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 빠져 전 재산 헌납한 전직 교사, 훈장 받은 이유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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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종교 3대 교주였던 윤세복 |
| ⓒ 국가보훈부 |
"경상남도 밀양이 고향인 윤단애는 일찍부터 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지 못하여 고심하던 중, 경술국치 직후 서울에서 대종교의 도사교 나홍암을 만나 역사·종교·시국 등에 관한 담화를 들은 다음에는 개연히 깨닫고 느낀 바 있어 곧 입교하여 시교(施敎)의 임무를 맡게 되었으며, 본명 세린(世麟)을 세복(世福)으로 고치고 아호 단애(檀崖)를 쓰게 된 것이 모두 이때부터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살 길이 숭조보국(崇祖報國)의 정신과 사상으로 서로 협동하는 데 있다고 명심한 단애는 30세 되는 이듬해 봄에 곧 가산을 정리하여 가지고 만주로 건너가 환인현에 자리를 잡고 포교와 독립운동을 병행하기 시작하였다."
대한제국 멸망 직후에 대종교 도사교(교주)인 홍암 나철의 강론을 듣고 포교 임무를 부여받은 윤세복은 '나라를 되찾자면 나라의 시조인 단군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라는 신념을 갖게 됐다. 그런 확신하에 그는 재산을 과감히 정리했다. 그 재산은 대지주 반열에 드는 규모였다.
윤세복이 전 재산을 정리한 까닭
국학연구원이 발행한 <선도문화> 2010년 제8권에 실린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의 논문 '단애 윤세복의 민족학교 설립 일(一)고찰'은 "윤세복은 남만주(서간도) 시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가산 수만 석을 정리하여 즉시 출장을 떠났다"라고 기술한다.
전 재산을 정리하고 망명을 떠나는 그의 태도는 비장했다. 이것은 가족을 두고 홀로 떠나는 출장 형식의 망명이었다. 위 논문은 "후일 홍선·난악 남매는 모친을 여의고, 만주 무송현에 있는 부친을 찾아갔다"라고 알려준다. 이처럼 모진 마음으로 재산을 정리한 일은 그가 대종교를 기반으로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출발점이 됐다.
독립운동 역사에서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분야는 여성운동·농민운동·노동운동·사회주의운동·무정부주의운동과 더불어 대종교 운동이다.
특히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은 국내 항일투쟁의 주류를 이뤘는데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고, 대종교 운동은 종교와 항일이 거의 일체화된 특별한 운동인데도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윤세복은 그런 대종교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수여된 것은 건국훈장 3등급인 독립장이다. 훈장 등급이 다는 아니지만, 만주지역 독립운동을 이끈 대종교 최고지도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당한 등급은 아니다.
만주로 망명한 전직 교사 윤세복은 교육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 사업은 한국인들이 자신의 뿌리와 역사를 기억하며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지적 기반을 갖추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여러 곳에 순차적으로 학교를 세웠다.
망명한 첫해에 세운 학교는 동창학교다. 한민족의 또 다른 표현인 대동민족의 번창을 염원하는 의미가 이 교명에 담겼다. 이 학교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주입하는 일뿐 아니라 그들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데도 주의를 기울였다. 위 국학연구원 논문은 "경제 형편이 어려웠던 이주동포 자제들의 생계비를 보조"했다고 알려준다.
이 학교는 설립되자마자 일제 당국의 주시를 받았다. 불온한 학교가 등장했다는 첩보가 있었다. 위 논문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총무부 외사국이 받은 1911년 7월 13일자 보고서에 "회인현 횡도천에 단군 연호를 사용하는 배일학교가 설립되어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런 감시와 더불어 핍박을 받는 상황 속에서도 윤세복의 교육사업은 줄기차게 이어졌다. 학생들의 생계비까지 걱정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활동이었는데도, 그는 탄압하에서도 이 일을 지켜나갔다. 그는 일제의 핍박을 피해 옮겨 다니다가도 항상 어디엔가 학교를 세웠다. 학교를 버리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 학교를 짊어지고 도망가는 교육자였던 것이다. 위 논문은 동창학교가 일제의 핍박으로 인해 1914년에 폐교된 이후의 상황을 이렇게 서술한다.
"윤세복은 민족 성지인 백두산 인근의 무송현으로 이동하여 백산학교를 세우고 서간도 지역 무장독립투쟁의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1924년 윤세복은 대종교 도사교에 승임되어 교단을 이끌게 된다. 그러나 대종교 포교금지령과 만주사변 발발로 인하여 대일항전의 노선을 바꾸어 밀산현 당벽진으로 피신해 대흥학교를 설립하고 그 자신은 수도에만 전념했다. 1936년에는 영안현 동경성에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민족교육을 지속하였다. (중략) 광복 후 그의 교육운동은 서울에서 홍익대학교 창립으로 다시 실현되었다."
일제는 윤세복을 찾아내기 위해 지명수배령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밀정들을 곳곳에 파견할 필요도 없었다. 그가 도망가는 곳에는 항상 학교가 세워졌다. 그래서 조금만 기다리면 그의 소재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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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종교가 1985년 개천날 국립극장에서 올린 개천절 경축대제전에서 선의식을 올리고 있다 |
| ⓒ 연합뉴스 |
이에 따라 장쭤린 군벌정권은 1926년 12월 대종교 포교 금지령을 발포했다. 이 금지령은 4년 뒤 12월에 해제됐지만, 만주에 대한 일제의 영향력이 심화되던 때였으므로 대종교의 어려움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대종교뿐 아니라 만주지역 독립운동 자체가 어려움을 겪던 시절에 이 지역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이 윤세복이다. 그는 나철과 김교헌을 뒤이어 53세 때인 1924년에 대종교 제3대 도사교가 됐다. 그래서 일제와 장쭤린 정권의 협공으로 인해 시련이 가중되던 시절에 그가 이 지역 항일투쟁의 한 축을 이끌게 됐다.
이때 그는 교단과 독립운동을 살려내기 위해 곳곳을 직접 순회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위의 <독립운동사>는 그가 대종교 교단을 재건하는 과정을 아래와 같이 기술한다. 가는 곳마다 건물을 세우는 그의 특성이 이때도 발현된다.
"촌촌(村村) 전진하면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여 곳곳에 교당을 세우고, 1934년에는 하르빈시로 나가 김응두·박관해·김영숙·김서종 등 여러 사람의 협조를 받아 하르빈시 안평가(街)에 대종교 선도회를 설치하게 되니, 많은 동포들이 다시 대종교 교당을 찾아 단군 성조의 위덕을 추모하면서 민족정신을 가다듬게 되었다. 이 무렵 윤단애의 그 애교·애족의 각고 노력이야말로 필설로 다 형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감시와 핍박을 피해 다니며 가는 데마다 학교와 교당을 세우던 윤세복은 환갑을 넘긴 뒤인 1942년에 체포됐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공훈록> 제4권은 "1942년 11월 19일 일제가 대종교를 말살할 계획을 세우고 임오교변을 일으킬 당시 김영숙·윤정현·최관·이재유·이정·권상익·나정련 등 2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겪다가 광복으로 출옥하였다"고 기술한다.
대종교 지도부가 환국한 것은 1946년 2월이다. 그 뒤 윤세복이 심혈을 기울인 것도 학교 설립이다. 국학연구원 논문은 1947년 5월에 대종교 원로들이 홍익대학 설립준비위원회를 꾸렸다고 알려준다. 이 논문은 1946년 4월부터 1947년 5월까지 존재했던 미인가 학교인 홍문관대학관 학생들의 다수가 홍익대학교의 최초 학생들이 됐고, 교명 후보인 세종·동양·아세아·중앙·동방·대종·단종 등을 제치고 홍익이 선택됐다고 알려준다.
신흥종교에 빠진 30세 전직 교사의 '가산 탕진'은 만주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한 축이 생명력을 유지하고 이를 기반으로 민족교육의 명맥이 이어지는 데 기여했다. 이 성과는 해방 이후의 홍익대학교 설립으로도 이어졌다. 윤세복의 '가산 탕진'은 역사발전을 추동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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