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민엽의 괴짜열전] 동족포식과 다름없는 야만, 사라졌다고 할 수 있나

2026. 4. 17.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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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소설 ‘광인일기’에서 비판한 식인 문화


성민엽 문학평론가
‘괴(怪)’라는 한자 명사 어근과 ‘짜’라는 접미사가 결합된 단어 ‘괴짜’를 국어사전은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짜’는 ‘자(者)’에서 유래한 말이므로 ‘괴짜’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괴이한 자’가 되겠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기준이 뭐냐입니다. ‘정상적인 것’과 크게 혹은 많이 다른 것이 ‘괴이한 것’이니 정상적인 것이 뭐냐에 따라 괴이도 그 내용이 달라지며, 그 의미가 부정적인 것만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 봉건 중국 비판한 1918년 단편소설
현대 배경 희곡으로 각색 이달 공연

30년 혼미 상태에서 깨어난 주인공
망상에 사로잡혀 식인 실태 폭로

식인은 용납할 수 없는 현대사회
장기밀매·태반주사는 무엇인가

중국 잡지 ‘신청년’에 발표된 ‘광인일기’의 첫 페이지. [사진 성민엽]

제가 괴짜라는 말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 계기는 연극 ‘광인일기’의 공연 소식입니다. 이 연극의 원작 소설은 중국현대소설의 시작이라고 알려진 작가 루쉰의 1918년작 ‘광인일기’이고, 이 단편소설을 중국의 극작가 좡쟈윈(莊稼昀)이 각색한 희곡 ‘광인일기’를 한국의 극단 공놀이클럽이 이달 24일부터 다음 달 3일까지 서울의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공연합니다. 공놀이클럽은 지난해 명동예술극장에서 이 희곡을 낭독 공연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연극 공연입니다.

1903년 동경 유학 시절의 루쉰. [사진 성민엽]

광인의 시선으로 세상 허위 폭로
이 공연 소식을 접하면서 광인을 괴짜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현실적으로는 광인을 괴짜라고 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문학과 예술에서는 광인이 대표적인 괴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문학이나 예술에서는 광인의 시선을 빌려 세상의 허위와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상적인 것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은 허위와 모순으로 가득하다는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는 데에는 괴이한 시각이 매우 효과적이고, 그중에서도 극단적인 것이 광인의 광기이기 때문입니다.

연극 ‘광인일기’는 시대 배경을 원작의 근대 전환기에서 현재로 옮겨오고 원작의 식인(食人) 모티프를 경쟁과 혐오로 바꾸어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비판적으로 조명합니다. “아주 오래 전 봉건 사회에나 있었을 법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야만성(식인)’이 오늘날에도 형태만 바뀐 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날카롭게 비판한다”라는 이 연극에 대한 소개는 매우 적절해 보입니다.

이달 24일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공연되는 연극 ‘광인일기’의 포스터. [사진 성민엽]

그런데 이 소개가 갑자기 원작 소설을 낯설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의문이 떠오릅니다. 원작 소설에서 식인이 무엇이었지? 또, 현실에서 식인이란 게 무엇이지?

루쉰의 단편소설 ‘광인일기’의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됩니다. 30여 년 만에 달빛을 보게 되고, 그러자 지난 30여년간 자신이 혼미 상태에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광기 발생의 반어적 묘사입니다. 광인 자신은 광기 발생을 혼미 상태에서 깨어난 거라 여기는 거죠.

깨어난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사람들이 그를 흘낏흘낏 살피고 진료하러 온 의사는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가만히 며칠 요양하면 좋아질 겁니다”라고 말하는데, 살피는 건 잡아먹을 틈을 엿보는 거고 의사의 말은 요양해서 살이 찌면 잡아먹겠다는 뜻이라고 그는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그의 피해망상 증세로 인한 오해입니다.

그런데 유명한 옛 서적에 사람 고기를 먹는 이야기가 거듭 나오고 최근 처형된 정치범의 피를 받아 폐병약으로 먹는 장면에 이르게 되면서 그의 생각이 단순한 오해가 아닐 수도 있다는 반전이 시작됩니다. 여기서부터 식인은 사실인 경우도 있고, 사실이 아니더라도 봉건 사회의 비인간적이고 반인간적인 문화나 인간관계를 뜻하게 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당신들은 고칠 수 있어. 진심으로 고치라고! 앞으로는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된다는 걸 알아야지. 당신들이 고치지 않으면, 자기 자신도 다 잡아먹힐 거야. 아무리 많이 낳아도 진짜 사람들에게 멸망 당할 거야. 사냥꾼이 이리를 모조리 잡아 죽이는 것처럼 말야!”

하지만 그 외침의 결과로 그는 방에 갇히고, 갇힌 그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습니다. 누이동생이 다섯 살 어린 나이로 죽었던 때가 생각난 것입니다. 형이 누이동생을 잡아먹은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한없이 울자 형은 어머니에게 울지 마시라고 했는데, 자기가 잡아먹어서, 자꾸 울면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리고서 그는 드디어 마지막 비밀을 깨닫습니다. 형이 집안일을 보고 있을 때 누이동생이 죽었으니 음식에 섞어 몰래 그에게 먹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도 누이동생의 고기를 몇 점 먹었는지 모르는 건데, 이제는 그의 차례가 된 것입니다. 마지막 비밀을 알게 된 그의 광기가 더욱 심해지고 “사람을 먹은 적이 없는 아이들이 혹시 아직 있을까? 아이들을 구하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그가 쓰던 일기도 중단되어 버리면서 소설은 끝납니다.

지난해 연극 ‘광인일기’의 낭독 공연 장면. [사진 성민엽]

소설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
이 소설에는 후일담이 붙습니다. 후일담이 서문 형식으로 먼저 제시되는 게 독특한데, 일기를 쓴 주인공이 병이 다 나아서 관리가 되어 부임하러 갔다는 내용입니다. 이 결말을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병이 나아 관리가 된 것은 봉건과의 타협이다, 타협이라는 결말과 아이들을 구하자는 결말의 동시적이고 상반되는 메시지들의 복잡한 작용이 중요하다, 두 결말의 차이는 신구문화와 신구도덕의 갈등과 투쟁이라는 본질을 반영한다, 병이 나아 관리가 된 것은 광인의 저항 방식이 갖는 한계에 대한 반성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병이 나은 것이 아니라 나은 척한 것일 수도 있다 등등.

저 자신은 이 소설에 두 가지 의미 맥락이 중첩되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봉건 사회의 식인문화에 대한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식인문화에 대한 저항 방식에 대한 반성입니다. 그 중첩 속에서 광인이라는 캐릭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또 최근에 새롭게 드는 생각은 서문 형식으로 붙은 후일담이 꼭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 후일담 없이 광인이 쓴 일기만을 제시해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아니, 이편이 오히려 더 해석의 다양성과 깊이를 가능하게 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루쉰의 고향인 중국 저장성 사오싱에 있는 조형물. [사진 성민엽]

그리고 또 하나 드는 생각은 식인이라는 것에 대한 의문입니다. 중국어로는 ‘츠런(吃人)’이라고 하는 이 식인의 문화를 루쉰은 봉건적인 것의 핵심으로 내세웠지만 과연 이것이 봉건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일까요? 봉건을 벗어나 근대로 전환한 뒤, 근대도 이제 그냥 모던이 아니라 포스트모던이 한창 펼쳐지고 있는 오늘날에, 이전보다 더 두려운 방식의 식인이 이전보다 더 지독하게 자행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비유적 의미의 식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실제적 의미에서도.

루쉰의 광인은 역아가 자기 아들을 삶아 걸주에게 먹인 일, 흉년에 사람을 잡아먹은 일, 처형된 정치범의 피를 폐병약으로 먹는 일, 부모가 병에 걸리면 자식 된 자는 자기 살을 한 점 베어내어 그것을 삶아 부모님께 잡숫게 해야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 등을 예로 들었는데, 오늘날에는 장기밀매와 관련하여 발생하는 온갖 반인간적 행태들부터 소소하게는 태반주사 같은 것에 이르기까지 더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심지어는 인육을 먹는 비밀결사에 대한 흉흉한 소문까지 있다고 합니다.

동족포식하는 동물 1500종
시야를 넓혀 보면 식인이라는 것은 생물학적 동족포식(카니발리즘) 중에서 인간의 동족포식에 해당됩니다. 동일한 종의 개체가 서로를 잡아먹는 동족포식 행동은 동물 생태계에서 굶주림, 스트레스, 개체 수 조절 등의 이유로 흔히 발생한다고 합니다. 1500종 이상의 동물에게서 나타난다고 하는군요.

인간의 동족포식은 극심한 기근이나 조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발생하기도 했고, 적에 대한 증오나 적의 힘을 흡수한다는 믿음, 혹은 사후 세계에 대한 종교적 의식으로 행해지기도 했습니다. 15세기 아즈텍문명의 인신공양 풍속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습니다. 조난 상황의 대표적인 예로는 19세기 초 포경선 에식스호 선원들의 조난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아즈텍문명의 인신 공양 장면을 묘사한 그림. [사진 성민엽]

동족포식은 자연계에서는 생존을 위한 생태학적 현상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인간 사회에서는 가장 강력한 금기 중 하나입니다. 생존을 위해 동족포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도록 하는 인간 사회의 능력이 그 금기의 전제입니다.

‘광인일기’를 쓰던 당시 루쉰은 봉건적 식인문화의 극복을 과제로 삼고 근대문화에 기대를 걸었지만 그 기대의 실현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근대를 지나 포스트모던에 이른 지금의 우리 역시 또 다른 식인문화 속에서 여전히 혼미 상태에 있는 것 아닐까요?

성민엽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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