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은행 외면에…중형조선사 “수주 날리고 中에 물량 뺏길 판”

“조선업 수퍼사이클(초호황기)이 왔는데, 올라탈 기회조차 사라질까봐 두렵죠.”
19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국내 중형조선사 A사는 지난해 따낸 컨테이너선 3척 수주 계약이 두세 달 안에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선박 수주의 필수조건인 선수금환급보증(RG·Refund Guarantee)을 받지 못해서다. RG는 조선사가 선박을 제때 인도하지 못할 경우, 금융기관이 선주에게 선수금을 대신 지급하겠다고 보증하는 제도다. A사의 경우 2척은 6월까지, 1척은 7월까지 RG를 받지 못하면 선주가 계약을 파기할 수 있게 된다.
RG 발급을 마냥 기다릴 수 없었던 A사는 납기를 맞추기 위해 이미 건조 작업을 시작했다. 끝내 RG를 받지 못해 계약이 취소된다면 지금까지 투입된 수백억원의 건조 비용도 날릴 수밖에 없다. A사 관계자는 “계약이 취소되면 우리는 물론, 한국 중형조선사에 대한 국제 신인도가 떨어져 앞으로 계약을 따내는 데 불리해지고 중국 등 경쟁사에 물량을 빼앗길 수 있다”고 했다.
국내 중형 3사(대한조선·케이조선·HJ중공업)에 RG를 발급하는 기관은 산업은행·수출입은행·무역보험공사 등 3곳이 대표적이다. 대부분 대형조선사에 지원이 쏠린 가운데 특히 수출입은행은 편중이 심했다. 김영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각 기관에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5년간(2025년 10월 기준) 수출입은행이 발급한 RG의 99.3%(35조2752억원)는 대형조선사 대상이었고, 중형사는 0.7%(2307억원)에 그쳤다. 중형사 비중이 산업은행은 37%, 무역보험공사는 23.7%인 것에 비하면 유독 낮은 수치다.

중형사 지원에 소극적인 이유는 신용 위험 때문이다. 수출입은행 관계자는 “우리는 총 여신 중에서 신용 여신 비중이 80%를 넘어 다른 정책금융 기관보다 리스크 관리 부담이 크다.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거나 재무구조가 취약한 중형조선사에 대한 지원을 급하게 늘리기는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업계에선 2010년대 조선업 불황을 겪은 금융기관들이 중형조선사 지원을 기피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시 수출입은행도 성동조선, 대선조선의 부실화로 큰 손실을 떠안은 바 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그때 은행 심사역들 사이에선 ‘물에 떠다니는 건(배)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지금은 조선이 호황이지만 언제 사이클이 바뀔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조선업계는 상황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선박 가격이 고공행진 중이고, 원자재(후판) 단가도 크게 낮아져 마진이 극대화됐다는 것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예전엔 선수금을 30% 밖에 못 받는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선수금을 70%까지 요구할 수 있을 만큼 공급자 우위 시장이 됐다”고 말했다.

정부와 여당에서도 중형사 RG 확대책을 내놓고 있다. 지난해 금융위원회는 일정 가이드라인만 넘으면 RG 발급에 대한 기관 면책 특례를 적용하는 방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허성무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대형조선사에서 넘치는 수주 물량을 중형사가 흡수해야 하는데, RG가 장애물이 되고 있다”며 “은행들이 과거 조선 경기가 나쁠 때를 생각해 걱정이 많지만 지금은 더 과감하게 지원하도록 관계 기관에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각 금융기관의 RG 한도가 과거에 정해진 것이라 현재 환경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김인현 한국해양대 석좌교수는 “당분간 조선업 전망이 밝은 만큼, 각 기관이 RG 한도를 늘려줄 필요가 있다. 정책금융 기관 뿐 아니라 민간 금융도 협력해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했다.
남윤서 기자 nam.yoonse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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