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잘했어요" 도장이 없어도, 삶은 예술이 된다

오성훈 2026. 4. 16.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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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산속에서 만난 이상일의 '라드라비(L'art de la vie)'

[오성훈 기자]

이천의 봄날, 버스가 나른한 오후를 뚫고 어딘가에 멈춰 섰다. 점심을 먹고 올라탄 터라 차가 어디를 향하는지도 몰랐다. 단체 연수라는 게 으레 그렇다. 군중 속에 묻혀 다니다 보면 어디를 왜 가는지보다 눈앞의 풍경이 전부가 된다. 4월 중순 치고는 꽤 더운 날이었다. 졸다가 웅성거리는 소리에 깼다. 일행을 실은 차는 이천 산속 어딘가에 우리를 부려놓았다.

그 순간 문득 춘천의 이상원 미술관이 떠올랐다. 교감 시절, 연수 때 찾았던 그곳도 대중교통으로는 쉽게 닿을 수 없는 산골에 있었다. 정규 미술 교육 없이 생활인의 삶과 노동을 화폭에 담아낸 작가의 공간이었다. 시골에서 태어나 압축성장 세월을 따라 앞만 보고 달려온 터라, 산골 깊숙이 숨어있는 미술관은 언제나 낯설면서도 묘한 기대감을 준다. 교직의 특수성 덕분일까, 단체 연수에는 어김없이 이런 뜻밖의 문화 탐방이 끼어든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바위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은 카페, 왼쪽은 알 수 없는 무언가였다. 살짝 비켜 열어놓은 낮은 문이 일행을 반겼다. 공사판 철사를 엮어 사립문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데, 녹슨 모양이 영락없이 시골집 사립문처럼 보였다. 낮고, 비켜서 있다. 주인장이 드나드는 이를 통제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듯했다.

상상해봐야 부질없는 건물

바위를 왼쪽에 두고 계단을 따라 오르니 2층 카페가 나왔다. 냉커피 한 잔으로 나른함을 달래고 철 계단을 한 층 더 올라갔다. 위쪽으로는 한옥, 아래쪽으로는 거대한 창고 같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 건물은 말하고 있었다.

'마음껏 상상해봐라. 들어오기 전의 상상은 어차피 부질없는 짓이다.'

제법 줄을 서서 기다려 들어섰다. 미술관이구나, 싶었다. 화려하지도 않고 정밀하지도 않은 여인들의 그림이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나중에 작품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알았지만, 작가가 손끝 노동의 과정에서 느꼈던 감정과 보았던 것들을 연필 하나로 재현한 것이었다. 그의 그림은 '가위'로 세상을 살아온 사람의 것이었다. 화폭 속 소품들이 가위로 오린 듯 도려내어져 있었다.

그림 아래 식탁처럼 생긴 것 위에는 도저히 셀 수 없을 만큼의 캡슐이 접시에 가득 담겨 있었다. 이게 뭐지. 자세히 들여다보니 머리카락과 이름이 함께 담겨 있었다. 도대체 몇 명의 머리카락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 입을 벌리고 서 있을 즈음이었다. 캡슐의 성찬 위로 매달린 몇 개의 거울. 1세대 남자 헤어 디자이너의 삶과 그를 거쳐 간 수많은 손님의 잔상이 거기 그대로 담겨 있었다. 작가는 제 손끝에 배어있는 노동의 흔적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긍지 높게 드러내 보였다.

화려한 옷의 주인장이 도슨트로 나타났다

화려한 옷을 입은 범상치 않은 인물이 나타났다. 이 공간의 주인장, 이상일 씨였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한국 1세대 남성 헤어 디자이너로, 수십 년간 가위 하나로 업계의 한 시대를 이끌었던 사람이었다. 은퇴 후 이곳 이천 산속에 터를 잡고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그가 직접 도슨트로 나서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Beauty DNA를 해설하는 작가 1세대 헤어 디자이너 이상일 작가는 평생 자신의 손을 거쳐 간 수만 명 손님의 머리카락을 캡슐에 담아 전시했다. 자신의 '손끝 노동'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긍지 높게 기록한 이 장면에서, 기술을 배우는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보았다
ⓒ 오성훈
어떤 미술 작품의 도슨트도 작가를 대신할 수 없다. 작가가 직접 도슨트가 되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작품 설명이 그의 인생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승화되었다. 초등학교 때 그린 그림에 선생님이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지 않아서 미술을 내려놓았다는 말. 그 한마디가 마음에 걸렸다.

나도 그랬다. 손재주가 없다는 생각을 일찍 했고, 그 생각을 오래도록 붙들고 살았다. 그림 그리는 일,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여전히 두렵다. 34년 교육 현장에 몸담으며 나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인색하게 도장을 찍어주었던가. 로봇을 만지고 기계를 깎는 우리 아이들의 거친 손마디 속에도 이토록 눈부신 예술의 씨앗이 숨어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헤어 디자이너로 손기술을 극도로 단련하고, 은퇴 후 그 손으로 다시 자기만의 예술 세계를 열었다.

Beauty DNA - 감사의 기록

캡슐 하나하나에 담긴 머리카락과 이름. 작품명은 'Beauty DNA'였다. 평생 자신의 손을 거쳐 간 손님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감사하기 위해 그 흔적을 캡슐에 담았다. 단순한 수집이 아니라 감사의 기록이었다. 그 옆에는 또 다른 작품이 있었다. 평생 피운 담뱃갑을 모아 그의 사진을 붙여 배 모양으로 만든 것이었다. 수집이라는 행위를 예술로 전환하는 방식. 그의 작품들은 화려하기보다 집요했다.

Last Beauty - 전율이 일었다

하이라이트는 제3전시관의 '라스트 뷰티(Last Beauty)'였다. 2012년에 제작한 자신의 가상 장례식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25,000송이의 티슈 꽃이 만개한 공간 속에 찬란한 꽃상여가 놓여 있었다. 상복을 입은 아내와 자녀들의 대형 연필 초상화가 사방을 감쌌다. 관람객은 어느 순간 구경꾼이 아니라 문상객이 되어 있었다.

그의 설명을 듣는데 전율이 일었다. 죽음을 슬픈 종말이 아닌 치열한 삶의 끝에 얻는 승리와 자유로 정의한다는 그의 말. 장례를 즐거운 이벤트로 바꾸는 발상을 통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주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설명이 끝나자 동행한 많은 이들이 박수로 답했다. "삶은 투쟁, 죽음은 승리와 자유."

예술은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의 영역

라드라비는 이상일 디자이너가 설계도 없이 세운 20여채의 건축물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도 훼손하지 않고 자연 사이에 끼워 넣듯 지었다고 한다. 생들기름으로 나무를 직접 닦으며 세월의 흔적을 손으로 만들어갔다.

돌아오는 길, 다시 춘천의 이상원 미술관을 떠올렸다. 그곳의 이상원 화백은 정규 미술 교육은커녕 농고를 중퇴한 독학 화가다. 생계를 위해 극장 간판을 그리던 '간판장이'에서 시작해, 안중근 의사의 표준 영정을 그린 국가 공인 화가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곳 라드라비 역시 그와 닮아 있었다. 미술 학위도, 건축 자격도 없다. 오직 손끝의 정성과 노동의 축적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세웠을 뿐이다. 정해진 길을 걷지 않았어도 괜찮다. 자신의 노동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이들은 결국 '예술'이라는 종착역에서 만나는 모양이다.

졸다가 도착한 곳에서 충격을 받았다. 어디서도 보지 못한 것들을 보았다. 초등학교 때 '참 잘했어요' 도장 하나를 받지 못해 미술을 내려놓은 사람이 결국 1만 평 대지에 자신의 철학을 새겨 넣었다.

어쩌면 예술이란 거창한 형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정성껏 보살피고 노동의 가치를 믿는 모든 이가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가 아닐까. 라드라비는 그 질문을 던지며 이천의 산속에 조용히 서 있었다.

참고) 찾아가는 길: 라드라비 리조트(www.lartdelavie.kr)는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진상미로 1163번길 220, 산속에 자리한 이상일 디자이너의 개인 예술 공간이다. 대중교통으로는 접근이 어려워 자가용 이용을 권한다. 사전 예약 여부와 운영 시간은 방문 전 확인이 필요하다. 20여채의 건축물과 3개 전시관을 둘러보는 데 약 1시간 30분~2시간이 소요된다. 내부 카페에서 음료를 즐기며 쉬어갈 수 있다. 이탈리안 식당, 베이커리, 한식당도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사 채택 후 개인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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