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슬픔도 외롭지 않은 세상을 기도한다
[하혁진]
얼마 전 바다와 외로움이 명물인 섬으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봄이 오기 전에 주어진 마지막 휴식이었기에 어떤 책을 챙겨 갈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출발 전날, 진작 챙긴 옷보다 많은 책을 꺼내 놓고 한동안 바라보다가 결국 두 권의 책을 챙겨 배낭에 넣었다. 선택의 기준은 두 개였다. 읽고 쓰는 사람으로서 제대로 읽어본 적 없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찝찝하게 느껴지는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여유가 주어지지 않으면 좀처럼 읽지 않을 책. 그렇게 고른 두 권의 책은 오스트리아의 청소년 문학 작가 아우구스테 레히너가 풀어 지은 <오디세이아>(문학과지성사, 2017)와 신학자 손호현이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을 둘러싼 담론과 논쟁을 모아서 정리한 <악의 이유들>(동연, 2023)이었다.
여행 기간 내내, 주로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성경을 대신해 들고 간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지혜로운 영웅 오디세우스가 신의 저주를 받아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지 못한 채 떠도는 이야기를 읽으며, 불완전한 인간이 그 불완전함 때문에 겪게 되는 숱한 고난과 역경에 대해 생각했다. 전지·전능·전선한 존재인 신과 악의 공존이라는 논리적 곤경을 다루는 이야기를 읽으며,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드는 부조리한 고통과 슬픔에 대해 생각했다. 동시에 신이 비정한 이유는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비극으로 점철시켜 그를 벌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벌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까지 고난과 역경에 빠뜨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신이 잔인한 이유는 욥의 믿음을 시련 속에 몰아 놓고 그를 시험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시험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까지 고통과 슬픔에 빠뜨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요컨대 여행 기간 내내, 주로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슬픔의 최소 조건으로서의 '두 번째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고난과 고통은 한 사람에게 닥칠 수 있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슬픔은 반드시 두 번째 사람을 필요로 한다. 슬픔은 관계의 산물이다. 인간은 누군가에 의해 슬퍼지고, 누군가를 위해 슬퍼한다. 그래서 슬픔은 발생할 뿐만 아니라 발명되기도 한다. 당신의 고통이 혼자 있지 않다고 말해주기 위해서, 당신의 고통이 나와의 관계 속에 있다고 말해주기 위해서, 인간은 슬픔을 발명한다. 한 사람에게 닥친 고난과 고통을 목격하고, 증언하고, 기억하고, 슬퍼함으로써 두 번째 사람이 된다. 모든 문학 작품의 뿌리가 된다고 말하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성경을 읽으며, 두 번째 사람이 되는 일에 관해서라면 문학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이 언제나 있어 왔고, 또 영원히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긴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백서른여섯 번째 304낭독회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304낭독회는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기 위해 작가들과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낭독회다. 그곳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두 번째 사람'들이 모여 슬픔의 안부를 묻는다. 나의 슬픔이, 당신의 슬픔이, 우리의 슬픔이 안녕한지 묻는다. 그곳에는 사람이 있고, 사람의 말이 있고, 사람의 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사람의 말을 듣는 사람이 있다. 고백하는 사람이 있고, 다짐하는 사람이 있고, 분노하는 사람이 있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가끔 그곳에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다. 어떤 슬픔도 없는 세상은 미덥지 않을뿐더러 그다지 바람직한 세상도 아닌 것 같아서, 어떤 슬픔도 외롭지 않은 세상을 기도한다. 그러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면 바다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곁에 있다. 여전히 사람의 말을 하고, 아직도 사람의 말을 듣는 사람들. 지금 이 순간에는 그곳에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당신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때 다시 당신과, 당신이 가진 슬픔의 안부를 물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당신의 슬픔은 무엇인가요. 외롭지 않게 묻고 답할 수 있으면 좋겠다. 2026년 2월의 어느 날인 오늘은 4월 16일이고, 당신을 만날 그날도 4월 16일일 것이다.
하혁진(문학평론가, 304낭독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4.16연대 소식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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