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참상에 대한 기억이 전쟁 막는 가장 강력한 방파제”

이강민,김지훈,김판 2026. 4. 16.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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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문턱이 낮아졌다]
<5·끝> 희미해진 전쟁의 기억
일본의 피폭자 단체 및 평화 단체들은 한목소리로 ‘전쟁의 기억’을 계승해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사진은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원폭 돔’을 지켜보는 어린이들의 모습. 원폭 돔은 1945년 피폭 당시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국민일보DB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도시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 도시는 폐허가 됐고 수십 만명의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 후유증은 대를 이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세계 유일의 핵무기 공격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국제사회에서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는 호소다.

국민일보는 희미해져 가는 전쟁의 기억을 기록하기 위해 세계 유일의 피폭국인 일본의 피폭자 단체 및 평화 단체 5곳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들은 “전쟁에 대한 기억은 전쟁을 막는 최후의 방파제”라며 “전쟁의 기억을 계승하고 유지하기 위해 국제적 연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흐려지는 전쟁 기억

1967년 출범해 전 세계에서 피폭과 관련한 증언을 이어가고 있는 히로시마평화문화센터의 가가와 다케히로 이사장은 지난 8일 화상 인터뷰에서 “현재 국제적으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무력충돌과 전쟁의 배경 중 하나가 대규모 전쟁에 대한 기억의 침식과 풍화”라며 “선명한 전쟁의 기억이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전쟁의 기억이 침식하는 가장 큰 원인은 사람들의 무지와 전쟁을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무관심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중동 전쟁의 경우에도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젊은 세대일수록 과거로부터 전쟁을 배우고 그 위에서 평화와 안정의 모습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가와 이사장은 “지금 벌어지는 전쟁은 2차 대전의 반성 위에서 만들어진 전후 시스템 자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며 “유엔헌장과 법의 지배를 무시하는 분쟁이 늘어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4년 설립된 나가사키평화추진협회의 나카가와 마사요시 사무국장도 3일 화상 인터뷰에서 “전쟁을 직접 체험한 세대는 전쟁을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지만 지금은 전쟁도, 원폭의 참상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며 “원자폭탄을 ‘조금 큰 폭탄’ 정도로 취급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그는 또 “나가사키가 마지막 피폭지로 남아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하면서 “평화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피폭자들이 고령화되면서 생존자들의 증언도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 니혼히단쿄(일본 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의 다나카 데루미 대표는 “점점 직접 증언을 듣는 게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에 남겨진 기록을 활용해 연구하고 다음 세대가 계속 활동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카가와 국장도 “생존 피폭자들은 ‘이제 다음 세대의 시대”라는 마음으로 증언을 이어오고 있다”며 “전쟁의 기억에 대한 계승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나가사키평화추진협회에는 약 25명의 피폭자가 생존해 활동하고 있다.

일본의 다른 평화 단체들도 한목소리로 전쟁의 기억을 계승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상에 대한 기억만이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최후 수단이라는 것이다. 일본 기반의 국제 비정부기구(NGO) 피스보트는 서면을 통해 “전쟁의 기억 계승은 전쟁을 억제하는 가장 강력한 방파제”라며 “전쟁의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 가해와 피해 쌍방의 기억을 계승하는 것이 필요하고, 국제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지혜를 맞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대표적 반핵·평화운동 단체인 원수폭금지일본국민회의(원수금)도 “전쟁을 체험한 사람이 줄고 있는 것은 전쟁 리스크를 높인다”며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전쟁의 기억 계승이 중요한 때”라고 말했다.

‘힘의 시대’ 막기 위한 글로벌 연대

‘힘의 시대’로의 회귀를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호소는 아시아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시가 주도하고 166개 국가 약 8600개 도시가 참여하는 세계 평화 정부 네트워크인 평화시장회의도 지난달 16일 최근 전쟁 상황을 규탄하는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곳곳의 무력 충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동 전쟁 등 새로운 전쟁이 생겨나는 등 오늘날 세계 안보 상황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며 “유엔헌장을 포함한 법의 지배가 무시되면 무력 충돌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아시아 각국 진보 성향 학자들로 구성된 ‘국경을 넘어선 지식인 연대’도 지난달 17일 국제 질서에 대한 우려를 담은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에는 국내외 지식인 167명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하에서 노골화되는 무력 개입 위협과 강압적 외교 행태는 개별 국가의 정치적 위기를 넘어 국제법의 존속 여부와 근대국가 주권 질서의 미래를 가르는 중대한 분기점을 형성하고 있다”며 “유엔헌장의 무력 사용 금지 원칙이 무너진다면 국제 질서는 ‘힘이 곧 정의’가 되는 전근대적 상태로 퇴행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공동성명을 주도한 이기호 한신대 평화공공성센터장은 “미국이 주권 침해에 해당하는 무력 행사를 하는데 별다른 얘기가 나오지 않았고 제국주의가 등장하는 상황에 문제의식도 갖고 있었다”며 “국경을 초월해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내자는 취지로 성명을 내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시아는 다양성을 갖고 있고 약자의 경험도 해봤기 때문에 약자의 시선을 갖고 있다”며 “아시아 지식인 연대를 통해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아시아적 가치’를 강조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슈탐사팀=이강민 김지훈 김판 기자 rive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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