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고 병든 美함정 줄섰다…MRO 수주 석달만에 작년치 근접

지난 6일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 18년 간 태평양을 누벼 온 배 한척이 닻을 내렸다. 주인공은 미국 해군 7함대 소속 4만1000t급 화물보급함 ‘USNS 리처드 E 버드’함. 2008년 취역한 뒤 해상 물류 수송, 인도적 지원 등의 임무를 맡아온 이 배는 선체와 구조물, 추진·전기 계통 등 100여개 항목에 대한 정밀 정비를 마친 뒤 오는 6월 다시 바다로 나설 예정이다.
19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HD현대중공업·한화오션 등은 올 들어 3건의 미 해군 함정 유지·보수·정비(MRO) 사업을 수주했다. 지난해 국내 조선업계가 총 5건(HD현대중공업 2건, 한화오션 2건, HJ중공업 1건)의 미 함정 MRO 사업을 수주했던 것을 감안하면 연초부터 맹활약 하고 있는 것이다.
HD현대중공업은 앞서 지난 1월 미 해군으로부터 수주했던 ‘세사르 차베즈’함의 MRO도 성공적으로 마치고, 3개월여만인 지난 5일 돌려보냈다. 첫 계약 당시 90여개 항목에 대해 MRO 작업 요청을 받았지만, 작업 수행 과정에서 100여개 정비 항목이 추가로 발굴돼 발주 금액이 크게 늘어났다고 한다.
한화오션도 올 들어 미 해군으로부터 총 2건의 MRO 사업을 수주해 부산과 진해에서 각각 정비 작업을 진행했다. 삼성중공업도 미국 MRO 전문 조선소인 비거마린그룹과 체결한 전략적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MRO 사업에 본격 참여할 계획이다.
HJ중공업은 지난해 12월 미 해군 보급체계사령부(NAVSUP)로부터 수주한 4만t급 군수지원함 ‘USNS 아멜리아 에어하트함’의 MRO 추가 작업을 진행하게 됐다. 당초 장비·설비 점검 및 유지보수를 거쳐 지난달 출항 예정이었지만, 정비 과정에서 계약에 포함되지 않았던 추가 정비 사항이 발견돼 오는 6월까지 작업을 연장하게 됐다.
거대한 군함을 분해하다시피 하며 정비하는 MRO 사업은 선박의 전 주기에 걸쳐 이뤄지기 때문에, 조선사가 장기적 수익을 확보할 수 있다. 시장조사업체 포춘비즈니스인사이트는 글로벌 해군 함정 MRO 시장 규모가 올해 1271억2000만 달러(약 186조5900억원)에서 2034년 2154억6000만 달러(약 316조2500억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미 해군의 MRO 사업 수주는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MASGA)의 물꼬 성격으로 평가받는다. 사업 규모 자체보다 미국 시장 진입과 신뢰 확보를 통해 향후 큰 후속 사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 선박 산업은 전통적으로 해외 기업들의 접근이 어려운 시장이다. 1920년 제정된 미국 연안무역법(존스법)에 따라, 미 해상에서 군함 등 선박을 운용하려면 미국 조선소에서 건조·개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조선업계에 기회가 열린 건 코로나19 등을 거치며 미국 조선사들의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고, 미 해군 함정의 노후화 등으로 현지 조선사만으론 MRO 수용력이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미 우방국 중 조선업 경쟁력이 뛰어난 한국 등에 시장 일부를 개방했다. 그럼에도 국내 조선업계는 사실상 일본이 본거지인 미 해군 제7함대 함정의 MRO만 가능하다.
윤지원 상명대 국가안보학과 교수는 “한국 정부가 나서 광범위한 MRO 협력이 가능하도록 미국 측에 관련 법안과 제도의 개정을 촉구하고, 미 해군의 연간 함정 유지보수 일정을 사전 공유받을 수 있도록 협조를 구해야 한다”며 “미국과의 확장성은 다른 유럽 국가에도 신뢰성을 높이는 계기가 돼 국내 조선업계의 MRO 사업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석현 기자 ko.suk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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