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보여도… 역사 듣고 만진 국중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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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도수를 높인 안경을 끼었지만, 이 모든 것들의 세부를 이제 나는 보지 못합니다. 형상과 동작들은 덩어리로 뭉개어져 있고, 디테일은 오직 상상의 힘으로만 선명합니다."
한강 작가의 소설 '희랍어시간'에서 시력을 잃어가는 희랍어 강사는 눈앞의 세상을 이렇게 표현한다.
"3시 방향으로 스무 걸음 가겠습니다"는 해설사의 구체적인 안내를 들어도 눈앞이 캄캄한 상황에선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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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시각장애 현장영상해설 체험
해설사가 1대 1로 이동 도우며 구체적 설명
유물 본뜬 촉각 전시품 곳곳에… 이해 폭 넓혀
서울관광재단, 남산·경복궁 등 10곳서 운영

“최대한 도수를 높인 안경을 끼었지만, 이 모든 것들의 세부를 이제 나는 보지 못합니다. 형상과 동작들은 덩어리로 뭉개어져 있고, 디테일은 오직 상상의 힘으로만 선명합니다.”
한강 작가의 소설 ‘희랍어시간’에서 시력을 잃어가는 희랍어 강사는 눈앞의 세상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처럼 시각장애가 있는 이들은 문화생활을 어떻게 즐길까.
국민일보는 지난 18일 서울관광재단이 운영하는 시각장애인 대상 현장영상해설 프로그램을 동행 취재했다. 현장영상해설이란 시각장애인이 인지할 수 없는 시각 정보를 언어해설이나 촉각, 청각 등 다른 감각을 활용해 전달하는 방식이다. 기자는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눈을 감은 채 현장영상해설사의 도움을 받으며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를 둘러봤다.
박물관 앞에서 만난 6년차 현장영상해설사 조수미(48)씨는 기자에게 자신의 팔을 잡게 한 뒤 1층 선사고대관으로 인도했다. “3시 방향으로 스무 걸음 가겠습니다”는 해설사의 구체적인 안내를 들어도 눈앞이 캄캄한 상황에선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박물관 관람은 청각과 촉각을 활용한 형태로 이뤄진다. 박물관 곳곳에는 실제 유물을 본떠 만든 ‘촉각 전시품’이 마련돼 있었다. 청동기 시대의 농경문 청동기를 매만지자 오돌토톨하게 새겨진 무늬와 매끈한 청동의 촉감이 형상을 대신했다. 조 해설사는 신라 금관의 장식인 ‘굽은옥’을 설명하기 위해 기자의 손을 잡고 손가락 마디를 하나씩 굽히며 모양을 전하기도 했다. 촉감으로 전해지는 설명은 오히려 기자의 상상력을 극대화했다.
이날 해설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천적 시각장애인 황오차(63)씨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접근성이 예전보다 상당히 좋아졌다”며 웃었다. 황씨는 10년 전 유전자 변이로 망막 세포가 점차 퇴화하는 ‘망막색소변성증’을 앓다가 전맹(全盲)이 됐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시각장애인의 80~90%는 황씨처럼 후천적 시각장애인이다.
황씨는 기자와 3층 오감전시실에 위치한 ‘성덕대왕신종 진동의자’에 나란히 앉아 종을 칠 때 발생하는 64㎐가량의 진동을 느껴보기도 했다. 이제는 세상 빛이 줄기 형태로만 어슴푸레 보인다는 황씨는 “해설사의 설명과 촉감을 통해 유물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관광재단은 2019년부터 남산, 경복궁, 창덕궁 등 총 10곳에서 시각장애인이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현장영상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김다연 기자 y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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