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500조, 예금에서 투자로…기금형·디폴트옵션 ‘판 바꾼다’

임성영 2026. 4. 17.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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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연금 운용성과 2~3%…사실상 ‘퇴직금 보관 계좌’
“투자 안 하면 손해”…디폴트옵션 53조, ‘성과 잣대’ 첫 시험대
‘미래에셋’ 질주·‘키움’ 참전…퇴직연금 머니무브 전초전
기금형 도입, 증권사 vs 자산운용 vs 국민연금 ‘물밑경쟁’
퇴직연금, 자본시장 ‘마르지 않는 장기 자금’ 될까
최근 5년간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 추이.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퇴직연금 적립금이 500조원 수준까지 늘었지만, 가입자들은 여전히 불안하다. 적립금 규모는 매년 가파르게 불어났지만 장기 수익률은 2%대에 머물러 물가상승률을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서다.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저성과 상품에 대한 퇴출 기조를 확립하고, 기금형 제도 도입을 본격화하고 있다. 정책 당국은 ‘안정’이라는 이름 아래 예금에 머물렀던 연금 자산이 이제 ‘수익’을 찾아 점진적으로 이동할 때라고 보고 있다.

16일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에 따르면 2025년 말 기준 확정급여형(DB)·확정기여형(DC)·개인형 퇴직연금(IRP)을 모두 포함한 퇴직연금 적립금은 496조8021억원 규모에 달한다. 제도 도입 이후 꾸준히 증가해 외형이 빠르게 커졌다.

국내 연금체계.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퇴직연금 운용성과 2~3%…사실상 ‘퇴직금 보관 계좌’

하지만 운용 성과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원리금보장형 상품 비중이 70%를 웃도는 구조 속에서 장기 수익률은 2~3% 수준에 머물고 있다. 자산의 대부분이 예금과 비슷한 상품에 묶여 있어 사실상 연금이라기보다 ‘퇴직금 보관 계좌’에 가깝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가 퇴직연금 수익률 제고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명확하다. 저출산·고령화로 국민연금 재정 고갈 시점이 앞당겨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국가가 아닌 국민 스스로 노후 자금을 준비해야 하는 필요성이 커졌다. 이 가운데 쥐꼬리 수익률에 머물고 있는 퇴직연금이 사실상 구조적 리스크로 부상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간 퇴직연금은 방치돼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다수 가입자가 원금 손실을 꺼리는 투자 성향을 보이면서 자산의 70% 이상을 연 2~3% 수준의 시중은행 예금에 넣어뒀다. 최근 몇 년 간의 물가상승률(2.1%)을 고려하면 실질 수익률은 마이너스에 가깝다는 평가다. 원금 보장이라는 ‘심리적 위안’이 장기적으로는 ‘노후 빈곤’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정부는 비효율의 늪에서 자금을 끌어내기 위해 △디폴트옵션(사정지정운영제도)과 △기금형 제도라는 강제 장치를 도입했다. ‘가만히 두면 손해’라는 신호를 시장에 지속적으로 보내 원금 보장 중심의 예금 시장을 운용 중심의 투자 시장으로 체질 개선하겠다는 의도다.


“투자 안 하면 손해”…디폴트옵션 53조, ‘성과 잣대’ 첫 시험대

시장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디폴트옵션 운용 적립금은 53조3318억원으로 전년보다 32.9% 늘었고, 지정 가입자는 734만명으로 16.3% 증가했다. 시행 2년 반 만에 50조원을 넘긴 셈이다.

다만 자금의 85%(45조5000억원)가 여전히 초저위험형에 쏠리면서 지난해 말 기준 정부 승인을 받은 41개 금융기관의 319개 디폴트옵션 상품의 연간 수익률은 3.7%에 그쳤다. 전년 4.1% 대비 0.4%포인트 감소했다. 

이에 고용노동부는 “수익률이 미흡한 상품에 대해 가입 중지·퇴출 등 불이익을 주겠다”고 공식화했다. 디폴트옵션 승인 상품에 대한 성과 평가를 도입해 수익률·안정성·장기투자 적합성을 종합 점검한 뒤 성과평가 결과가 미달인 상품에 대해서는 시장에서 정리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기로 했다. 연금 사업이 ‘성과 잣대’ 위에 오르기 시작한 셈이다.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증권사 퇴직연금 적립금액.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미래에셋’ 질주·‘키움’ 참전…퇴직연금 머니무브 전초전

수익률 중심으로 경쟁 구도가 바뀌면서 시장 판도도 변화하고 있다. 현재 퇴직연금 시장은 삼성생명(약 54조원), 신한은행(약 53조원), 국민·하나은행(각 약 48조원) 등 전통의 은행·보험권이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수익률 중심의 경쟁이 가속되면서 증권업계의 성장세가 매섭다.

홍원구 자본시장 연구원은 “업권별로 2011년 이후 증권사의 비중이 꾸준히 높아져 생명보험사를 넘어서기 시작했다”면서 “퇴직연금 시장에서 증권사의 비중 증가는 실적배당형 상품의 증가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 미래에셋증권은 지난해 퇴직연금 적립금을 30% 이상 늘리며 전체 5위권에 안착했다. 특히 근로자가 직접 운용하는 확정기여형(DC)에서는 적립금 16조3000억원(2025년 말 기준)으로 전 업권 1위를 기록하며 사상 처음으로 은행권을 제치고 DC형 1위를 차지했다. 삼성증권과 한국투자증권 역시 각각 21조원, 20조원 가량의 자산을 운용하며 2위 경쟁이 치열하다.

IRP 시장에서는 증권사의 존재감이 더 뚜렷하다. 미래에셋증권은 글로벌 자산배분 전략과 상장지수펀드(ETF) 중심 포트폴리오를 내세워 IRP·DC 부문 적립금을 1년 새 수조원 단위로 끌어올렸다. 삼성증권·한국투자증권도 TDF·ETF 등 자산배분형 상품을 앞세워 점유율을 키우고 있다. 디폴트옵션 확산 초기 국면에서 운용 역량으로 고객을 선점하면 퇴직연금 자금이 장기로 묶이는 특성상 향후 성장 동력은 증권사가 더 크다는 인식도 금융투자업계에서 나온다.

최근 키움증권도 퇴직연금 시장 참여를 공식 선언했다. 이달 초 퇴직연금 사업자 등록을 완료하고, 상반기 중 IRP를 시작으로 DC·DB까지 단계적으로 서비스를 열겠다는 계획이다. 온라인 채널과 저비용 수수료, 영웅문 플랫폼을 앞세워 디지털 연금 콘셉트로 차별화를 노리며 중장기적으로는 퇴직연금 ‘빅5’ 진입을 노리겠다는 포부다. IRP 시장에서 이미 수수료·온라인 채널 경쟁이 치열한 만큼, 키움까지 가세한 증권사 간 연금머니 쟁탈전은 한층 과열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기금형 도입…업권 간 ‘셈법’ 복잡

다만 기금형 제도가 본격 도입되면 업권별 이해득실은 엇갈릴 수 있다. 기금형 방식은 여러 사업장의 퇴직연금을 하나의 기금으로 모아 전문기관이 운용하는 방식으로, 정부는 연내 관련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방침이다. 은행, 증권 등 전문 금융기관이 자산을 통합 운용하는 구조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운용 구조다. 기금형이 자리 잡으려면 외부위탁운용관리(OCIO)를 통한 총괄 운용이 가능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그러나 현행 제도에서는 증권사가 퇴직연금 자산 전체를 총괄 운용하는 데 제약이 따른다. 일임이 제한되는 구조에서는 증권사가 단순 판매자나 자문자 역할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김중원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현행 법적 제한이 유지된다면 기금형 체계 안에서 증권사가 상대적으로 주변부 역할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며 “실질적인 성과를 위해선 수탁자 요건 조정 등 법령 정비가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증권사들이 로보어드바이저(RA)를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도 현행 일임 규제 아래에서 기금형 구조를 보완하면서 장기 운용 역량을 쌓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설명이다. RA는 알고리즘을 통해 장기 투자 전략을 내재화하고 개인 투자자별 위험 성향에 맞춘 포트폴리오 구성이 가능해 현행 법 체계 안에서도 일정 부분 일임 제한 문제를 우회·보완할 수 있다는 평가다.

반면 직접 핸들링이 가능한 자산운용사와 일부 은행, 그리고 국민연금에는 기회가 열리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기금형 도입과 함께 OCIO·수탁 시장이 커질수록 운용을 맡을 수 있는 플레이어를 둘러싼 물밑 경쟁은 한층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황성엽 금융투자협회 회장은 “최근 국민연금 수익률 문제와 맞물려 기금형 퇴직연금 논의 과정에서 국민연금의 참여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한다”면서 “공적 연금과 사적 연금은 방향성이 다르고 내포된 문제도 달라 국민연금이 들어올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민간 금융투자사가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퇴직연금, 자본시장 ‘마르지 않는 장기 자금’ 될까

자본시장연구원의 2024년 분석에 따르면 당시 400조원에 달하는 퇴직연금 적립금에서 주식 비중은 4.4%에 그쳤다. 그중에서도 국내 주식 비중만 따지면 1.6% 미만, 금액으로는 6조3000억원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됐다. 연금자산이 보수적으로 운용돼 온 탓에 지금까지는 퇴직연금의 성장과 국내 자본시장 발전이 충분히 연결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대변화를 단순한 상품 이동이 아닌 ‘자본시장 체질 개선’으로 규정한다. 예금에 잠자던 500조원이 투자 자금으로 전환될 경우, 국내 증시에는 잠재적으로 수십조원대의 ‘마르지 않는 장기 자금’이 유입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퇴직연금 개편은 500조원 자산의 성격을 바꾸는 일대 사건”이라며 “투자 중심의 시장 재편은 증권·운용업계에 구조적 기회를 주는 동시에, 수익률을 내지 못하는 플레이어가 퇴출당하는 ‘양극화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임성영 기자 rssy0202@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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