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살 소녀 눈에 비친 어른들의 이상한 사생활

김상목 2026. 4. 16.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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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르누아르>

[김상목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후키'는 11살, 5학년 여학생이다. 방학이 찾아왔다. 친구들과 놀 궁리, 가족과 여행을 꿈꿀 법한데, 어째 소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또래와 달리 '죽음'이나 '염력', '최면' 같은 초자연적 현상에 관심이 많다. 상상하기 힘든 특별한 여름방학의 끝에서 그녀는 어디에 닿게 될까? 이제는 훌쩍 성장해 어른이 되었을 소녀에게 닥친 일, 그리고 아이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1980년대 자전적 경험담
 <르누아르> 스틸
ⓒ 오드(AUD)
2022년 75회 칸영화제, 신예 작가 등용문 '주목할만한 시선'에 데뷔 장편 <플랜 75>로 황금카메라상 수상한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근미래 일본을 배경으로 노인 안락사가 제도화한 디스토피아를 구현해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그의 신작은 3년 후 다시 칸에 초대된다. 이번엔 본격 진검승부, '경쟁' 부문 초청이다. 촉망받는 신예에서 예비 거장으로 단숨에 도약한 셈이다.

신작은 사회성 짙은 SF 상상력을 구현한 전작과 정반대, 과거로 회귀한다. 그것도 현대 일본 전성기라 할 1980년 초반, 지금과 큰 차이 없어 보여도 한 세대 넘게 훌쩍 거슬러 올라간 영화 속 풍경은 자연스레 회고로 흐른다. 11살 소녀의 굴곡진 여름방학 비밀 일기장은 유년기의 낭만화와도, 터무니없는 잔혹 동화와도 궤를 달리하는 '제3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얼개만 간략히 요약하면, 한국 독립영화가 근래 교착에 빠지면서 끝없이 창작자 자전적 경험담에 집착하는 것과 딱히 다를 바 없지만, <르누아르>는 겉껍데기만 비슷할 뿐, 알맹이는 퍽 다르다. 이야기는 감독의 개인사가 진하게 농축되지만, 그렇다고 과도하게 개인적인 사연으로 채워지진 않았다. 개인의 과거에서 영감을 얻고 출발하긴 해도 영화는 작품 속 배경이 되는 시기를 경유한 이라면 능히 공감할 보편성을 띤다.

성장 이야기는 겉으로 보면 무척 수월한 소재다. 하지만 막상 관련 작업을 수행하는 창작자는 겉보기와 무척 다르다며 애로사항을 호소한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라 만만히 보고 접근하다가 봉변을 당하기 딱 좋은 아이템. 오히려 흔해 빠진 관습적 전개에 관객이 금방 흥미를 잃기 쉽다. 무수한 창작자가 이미 동서고금 통틀어 도전한 '레드오션'이라 도매금으로 퉁 치기 일쑤다. 이를 극복하고 흥미와 몰입을 지속하는 건 고강한 내공과 충실한 준비가 필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 영화'와 청소년 주인공 묘사가 창작자들의 경탄을 이끄는 건 절대 관습적인 가족 소사에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일어나는 숱한 개별의 사연을 세밀한 풍속화로 담아서다. '가족'은 인간의 복잡한 단면을 표현하기 최상의 재료라는 게 고레에다의 입장이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그런 거장의 자기장 안에서 적지 않은 훈련과 경력을 쌓았다. 그만의 문법으로 재구성한 가족 영화는 어떤 차별성을 드러낼까?

소녀의 눈에 비친 세상, 비극과 희극 사이에서
 <르누아르> 스틸
ⓒ 오드(AUD)
후키는 또래 친구들과 다르다. 집보다 병원 건물이 익숙하고, 가족의 풍경 역시 오순도순 보호막이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족쇄처럼 다가온다. 수업 시간에 작문 숙제를 제출해도 11살 답지 않게 성숙한 필치와 함께 섬뜩한 표현이 유독 돋보인다. 뭔가 석연찮은 상황이지만, 바쁜 시간을 쪼개 학교에 방문한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 다음, 딸에게 몰래 글로 옮기지 말고 그냥 말하라며 던진다. 마치 후키의 사정은 신경을 쓸 틈이 없다는 듯.

소녀에겐 든든한 울타리,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야 할 아빠의 빈자리가 커 보인다. 그래도 제법 이골이 난 것인지 홀로 시간을 보내며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몰입할 대상을 찾으며 시간을 보낸다. 영어학원에서 친구를 만나지만, 곧 멀리 이사를 떠나고 만다. 심드렁한 표정이지만,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은근히 친절하게 주변을 살피고, 본인만의 시각을 확립해 나간다.

후키는 그녀와 마주치는 어른들을 관찰한다. 아빠는 불가항력 운명에 포박된 존재다. 엄마는 아빠 몫까지 가족 건사하느라 늘 피곤하다. 오히려 먼저 무너질 위기다. 딸은 그런 부모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말없이 응시한다. 당대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유행하던 초능력자 특집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어깨너머로 책 읽으며 배운 최면술을 연습하곤 한다. 답답한 현실을 초극할 뭔가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탐구하는 듯하다.

소녀는 몇몇 어른과 만난다. 그런데 어째 의지할 상대는 없고, 멀쩡하게 행세하던 이들도 예리한 눈빛으로 포착하면 모순투성이다. 세상 어른은 다 이렇게 부조리한가? 번듯하게 자신을 소개하다 자신을 절제하지 못해 거듭 문제를 일으키고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한다. 다들 어딘가 불안과 공허를 숨기고 불순한 욕망을 감춘 상태다. 후키는 고비를 차례로 넘기며 그들에게 레이저 쏘듯 냉엄한 단죄의 시선을 응시한다.

아이가 본 낯설고 이상한 세상
 <르누아르> 스틸
ⓒ 오드(AUD)
어른은 자신이 아이들보다 우월하고 성숙하다 믿는다.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는 듯, 그들은 자신을 돌아보며 수양하기보단, 통념에 의존해 막연한 우월감을 전제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투명하고 편견 없는 시선은 종종 어른들의 은밀한 비밀을 너무 간단하게 꿰뚫고 만다. 치부가 들통난 어른들은 억지를 부리거나 양심의 가책 때문에 서둘러 도망치고 만다. 후키가 여름방학을 보내며 만난 어른들 역시 별다르지 않다.

소녀는 뚜벅뚜벅 걸으며 주변을 관찰한다. 뭔가 도움이 필요한 표정의 이웃에게 먼저 "안녕하세요!" 거듭 인사를 건네고, 상대가 어떤 상황인지 예리하게 파악한다. 11살 이웃 소녀가 내민 손길을 이웃은 기꺼이 받는다. 비록 소녀의 믿음처럼 만사형통은 아니라도 그가 절실한 건 소박한 상담, 대나무숲이 되어줄 누군가면 족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른을 구원하는 극적인 찰나다. 이미 어른들 편견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감독은 몇 번의 전복적 장면을 관객 앞에 던진다. 아니 지금 벌어지는 상황은 대체 뭐란 말인가? 화들짝 놀라며 현실의 온갖 우려할 만한 사례를 떠올릴 이들에게 빼어난 연출로 제법 숨이 턱 막힐 법한 밀고 당기기를 시전한다. 하지만 어른들이 떠올릴 미디어 사회면 보도의 전형적 사건 사고 직전에서 비틀어 반전한다. 안도의 한숨과 더불어 제대로 뒤통수 한 방 맞는 기분이다. 그래도 화면 속 주인공이 무사하니 다행이긴 하다.

후키는 학교에서 윤리와 법칙을 배우지만, 정작 어른들은 그렇게 살지 못한다. 그들은 미사여구로 소녀를 속일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정작 난처한 상황에 빠지면 전전긍긍하며 꼴불견을 드러낸다. 후키는 차갑고 냉정한 표정으로 그들을 일깨운 후 표연히 떠난다. 마치 초월적 존재가 소녀의 형상으로 그들의 부도덕을 심판하듯 말이다. 하지만 그만큼 세상 모순에 직면하며 주인공 역시 딜레마를 겪는다. 기묘한 성장 서사다.

11살 소녀의 성장통
 <르누아르> 스틸
ⓒ 오드(AUD)
각자의 가족은 자신만의 위기와 모순을 꼭꼭 감춘다. 하지만 후키의 가족은 그 봉합이 불가능한 상태다. 소녀는 좀 많이 일찍 부모의 렌즈에 의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감각으로 세계와 마주한다. 물론 또래 친구들이 꿈꿀 법한 찬란하고 빛나는 세상은 가짜다. 어른들의 가면을 벗기자 덩치만 큰 아이들만 즐비하던 셈. 너무 희망 없는 지옥도일까? 하지만 후키가 절망에 빠지지 않듯 세상은 극단적으로 치우치진 않는다. 그저 위장막만 벗겨진 것뿐이다.

후키 역을 맡은 촬영 당시 주인공 나이와 동갑인 2013년생 스즈키 유이는 <르누아르>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화면을 장악한다. 때론 천진난만한 아이의 얼굴로, 때론 변장한 신인 양 스크린을 채우는 매력적인 배우의 발견이다. 신성의 활약을 조력하는 건 일본 영화계에 검증된 탄탄한 연기자들이다. 척척 각자 몫을 감당하는 건 물론 긴밀한 협력을 통해 감독의 비전을 확장해 낸다. 반가운 얼굴과 낯선 발견이 교차하며 감정의 파도가 일어난다.

한국 영화 위기 논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르누아르>는 여러모로 분석 대상이다. 선배 거장들의 프로젝트 제안에 참여해 신예의 인지도를 올리고, 제작비를 자력으로 마련하고자 다국적 제작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한 결과가 구현된 작업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중 기호에 영합하기보다 풀고픈 주제에 집중하는 결단, 동료의 작업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영화 친구들'의 존재감이 화면 안팎에 아른거린다.

11살 소녀의 기이한 모험담은 아름다움과 불길함, 어두운 그림자와 밝은 세계 사이를 통과한다. 잔인하고 섬뜩해도 종종 툭 아름다움이 깃든다. 제목이 왜 '르누아르'일까? 처음엔 뜬금이 없었지만, 실체로 마주한 <르누아르>는 자신이 던진 질문에 충실하게 기대 이상 해답을 제출한다. 현재 일본 영화 르네상스 한 축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할 만하다. 이상하고 짜릿한 11살 후키의 성장영화다.

<작품정보>

르누아르
ルノワール
RENOIR
2025|일본|드라마, 성장물
2026.04.22. 개봉|119분 52초|12세 관람가
감독/각본 하야카와 치에
출연 스즈키 유이, 이시다 히카리, 릴리 프랭키, 카와이 유미
제작 일본 ⸰ 프랑스 ⸰ 싱가포르 ⸰ 필리핀 ⸰ 인도네시아 ⸰ 카타르 6개국 합작
수입 오드(AUD)
배급 메가박스중앙㈜
 <르누아르> 포스터
ⓒ 오드(A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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