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가 고발하는 미국의 위선과 외교정책의 민낯

김봉중 2026. 4. 16.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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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를 위한 제1보] 불편하지만 필요한 질문 <미국은 어떻게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가>

100세를 앞둔 노학자 노엄 촘스키가 새 책을 냈다. 그의 마지막 저작이 될 가능성이 크다. 젊은 좌파 지식인 네이선 로빈슨과 공저한 이 책의 제목은 <미국은 어떻게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가>로 영어 원제는 '미국 이상주의의 신화'(The Myth of American Idealism)다. 서평을 쓴 김봉중 교수는 지금의 미국을 꿰뚫듯 이해할 수 있는 책이며 흔들리는 세계 질서 속 '선진 한국'이 중심을 잡기 위해 꼭 봐야 하는 지적 도전이라 전한다. <편집자말>

[김봉중]

 2012년 10월 20일(현지시간) 노엄 촘스키가 팔레스타인 가자시티 항구에서 가자지구로 향하는 원조 선단 지지 기자회견에 참석해 있다.
ⓒ AP 연합뉴스
노엄 촘스키의 미국 내 명성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이 확산하던 시기에 정점을 이루었다. 그의 에세이 <지식인의 책임>(1967)은 지식인의 도덕적 책임을 강하게 제기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는 반전 운동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떠올랐다. 이 때문에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적대자 명단'에도 이름이 올랐다.

그러나 이어지는 로널드 레이건 시기에도 보수주의가 강화되면서 그는 주류 언론에서 점차 멀어졌고, 영향력은 주로 비판적 지식인 사회와 좌파 진영에서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촘스키는 미국 권력 구조와 제국주의를 꾸준히 비판한 지식인으로서, 여전히 존경과 논쟁을 동시에 부르는 인물로 남아 있다.

<미국은 어떻게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가>에서 노엄 촘스키와 네이선 로빈슨은 미국 외교정책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는 '위선'이다. 영어 제목이 암시하듯, 미국은 자신을 민주주의·인권·자유의 수호자로 규정하며 오랫동안 그러한 이상주의의 이미지를 세계에 확산시켜 왔다.

그러나 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 화려한 신화의 이면에는 권력과 이해관계가 얽힌 냉혹한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이 책은 그 신화의 껍데기를 하나씩 벗겨내며 미국 외교정책의 민낯을 드러내고,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권력 정치와 경제적 이해관계를 거침없이 고발한다.

우선 책 초반에 오사마 빈 라덴이 발표한 '미국에 보내는 편지'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저자들의 의도를 쉽게 알 수 있다. 빈 라덴은 '미국이 스스로는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할 권리를 주장하면서 다른 국가들의 권리는 부정하고, 국제법을 선택적으로 적용하며, 특히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억압과 폭력을 사실상 지원해 왔다'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저자들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인도적 상황과 미국 정책 사이의 모순을 지적한다. 그 과정에서 빈 라덴이 던진 질문을 인용하며 미국의 위선을 부각한다.

"자유를 부르짖는 자들아, 너희는 얼마나 많은 억압과 폭정, 불의를 저질렀는가?"(p.132).

놀라운 인용이다. 빈 라덴이 누구인가. 미국인들이 9·11 테러의 배후로 지목한 말 그대로 미국의 원수와도 같은 인물이 아닌가. 그런데도 저자들은 미국의 적이 보낸 편지를 인용해 그의 메시지를 그대로 전달하려 한다. 자칫하면 자신의 주장이 빈 라덴의 논리와 겹치며, 미국 사회에서 '선을 넘은 반미 좌파 급진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그럼에도 저자들은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미국이 내세워 온 '자유와 인권'의 이상과 실제 정책 사이의 모순을 적시하며 미국의 위선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소수 권력자만의 '만들어진 정의'

그가 벌거벗긴 미국의 위선은 책 곳곳에 빼곡히 채워지고, 그 비판은 날카롭다. 그들이 서술한 글에는 미국이 내세운 이상주의가 실은 패권 유지를 위한 가면임을 속속 드러난다. 미국의 수많은 전쟁과 쿠데타, 독재에 대한 지원은 '도덕적 실수가 아닌 의도된 폭력'이었다. 베트남, 이라크, 동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중동. 그 현장마다 '이상주의'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탐욕과 잔혹함이 있었다.

특히 책의 4장 '이라크: 세기의 범죄'는 2003년 이라크 침공이 '민주주의 수출'이나 '대량살상무기 제거'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진 '허울뿐인 전쟁'임을 낱낱이 폭로한다. 이라크 전쟁은 9·11 이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패권 전략이었다. 사실 미국의 석유와 중동 지배력 강화를 위한 군사력 과시라고도 할 수 있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을 한때 지원했지만, 갑자기 악당으로 몰아붙였다. 전쟁은 민간인 대량 학살과 인프라 파괴를 낳았다.

또한, 저자들은 미국 외교정책이 소수 엘리트의 이익에 의해 움직인다고 확신한다. 군산복합체, 대기업, 금융계, 지식인들이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좌지우지한다. 미디어는 침략을 '자위'나 '인도주의'로 포장하는 '제조된 동의'를 만든다. 반대 의견은 주변화된다. 이 구조가 미국 위선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2기(2025년)가 시작되기 전인 2024년에 출간됐다. 이란 전쟁 같은 최근 정책은 당연히 다뤄지지 않는다. 트럼프 1기만으로도 촘스키 특유의 날카로운 비판이 쏟아질 거라 예상했지만, 의외였다. 트럼프에 대한 논평 분량은 생각보다 적었다.

오히려 조 바이든 행정부에 대한 비판이 더 매서웠고, 그 이전의 빌 클린턴 행정부에 대해서도 신랄한 평가가 이어진다. 더 놀라운 점은 흔히 인권 외교의 상징으로 언급되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조차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한국까지 포함해 카터의 위선을 비판한다. 니카라과의 소모사 가문, 이란의 국왕, 필리핀의 마르코스, 칠레의 피노체트,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자이르의 모부투, 브라질 군부,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까지. 이것이 바로 이른바 '인권 외교'의 민낯이라는 것이다.

촘스키에게 민주당과 공화당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미국 패권을 유지하려는 정책 틀 안에서 나타나는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다. 어쩌면 미국의 위선을 드러내려는 그의 문제의식을 고려할 때, 공화당보다 민주당 정권의 모순을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더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진실과 선동 사이
 미국은 어떻게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가
ⓒ 메디치미디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훗날 사람들은 촘스키를 어떻게 평가할까. 진보 진영에서는 그를 권력에 맞서 진실을 말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기억할 것이다. 반면 보수 진영에서는 그를 반미적·반제국주의적 편향에 사로잡힌 위험한 선동가로 평가할 것이다. 결국 촘스키에 대한 평가는 이를 바라보는 사람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극단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위에서 말했듯 베트남 전쟁을 비판하며 '신좌파' 지식인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촘스키의 명성과 비견되게, 미국 정치는 여러 변화가 있었다. 1980년대 미국 정치의 흐름은 로널드 레이건 시대의 보수주의와 네오콘이 지배하게 되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에는 이러한 흐름이 더 강화될 것도 같았다.

그러나 빌 클린턴의 민주당 정권이 등장하면서 그 열기는 다소 식었다. 그것도 잠시, 조지 W. 부시 집권과 함께 발생한 9·11, 그리고 이어진 '테러와의 전쟁'과 이라크 전쟁은 네오콘 세력의 재부상을 가져왔다. 그 전쟁의 후유증 속에서 버락 오바마 정권이 등장했고, 이어 미국 정치에는 또 다른 거대한 충격이 찾아왔다. 바로 트럼프의 등장이다.

이처럼 격변하는 정치적 흐름 속에서도 미국의 현실 정치는 촘스키가 꿈꾸었던 방향과는 항상 거리가 멀었다. 진보와 보수가 번갈아 권력을 잡았지만, 미국 정치에 내재한 위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극좌와 극우는 서로를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강화한다. 극과 극은 상통한다. 극좌가 힘을 얻으면 극우도 강해지고, 그 반대도 같다. 촘스키의 미국 외교 비판이 논리적이고 증거가 풍부하더라도 보수 지식인에겐 자신들의 논리를 굳히는 촉매만 될 뿐이고, 이는 진보 진영도 마찬가지다. 양극화의 악순환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설득이 아니라 대립을 부추길 수 있다.

1980~90년대 미국 대학원·교수 생활 중, 나는 이 현실을 직접 체감했다. 보수 진영의 강력한 목소리였던 러시 림보의 라디오 쇼가 영향력을 키울수록 좌파 진영의 결집도 강해졌다. 촘스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우파는 더 단단히 뭉쳤다. 결국 좌우 대결엔 승자도 패자도 없다. 서로를 부정하며 동시에 강화하는, 긴장 속 공존이 이어질 뿐이었다.

해석의 다양성이 있음을 기억해야

<미국은 어떻게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가>에서 촘스키와 로빈슨은 자신들의 주장에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해 풍부한 자료와 인용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주장이 큰 설득력을 주지는 못했다. 같은 사건이라도 다른 자료를 가지고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외교 정책을 보면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도 여러 자료가 있고 해석의 여지가 넓다. 따라서 저자들이 미국의 위선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문서와 인용 역시, 어디까지나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선택한 자료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예컨대 우리나라와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건들만 보아도 그렇다. 히로시마 원폭,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 배경, 중국 공산화에 대한 미국의 대응, 베트남 전쟁, 그리고 지미 카터의 인권 외교와 같은 사례들만 보더라도, 각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과 자료가 얼마든지 존재한다.

카터의 인권 외교를 하나의 예로 들면, 그것이 철저히 미국의 이익만을 위한 위선적 정책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위 책의 저자들이 지적한 모순과 한계가 분명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보다 균형 잡힌 평가는 인권 외교의 진정성을 지니면서도 현실 정치 속에서 여러 타협을 해야 했던, '노력했으나 아쉬움이 많았던 정책'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촘스키의 오바마 외교 비판, 즉 '오바마의 외교 정책은 공화당 보수 정권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라는 주장은 다소 과장된 면이 있다. 오바마는 강한 친이스라엘 압력 속에서도 이란과의 군사 충돌을 피하고 협상을 택했다. 이는 중동 정세와 호르무즈 해협의 잠재적 파장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트럼프의 이란 전쟁을 목도한 지금, 오바마의 고뇌와 지혜가 더 두드러진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서로 다른 지적 노선을 낳는다는 사실은 미국 유대인 지식인 사회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홀로코스트이다. 촘스키와 같은 좌파 성향의 유대인 지식인들은 이 사건의 역사적 교훈을 바탕으로, 이스라엘과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치 세력이 또 다른 형태의 억압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한다. 오늘날 미국 정치에서 이러한 입장을 대표하는 유대인 정치인으로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들 수 있다.

반면, 보수 성향의 유대인 지식인들이 보는 홀로코스트의 기억은 다르다. 이들은 전체주의적 위협의 조짐을 보일 경우 이를 강력하게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빙 크리스톨, 노먼 포드호레츠, 폴 월포위츠와 같은 인물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네오콘 진영의 핵심 사상가들이다. 이들에게 유럽의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의 역사적 기억은 전체주의 정권에 대한 강한 경계와 적극적 개입주의 외교를 정당화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처럼 미국 유대인 지식인 사회는 하나의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면서도, 그 기억을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진보와 보수가 공존하는 매우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한국인이 살핀 한계와 역할
 1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창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오벌 오피스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는 기자들의 모습이 비치고 있다.
ⓒ 로이터 연합뉴스
그렇다면 우리는 촘스키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각자의 정치적 성향과 경험에 따라 평가가 크게 갈리게 될 것이다. 특히 민족적·애국적 관점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촘스키의 시각은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과 관련된 몇 가지 사례만 보아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촘스키는 한국전쟁을 단순히 '공산 침략에 맞선 자유 진영의 방어전'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의 관점에서 이 전쟁은 한반도의 내전적 성격과 냉전 강대국들의 전략적 이해가 결합하며 국제전으로 확대된 사건이며, 그 과정에서 미국 역시 일정한 책임을 지고 있다고 본다. 또한 그는 제주 4.3과 같은 사건에서 드러난 미군과 한국 정부의 폭력에 주목하면서, 북한이나 중국의 폭력과 책임에는 눈길을 돌렸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전쟁 범죄를 상대적으로 덜 다루었다는 지적 역시 같은 맥락에서 제기된다. 따라서 난징 학살이나 만주 일본군의 생체 실험,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같은 일본 군국주의의 범죄는 다루지 않으며, 오직 히로시마 원폭에 대한 미국의 도덕적 책임만을 강조할 뿐이다.

이런 지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미국 외교정책의 진실을 직시하려는 이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미국 이상주의 신화의 가면 뒤에 숨겨진 현실과 위험을 명명백백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드러나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며,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다. 특히 지금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국제적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 저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위기의 중심에는 미국이 있다. 그들은 미국의 "도덕적 역량과 기술적 능력 사이의 격차가 너무 커서 인류의 자멸을 막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제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이제는 일반 시민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할 때라는 것이 저자들의 마지막 메시지이다. 어쩌면 최근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노 킹스'(No Kings) 시위 역시 평생 '행동하는 좌파 지식인'으로 살아온 촘스키의 이상이 현실 정치 속에서 하나의 형태로 나타난 모습일지도 모른다.

불편하지만 필요한 도전

1980~90년대 미국에서 생활하던 시절, 나에게 촘스키는 다소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의 사상이 틀려서라기보다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논쟁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역사학자로서 촘스키에 대한 평가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예전과 다른 시선을 갖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높아진 한국의 위상이 있다. 그때와 달리 한국은 놀라운 경제적 성장을 이뤘고, 문화강국으로 발돋움했으며, 민주주의의 발전 역시 그 성취의 핵심이 되었다. 오늘날 이른바 'K-민주주의'는 세계 민주주의 역사 속에서도 의미 있는 경험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빛을 발해야 한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냉철한 자기 성찰과 자기 검열이다. 그럴 때 촘스키의 사상은 중요한 지적 도전이 된다. 그의 급진적 비판은 때로 불편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이 민주주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에게 촘스키는 단순한 논쟁적 지식인이 아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하나의 거울이다.

지금 우리가 그를 알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위 기사의 전문은 피렌체의식탁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firenzedt.com/news/articleView.html?idxno=32889 필자 김봉중은 미국 샌디에이고 시립대학 사학과 교수와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한국미국사학회 회장을 지냈다. <이 정도만 알면 되는 세계사> <위험한 미국사> <트럼프 금지어 사전> <미국을 안다는 착각> 등 다수의 미국사 및 세계사 관련 저서를 집필했다. 또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여러 차례 미국사 관련 강의를 진행하며 현재는 네이버 프리미엄 채널에서 ‘카우보이들의미국사’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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