 속 스러지다…검사실마다 붙은 깜짝 스티커 [검찰 엑소더스]

정진우, 석경민, 조수빈 2026. 4. 20. 05: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검사실 문 앞에 붙은 보안점검 유예 스티커. 중앙지검 소속 형사부 검사들 대부분은 사건 기록을 캐비넷 등 보안장소에 보관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의 사건을 배당받고 있다. 김종호 기자

전국 최대 규모 검찰청인 서울중앙지검 7층. 이 곳엔 한 사건당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기록과 고강도 근무로 악명 높은 금융사건을 전담하는 형사7부 소속 검사실이 모여 있다. 11년차 김다현 검사(변시5회) 역시 샌드위치나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며 쉴 틈 없이 일해야 자정 무렵 겨우 하루 일과를 마칠 수 있다.

지난해 말부터 김 검사가 일하는 검사실 문 앞에는 ‘보안점검 유예’라고 적힌 스티커가 붙어있다. 보안점검은 사건 기록을 지정된 캐비넷 등 보안 장소에 보관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절차로 수시로 이뤄진다. 하지만 매일 필사적으로 사건을 처리함에도 그보다 더 많은 양의 사건이 새로 배당되다 보니 관련 기록을 지정된 보안 장소에 보관하기 어려울 정도로 업무가 밀려 이 점검을 유예하게 된 것이다. 실제 지난달 찾은 김 검사실 내부는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이동할 수 있는 작은 틈만 남기고 사방이 사람 키만큼 쌓인 사건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김 검사의 책상은 물론 수사관·실무관들의 업무 공간 역시 각종 서류로 뒤덮인 지 오래다.


'보안점검 유예' 스티커로 뒤덮인 중앙지검


김 검사뿐 아니라 중앙지검 소속 검사들 대다수가 비슷한 고충으로 보안점검 유예를 신청한 상태다. 오히려 보안점검 유예를 신청하지 않은 검사를 찾는 게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김다현 검사가 지난 3월 4일 서울 서울중앙지검 검사실에서 서류더미에 둘러싸여 앉아 기록을 검토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검사실이 아니라 기록보관실이라고 부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말에 김 검사는 “기록에 파묻힌 생활은 익숙해진 지 오래다. 시야도 답답하고 서류에서 나온 먼지와 함께 생활하는 처지지만, 그런 불평조차 사치스러울 정도로 당장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매일 쌓여 있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김 검사는 “사건의 난이도와 복잡성 등을 기준으로 오전엔 비교적 간단한 수사만으로 처리하는 사건을 검토하고, 오후엔 복잡하고 무거운 사건을 검토하며 피의자·참고인 조사 등을 진행한다. 이어지는 야근에선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사건들을 집중적으로 검토한 뒤 오후 11~12시쯤 퇴근한다”고 하루 일과를 설명했다. 이어 “최근 사직하는 검사의 수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지만 검찰에서 처리해야 하는 사건의 규모는 여전한 탓에 대부분의 검사들이 매일 수만 쪽 기록과 싸우며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가는 한계 상황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김다현 검사 사무실에 쌓인 사건 자료. 김종호 기자


줄사표와 업무 과부하의 악순환


검찰청 폐지를 6개월 앞둔 검찰은 이미 조직 곳곳이 곪아가며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검찰의 수사권을 박탈하고 검찰청을 공소청으로 전환하는 '검찰개혁'이 추진되며 일선 검사들이 줄줄이 조직을 떠났고, 남은 검사들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밀려드는 사건 처리에 허덕인다. 검사들의 사직과 그로 인한 인력 부족의 악순환이 반복되며 이제는 대부분의 검찰청이 형사사법 대응과 범죄 수사라는 본연의 기능마저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검찰의 사건 적체 현상은 지난달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도 직접 문제의 심각성을 언급했다. 이 대통령이 “검사 1인당 (미제) 사건이 500건이 넘는다는 보도가 있는데 실제 상황이 어떠냐”고 묻자 구자현 검찰총장 직무대행은 “한계치에 다다른 상황이어서 인력적인 문제가 보강되지 않으면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답했다. 구 대행은 특히 “수사권 조정 문제 때문에 사실 (검찰 구성원들의) 의욕과 시가도 많이 떨어져 있다. 정말 혼란기이긴 하다”고 덧붙였다.

구 대행의 지적대로 검찰 내부에선 검사 부족 현상은 표면적 원인일 뿐 그 이면엔 검사직 수행의 밑바탕이 됐던 사명감과 자긍심이 사라진 최근의 분위기를 검찰 위기의 근본적 원인으로 꼽는다.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검찰청을 폐지하고 검사의 권한과 기능을 박탈하는 검찰개혁이 진행되는 등 외풍이 거센데다 지난해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 사태를 포함해 검찰 조직이 분열되는 일이 내홍까지 반복됐다.



지난 16일 윤석열 정권 정치검찰 조작기소 의혹 사건 진상규명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이원석(아랫줄 오른쪽 둘째) 전 검찰총장. 뉴스1


극단 시도한 검사, 전직 총장은 “세상 등지고 싶다”


‘윤석열 정권 정치검찰 조작 기소 의혹 사건 진상규명 국정조사’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쌍방울 대북송금과 대장동 사건 등을 수사한 전·현직 검사 십수명을 심판대에 세운 뒤 집중포화를 가하는 모습 역시 상당수 검사들에게 무력감을 안겼다.

과거 대장동 사건을 수사했던 이주용 검사는 지난 16일 ‘윤석열 정권 정치검찰 조작기소 의혹 사건 진상규명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채택된 이후 극단 시도를 했다. 이 검사는 주변에 “내가 죽어야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겠나. 내 떳떳함을 밝히고 싶다”고 호소했다고 한다. 이원석 전 검찰총장은 청문회에서 “저희들(검찰)을 내란 세력으로 치부해 모조리 다 나쁜 사람이고, (사건을) 조작했다고 한다. 세상을 등지고 싶은 심정”이라고 호소했다.

정진우·석경민·조수빈 기자 dino87@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