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공주입니다" 악뮤 이수현 말에 정지 버튼을 눌렀다
짧은 숏폼 콘텐츠가 대세인 시대에 느림에 주목합니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성공보다는 태도'를 보여주는 드라마나 예능에서 마음의 위로를 얻고 인생의 지혜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김지은의 그거 봤어?'에서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김지은 기자]
지난 4월 7일, 악뮤의 새 앨범<개화>가 나왔다. 유튜브에서 새 앨범<개화>의 타이틀곡인 '기쁨, 슬픔, 아름다운 마음'을 듣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쁨 뒤에 슬픔이 오는 건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보통은 그 반대 아닌가?' 가사에 집중해서 다시 들었다. 분명 '기쁨 뒤에 슬픔'이었다. 머리로는 다 이해하지 못했는데, 코끝이 시큰해지면서 눈물이 고였다.
악뮤의 노래 덕분인지 알고리즘은 관련 예능 숏츠들을 나에게 줄줄이 대령했다. 그래서 보게 된 프로그램이 바로 쿠팡플레이 <강호동네서점> 시즌1 5화 악뮤 편이다. <강호동네서점>은 서점 주인인 2천 살 된 '호크라테스(강호동 분)'가 유명인을 초대해서 인생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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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호동네서점> 악뮤편. 새 회사에서의 역할을 설명하는 수현 자신의 역할은 공주라고 설명하고 있다. |
| ⓒ 쿠팡플레이 강호동네서점 |
"공주의 역할은 공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웃음이 났다가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아 정지 버튼을 눌렀다. 딸이 어릴 때 내가 했던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저 아이는 그저 존재함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구나.'
그 사실이 무척이나 놀라웠었는데, 그런 생각을 잊고 산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존재만으로 사랑을 받던 시절을 지나왔다. 아쉬운 건 현실의 이런저런 일에 치어 망가졌다는 사실. 메모장 앱에 문장 몇 개를 적어놓고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강호동네서점>은 서점이라는 장소에 맞춰 자신의 인생 책을 소개해야 하는데, 악뮤는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가져왔다. 강호동은 2천 년을 산 설정답게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봤다고 했다. 수현이 오스카 와일드의 성격이 어땠냐고 물어보자, 강호동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와일드한 성격으로 명언을 좋아했다며, 그가 했던 명언 하나를 전했다.
"너 자신이 되어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차지되었다."
아이쿠. 또 정지 버튼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부러워 할 게 아니라, 그저 너 자신이 되라는 말.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에서 봤던 '최대한의 너'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내가 되고 싶은 인물은 어느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최대한의 나'다. 그 문구를 입안에서 작게 소리 내어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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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호동네서점> 악뮤편. '수현다움'에 대한 설명. 이찬혁은 '수현다움'은 모태 사랑스러움이라고 말했다. |
| ⓒ 쿠팡플레이 강호동네서점 |
나는 슬픔이 왔을 때, 넓은 천을 휙 펼쳐 슬픔이 없는 양 덮어버린다. 그러고는 슬픔을 못 본 척한다. 어떨 때는 반대로 슬픔의 웅덩이에 철퍼덕 주저앉아 스스로 연민에 빠지기도 한다. 슬픔을 제대로 마주한 적은 거의 없는데, 아, 그 슬픔까지 품는 것이 아름다운 마음이었다니.
유튜브에서 이 노래를 들을 때 그 아래 달린 댓글들을 한참 봤다. 명곡에는 칭찬이 아니라 사연이 달린다더니, 과연 그랬다. 기어이 네가 나와 우리를 살려낸다는 감탄, 우울증이라 죽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많았는데 살고 싶어졌다는 고백, 암 투병 중인데 힘을 내보겠다는 다짐, 어머니를 떠나보내어 힘든데 위로가 됐다는 감사까지. 슬픔은 빨리 흘려보내거나 피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그 슬픔에도 의미가 있다는 그의 통찰이 많은 사람을, 그리고 나까지 포근히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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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호동네서점> 악뮤편. 수현의 노래를 들은 후. '역시'라고 말하며 감탄하는 이찬혁. |
| ⓒ 쿠팡플레이 강호동네서점 |
역시, 역시라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칭찬은 '역시'다. 이 말은 현재의 순간뿐 아니라 과거부터 쌓아 온 모든 시간을 지지해주는 말이다. 내가 너를 쭉 봐왔는데, 너는 정말 칭찬받을 만하다고 하는 말. 너는 과거에 그랬듯 지금도 그렇고 미래도 그럴 거라는 믿음이 담긴 말. 역시는 상대방의 존재를 긍정하는 말 같다.
우리는 모두 존재만으로 반짝이게 태어났지만, 슬픔을 잘 품지 못해 오히려 그 속에서 비뚤어지고 굽어졌다. 원래의 나를 잃어버렸다. 그럴 때 다시 그 사람으로 돌아오게 해 주는 건 결국 옆에서 사랑해 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이다. 어쩌면 사람은 이렇게 혼자서 잘 살기가 어려운가.
나는 어떤 사람일까. 자신의 본질을 잃고 슬픔 안에서 굽어져 버린 사람을 다시 그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일까. 그 사람의 존재가 환하게 빛을 발할 때 '역시!' 하고 감탄하는 사람일까. 이 방송을 보고 나니, 무척이나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역시'라는 색색의 사탕을 잘 포장해서 마음속 유리병에 가득 채우고 나눠줄 타이밍을 잘 살펴야지. 누가 내 눈에 들어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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