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부터 발끝까지, 밭 한 가운데서 하는 따뜻한 샤워

이정미 2026. 4. 1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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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햇살 맞으며 밝아지는 기운... 소박한 밥상으로 이웃들과 소풍 기분 내는 시골의 점심

지난해 봄부터 오도이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금요일 퇴근 후, 주말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시골 쉼터 '느루뜰'로 향합니다. 이 글은 시골 쉼터에서 '사는 이야기'입니다. <기자말>

[이정미 기자]

"삐삐, 초초초, 찌찌, 쪼로롱~, 삐롱~"

새소리다. 눈을 감고 새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새의 맑은 음성을 도무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재간이 없다. 농부의 봄처럼 새들도 봄이면 기지개를 켜고 아침부터 할 일이 많은 걸까.

봄날 느루뜰에 아침이 밝았다. 일어나자마자 잠옷 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서둘러 밭으로 나갔다. 채소들과 나무들 표정을 보고 안부를 묻기 위해서다. 지난주 목요일 세찬 봄비가 내린 후 양파는 눈에 띄게 키가 자랐고 몸집도 토실해졌다. 3주 전에 심은 감자는 옹골차게 싹을 틔웠다. 하나도 빠짐없이 싹을 틔우다니 갑자기 어깨가 으쓱해졌다.

"근데, 우리 농사 너무 잘 짓는 거 아냐! 하하하."
"하하, 우리는 심기만 했는데... 땅이 알아서 잘 키우네."

시골의 봄날, 아침 햇볕 샤워

지난겨울 한파 대비 블루베리 하우스를 만들어 주며 정성을 쏟았던 블루베리 나무에도 새순이 뾰족뾰족 돋아났다(관련 기사 : 이과 남자가 만든 것 같지 않은 블루베리 하우스 ).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추위가 채 가시지 않았건만 조바심에 서둘러 씨앗을 뿌렸던 '한련화'도 싹을 틔워 동그란 잎을 귀엽게 펼쳤다. 일주일 사이 민들레는 하얀 홀씨를 가득 달았다. 보송보송 하얀 홀씨가 어쩜 이토록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리는지 참으로 예쁘고 신비롭다.

배꽃이 떨어진 자리에 연한 잎이 소복 하게 피었다. 감나무 가지 끝에도 연둣빛 새순이 더 많아졌다. 이리저리 다니며 채소와 나무들을 만난 후 밭 한가운데에 섰다. 밝고 따뜻한 봄 햇살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쏟아진다.

봄 햇볕 샤워다. 기운이 밝아진다. 공기는 청아하다. 폐 속 깊이 들이마신다. 묵은 숨이 비워지고 깨끗한 공기로 채워진다. 이런 날, 시골에 있다면, 반드시 심호흡을 천천히 할 일이다. 얼마나 맛있는 공기인가!
▲ 느루뜰의 봄날 아침 오른쪽 위에서 부터 블루베리 나무, 한련화, 감자, 양파, 민들레 홀씨. 온갖 새소리가 평화롭고 밝은 아침을 연다.
ⓒ 이정미
실은 금요일부터 새롭게 시작한 MBC 드라마 <21세기 대군 부인> 때문에 토요일 일찍 느루뜰에 가자고 남편에게 제안했다. 아이유가 능청스럽게 연기를 잘하니 재미있을 것 같았다. 느루뜰에는 TV가 없다. 내 마음 안에서는 드라마와 느루뜰 사이에서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승리는 느루뜰이 차지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눈 앞에 펼쳐지는 봄 풍경이 아른거리고 '보고 싶다'는 마음이 풍선처럼 커지면서 결국 밤 9시 30분 넘어 느루뜰에 도착했다.

'이토록 밝고 상쾌한 아침은, 그렇지. 다시 없을 아침인 마냥 흠뻑 누려야지.'

봄맞이 소풍 기분 내기

우리집 아침 식단은 한결같다. 당근, 브로콜리, 상추, 방울토마토를 기본으로 한 채소에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 오일로 드레싱한 샐러드, 통곡물 식빵이나 삶은 고구마, 삶은 계란, 사과 반쪽, 차를 올린다. 여기다 남편은 과일을 넣은 요거트를 먹는다. 느루뜰에서의 아침 식단도 평일과 똑같다. 차이점은 갓 딴 느루뜰표 상추가 올려진다는 것(당근 수확 시기가 되면 당근도 느루뜰표로 바뀔 것이다).

밝고 화사한 봄 햇볕이 쏟아지는 아침, 창 밖으로 펼쳐지는 산과 바다, 호수, 옹기종기 앉은 소담한 시골 마을을 바라보며 천천히 즐기는 아침 식사. 4월 이맘때만의 '제철 행복'이다.

"아랫집에서 반찬 가져다 주던데, 점심은 그걸로 먹으면 될 것 같아."

읍내 목욕탕에 다녀오는 나를 보자 남편이 말했다. 쉼터 싱크대 위에는 농막 이웃 언니가 준 '무청 시래기 조림'과 '얼갈이 배추 김치'가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넉넉한 언니 얼굴이 그려졌다.
▲ 느루뜰의 아침과 점심 식사 느루뜰표 상추를 듬뿍 얹어 먹는 샐러드와 곡물 식빵, 계란, 민들레 차로 차린 아침 식사(위). 농막 이웃 언니가 준 채소 반찬과 느루뜰표 머위 나물, 민들레 차로 소박하게 피크닉 기분을 낸 점심 식사(아래)
ⓒ 이정미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 양 박사님이 다음 주말에는 절친 부부가 농막에 놀러 올 거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언니는 아침부터 손님 맞이에 분주한 듯했다. 아무튼 덕분에 점심 밥상이 풍성해졌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소풍 기분을 내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일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바람이 다소 차가워서 발코니에서 식사하기엔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주말은 햇살이 따뜻하고 공기도 쾌청해서 소풍 기분을 내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느루뜰표 머위 나물, 농막 이웃 언니표 무청 멸치 시래기 조림과 얼갈이 배추 김치, 집에서 가져온 카레, 민들레차로 소박한 점심 밥상을 차렸다. 하얀 밥 위에 으깬 깨소금을 뿌렸다. 언니의 무청 시래기 멸치 조림은 부드럽고 양념이 재료에 골고루 스며들어 맛깔 났다. 멸치와 양파가 알맞게 조합되어 영양도 만점이었다. 포근한 날씨와 언니 덕분에 맛있고 행복한 점심 소풍이 되었다.

"언니, 민들레 차 마셔 보세요."
"음~, 좋다! 향이 은은하니, 나도 민들레 차 만들어야겠어."
"양 박사님, 민들레 차 드셔 보세요."

모자, 얼굴 가리개로 완전 무장한 채 몸을 움직이시던 양 박사님은 하던 일을 멈추고 캠핑 의자에 앉아 차 마실 태세를 완전히 갖춘 다음 한 모금 삼켰다.

"음~ 좋은데요. 민들레차 더 없어요?"

사실 민들레차는 남편이 직장에서 동료들과 나눠 마실 수 있도록 거의 다 주었다(관련기사 :
농막 이웃 언니가 알려준 민들레 뿌리의 비밀). 맛을 보려고 조금 남겨둔 것을 느루뜰에 가져 와서 나도 처음 맛보았다. 양 박사님과 언니가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더라면 따로 준비했을 텐데.

민들레차는 연하고 맑은 노란빛을 띤다. 맛이 은은하고 쌉싸름함이 입안에 감돈다. 향은 도라지와 닮은 듯하다. 민들레차 덕분에 점심 식사 후 티타임도 화기애애했다.

강낭콩 심고 고사리 끊으며

"3~5 센치미터 깊이로 하고, 포기 간격은 25~30 센치미터 정도로 해서 심으면 돼요."

농막 이웃 언니가 바로 심을 수 있도록 물에 불린 씨앗 강낭콩을 주었다. 덕분에 올해는 강낭콩도 길러 보게 되었다. 수확하면 밥에 넣어 먹는 재미도 경험할 수 있겠지. 기대된다.

3~5센치미터 깊이로 파종해야 하니 남편은 감자 만큼은 아니어도 밭 두렁을 제법 높게 만들었다. 남편이 적당한 간격으로 파종할 구멍을 만들면 나는 씨앗을 3개씩 넣었다. 씨앗을 심은 후 강낭콩 재배 방법에 대해 검색하며 주의점을 살펴 보았다. 공부하면서 키워야 헛수고가 덜한 법이니까.

강낭콩 키우기에서 주의할 점은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되었다. 파종 후 싹이 나올 때까지 겉흙이 마르지 않도록 충분히 물을 주어야 한다. 성장기에 접어 들면 강낭콩은 습한 것을 싫어하므로 겉흙이 바짝 말랐을 때 한 번에 듬뿍 물을 주는 것이 좋다고 한다. 꽃이 피고 꼬투리가 맺히기 시작할 때는 수분이 많이 필요하다. 물이 부족하면 꽃이 떨어지거나 꼬투리가 제대로 차지 않는다고 하니 염두 해서 키워 봐야겠다.
 농막 이웃 언니가 준 강낭콩을 심고 언니 밭 귀퉁이 고사리밭에서 고사리를 땄다. 사과나무에 진분홍 꽃봉오리가 맺혔다.
ⓒ 이정미
농막 이웃 언니네 밭 한 모퉁이는 고사리 밭이다. 자연산 고사리가 해마다 피고 진다. 벌써 고사리가 얼굴을 길게 내밀었다. 톡톡 끊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는 고사리 나물을 즐기지 않는 편이라 몇 번 먹을 만큼만 땄다. 말려서 보관했다가 고등어 조림에 넣으면 색다른 식감이 있어 건져 먹는 재미가 있었다. 고사리는 살짝 데쳐서 건조기에 말려 따로 보관하면 필요할 때 유용한 식재료가 된다.

복숭아꽃, 살구꽃, 배꽃, 모과꽃이 앞다투어 피는 사이 고요히 자신의 때를 기다리던 사과나무에 드디어 진분홍 꽃망울이 맺혔다. 색이 참 곱다. 다음 주말에 오면 꽃잎을 다소곳이 피우겠지.

"우리가 없어도 땅이 알아서 키우니 참 고맙다. "

땅이 허락하는 만큼, 그 만큼만 감사히 받겠다는 마음으로 대하니 주말 농사도 그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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