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돈, 행운이 되다


지난 9일 서울 마포구 그레이프랩 사무실. 주로 장애인들이 모여 폐지 등으로 다양한 상품을 만드는 친환경 기업인 이곳에 이효건(46) 한국조폐공사 차장이 들어섰다. 그는 돌돌 말린 종이를 한아름 안고 있었다. 종이에는 얇은 연두색, 황색 무늬가 박혀 있었다. 화폐 제조 과정에서 규격에 맞지 않거나 잘못 인쇄된 1만원·5만원권 지폐를 활용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차장이 도착하자 일사분란하게 작업이 시작됐다. 이 종이로 노트북 거치대를 제작하는 과정이다. 보통 노트북 무게는 1.5㎏ 가량이다. 종이로 이 무게를 지탱하려면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화폐로 만든 종이를 앞에 두고 이 차장은 한참을 씨름했다. 우선 펼쳐진 종이의 밑 부분을 10㎝ 길이로 접는다. 위 아래를 바꾸고 접고 또 접었다. 10분 정도 씨름하자 종이가 마치 부채처럼 변했다. 그레이프랩 소속 디자이너가 이 종이에 일월오봉도를 그려넣고 특수 공정을 거쳐 노트북 거치대가 완성된다. 이 차장은 “직접 만든 건 처음인데 은근 소질이 있는 것 같다”며 웃었다.
이 차장이 손에 쥐고 있던 종이는 원래라면 폐기됐을 ‘화폐 부산물’이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규격을 벗어난 지폐가 잘리고, 찢기고, 버려진다. 하지만 누군가의 손을 거치면 그 조각은 더 이상 폐기물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에게 건네는 선물과 응원이 된다. 조폐공사는 이렇게 버려지던 화폐 부산물에 새 역할을 입히는 화폐굿즈 사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이 차장은 그 과정에서 버려질 뻔한 돈이 다시 사람들의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연결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이 차장은 조폐공사에서 화폐굿즈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화폐굿즈는 공사의 새로운 먹거리다. 공사 매출은 해마다 줄어드는 추세였다. 지폐나 동전 대신 카드나 페이를 쓰는 인구가 늘고 있어서다. 실제 공사 매출은 2021년 5506억원에서 2023년 4447억원으로 감소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공사 매출은 갑자기 6395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3월부터 본격 시작한 화폐굿즈 사업 덕분이다.

화폐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은 연간 100t에 달한다. 기존에는 부산물을 대부분 소각했는데, 상당한 인력과 비용이 투입됐다. 공사의 회생 방안을 고민하던 성창훈 조폐공사 사장은 이 부산물에 주목했다. ‘부자되세요’라는 덕담이 유행할 만큼 ‘부(富)’에 대한 선호가 강한 한국인의 심리를 활용해 화폐 부산물을 첨가한 제품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돈만 찍어내던 제조기업을 탈피해 버려지는 돈으로 국민의 일상에 스며드는 문화를 창조하는 기관으로 거듭나자는 취지였다. 지난해 3월 관련 부서가 만들어졌고, 이 차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합류했다. 브랜드 이름은 머니메이드(money made)로 정했다. ‘돈으로 만든 굿즈’라는 뜻이다.
처음부터 수월한 일은 아니었다. 화폐굿즈는 공사 단독 사업이 아니다. 협업 프로젝트다. 공사가 화폐 부산물을 가공한 종이를 공급하지만 실제 아이디어 제안과 제작은 그레이프랩과 같은 일반 기업이 담당한다. 머니랩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디자이너나 중소기업, 스타트업 등이 아이디어를 내면 공사가 심사를 통해 선정한다. 이후 공사가 상품을 직접 구입해 판매하고, 마케팅과 홍보도 병행하는 구조다.
이 차장의 주된 업무는 파트너 기업을 선정·관리하는 것이다. 최종 파트너로 뽑힌 기업이나 디자이너는 대부분 서울에 있다. 그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의견도 수렴하려면 서울에 상주할 수밖에 없다. 공사 본사가 위치한 대전에 살던 이 차장이 가족을 두고 서울로 넘어온 이유다.
9일 화폐 부산물 종이로 노트북 거치대를 직접 만들었던 이 차장은 곧바로 마포에 위치한 다른 작업장으로 이동했다. 한 지방자치단체가 의뢰한 캐릭터 상품 제작을 업체에 의뢰하기 위해서다. 캐릭터 모양 키링안에 황색의 5만원권 부산물이 들어가 있는 디자인이었다. 이 차장은 “매일매일 바쁘게 미팅을 하지만 돈으로 만든 굿즈를 좋아해주시는 고객과 국민을 생각하면 힘이 난다”고 말했다.



지난 7일 오전 10시. 공사가 출시한 돈명태 마그넷 4차 예약 판매는 시작과 동시에 종료됐다. 상품이 다 팔렸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명태는 또렷한 눈으로 집을 지키고, 크게 벌린 입으로 좋은 일을 맞이하는 상징 같은 생선이었다. 선조들은 명태를 집안에 걸어두고 가정의 평안을 기원했다.
공사는 이런 전통적 상징을 차용해 돈명태 상품을 기획했다. 명태 모양 마그넷 안에 5만원권 부산물을 담은 모습이다. 제품 가격은 개당 2만9700원으로 저렴하진 않았다. 그런데도 주문이 폭주했다. 온라인 대기자만 10만명에 달할 정도로 유례없는 인기였다. 전통적인 ‘복’의 상징을 재치 있게 재해석한 점이 젊은 소비자들의 취향과 맞아떨어지면서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입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공사는 지금까지 총 7종, 23개의 화폐굿즈를 출시했다. 모든 제품이 대박을 쳤다. 돈 볼펜과 돈 키링, 돈 달력에 이어 돈 방석에 이르기까지 인기가 쇄도했다. 돈 방석에는 솜과 함께 약 500만원에 상당하는 양(약 100g)의 5만원권 화폐 부스러기가 들어있다. 나일론 소재인 겉면에는 500원 이미지를 담았다. 지난해 7월 공개된 황금볼펜은 크라우드 펀딩에서 목표액의 987%를 달성했다. 돈 방석은 무려 1만%를 훌쩍 넘기는 기록을 세웠다.
이 차장은 화폐굿즈를 둘러싼 관심의 배경으로 한국인 특유의 기복(祈福) 문화와 펀슈머(Fun+Consumer) 트렌드를 꼽았다. 예로부터 우리는 지갑을 선물할 때 새 지폐를 넣어 복을 기원했다. 또 베개 밑에 돈을 넣으면 행운이 깃든다고 믿었다. 조폐공사 굿즈는 이런 전통적인 상징을 현대적인 디자인과 위트로 풀어냈다. 소중한 사람에게 돈 많이 버시라는 응원과 위로가 되는 셈이다. 특히 ‘돈’이라는 직관적인 상징성과 인증하고 공유하기 좋은 재미 요소가 맞물리면서 젊은 세대의 관심도 뜨겁다. 공사는 지난해 16억원 수준이던 화폐굿즈 매출이 올해 50억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최근 이 차장에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화폐굿즈를 일회성 유행 상품에 그치지 않게 만드는 일이다. 화폐 부산물을 활용한 굿즈를 단순한 ‘돈 상품’이 아니라 한국적인 상징과 이야기를 담은 문화 콘텐츠로 키우는 데 밑거름을 놓고 싶다는 뜻이다.
이 차장은 “처음에는 신기해서 찾으셨다면, 앞으로는 조폐공사 굿즈라서 믿고 사고 기다려주시는 브랜드가 됐으면 좋겠다”며 “화폐가 단순한 결제 수단을 넘어 사람들에게 작은 행운과 위로, 재미를 전하는 매개체가 되도록 더 다양한 상품을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박세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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