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왜 '극우 시대가 온다'라고 했나

박은홍 2026. 4. 16.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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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이론의 재구성과 공화주의적 전환, 조희연 전 교육감이 답하다

지난 4월 8일 성공회대에서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의 최근 저서 <극우시대가 온다: 햇볕정치와 공화적 민주시민교육> 북토크가 열렸다. 아래 글은 토론자였던 필자(박은홍 성공회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질의(파란색 문장)와 이에 대한 조 전 교육감의 답변을 정리한 것이다. <기자말>

[박은홍 기자]

 지난 4월 8일 성공회대에서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의 최근 저서 <극우시대가 온다: 햇볕정치와 공화적 민주시민교육> 북토크가 열렸다.
ⓒ 박은홍
- 조희연 선생이 낸 <극우시대가 온다: 햇볕정치와 공화적 민주시민교육>을 읽으면서, 저는 80년대 조 선생도 참여했던 사회구성체 논쟁을 연상했습니다. 정치혁신과 교육혁신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저는 이 책이 진보이론사적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제기와 새로운 성찰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대담에서는 조희연 선생이 출간한 이 책의 진보이론상의 쟁점을 주로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특히 공화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기존의 좌파·진보이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논하고자 합니다.

조희연 선생은 이미 1990년대 중후반부터 진보진영에 새로운 인식을 제안해왔습니다. '아방타방'(我方他方)의 사유틀 안에 갇혀 있던 '우리 진영'의 문고리를 흔들기 시작했다고 보고 싶습니다. 최장집 선생이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서 박정희의 긍정적 측면을 건드리는 '선도성'을 보여주었다면, 조희연 선생은 사회구성체 논쟁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여 진보진영을 향해 과거의 '그늘'에 대한 성찰과 열린 세계관을 지속적·체계적으로 주문해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출간된 저서는 그러한 문제의식의 종합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이 책의 집필 동기는 무엇인가요?

이 책의 서문에서 저는 80년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조희연 그리고 90년대 시민운동 및 민주개혁운동가로서의 조희연, 2014년 이후 10년 동안 교육감이라는 행정가로서의 조희연이라는 세 가지 '조희연'의 대화라고 썼습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는 느낌으로 이러한 경험들을 성찰적으로 반추하면서 민주진보의 인식틀과 전략론을 확장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런 표현을 씁니다.

"20세기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막이 올랐지만, 또한 20세기는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막을 내렸다."

그런데 우리는 주로 전자의 시각만 가지고 있고, 후자의 시각은 충분히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자부심이 되고 있는 한국의 전투적이고 역동적인 K-민주주의의 성취와 성공에 주목하지만, 저는 민주화의 '그늘'도 생겨났고, 우리가 산업화의 그늘에 저항하면서 성장했던 것처럼 극우 역시 민주화의 그늘에 의해 촉진되며 성장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했습니다.

사회구성체 논쟁도 그러했듯이, 기본적으로 우리는 투쟁의 이니셔티브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 좋은 세상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는 필요조건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책에서 '공화적 이니셔티브'도 병행하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단순히 사회경제적·정치적 강자에 대항하여 약자 의식으로 투쟁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리더라는 인식 속에서 공존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그러한 방향에 일치하지 않는 불철저한 이론이나 인식, 실천의 '개량적' 성격을 비판하는 지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노동, 환경, 젠더 등 다양한 주제에서의 진보 내지는 급진주의적 지향 모두가 그러한 기조 위에 서 있습니다.
물론 이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른바 '적'에 대한 공격만으로는 좋은 세상이 오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러한 실천의 그늘도 직시하면서 이를 보완하는 전략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3-7제 인식론: '적'의 눈으로 우리를 비추는 여백의 힘

- 아마도 그와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 책에서 열린 사고의 비유적 표현인 '3-7제 인식'으로의 전환 제안도 이러한 문제의식의 발로라고 봅니다. 저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독선과 교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약한 상대주의(weak relativism) 혹은 약한 보편주의(weak universalism)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생각합니다. 조 선생은 극좌에서 극우로 이동하는 일종의 '사상 전향'을 교조에서 또 다른 교조로의 전향으로 보면서 진보적 인식 및 전략틀의 확장을 도모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70%의 확신으로 싸우자'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의 정의를 향한 투쟁과 인식이 70%는 옳지만, 반대로 반대 집단의 주장이나 우리에 대한 비판이 30%는 옳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식의 여백을 갖자고 주장합니다. 이는 단지 30%에서 화합하거나 봉합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30%에 담긴 반대 집단의 합리성을 포착하여 우리의 인식과 전략의 확장 속에서 융해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풍부화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30%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는 반대 집단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가상적으로 '적'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지요. 책에서는 '따옴표'를 친 의미에서의 '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저는 당연히 그러한 차원을 넘어서자고 주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적차원에서 널리 적대적 진영 정치의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른바 '적'이라는 표현도 사용했습니다. 이 점은 용어로서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앞서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만일 스탈린 체제 등에 대한 자본주의 진영의 비판을 부르주아적 비판이라고 본질주의적으로 재단하고 폐기해버리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사회주의 체제 내부의 개혁 공간이 조금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일종의 극단성에 대한 경계를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고, 학계에서 말하는 본질주의에 대한 경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30%의 융해는 우리의 가치와 정책이 헤게모니적으로 확장되는 계기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장기 민주화 시대의 부메랑, '내로남불'과 자발적 극우의 탄생

- 이 책에서 사용되는 언어 중 '그늘'과 '응시'라는 말이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산업화·권위주의·독재의 '그늘'만 보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 시대의 '그늘'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장기 민주화 시대'라는 개념도 이야기합니다. 이 장기 민주화 시대의 부침과 그늘에 대해 설명해주시지요.

저는 80년대, 특히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본격화된 민주화 개혁 시대가 현재까지 약 40년에 가깝게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를 장기 민주화 시대라고 부르고, 그것을 전기와 후기로 나눕니다.

전기는 전두환으로 상징되는 악마에 대한 분노와 이른바 '적'이 존재하는 민주주의 시대이고, 후기는 민주진보 세력이 집권하기도 하면서 그러한 구도가 약화되고,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기조의 도입, 세계화의 흐름, 디지털 정보화 기술 혁명 등으로 삶의 기초가 변화하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민주화 시대의 기본적인 인식틀은 악마와 천사의 선악 이분법적 인식입니다. 세상이 변화하는데도 이러한 이분법을 그대로 적용하게 되면 현실과의 불일치가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후기는 민주진보 세력이 집권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야당 세력이 아니라 집권 세력이 되면, 과거 야당 시절에 비판하던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집권 세력의 일부는 비리에 연루되기도 하고, 여기서 예컨대 '내로남불'과 같은 현상이 정치의 일상이 되게 됩니다.

사실 윤석열이 믿었던 음모론은 박근혜정부 출범 후 진보가 먼저 제기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적을 비판하는 그 기준이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도 비수가 되어 날아오기도 하고요. 치열한 싸움의 과정에서 경쟁 집단의 문제점이 우리 집단에도 공통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변화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극우의 강화는 이러한 변화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선에서 민주진보의 새로운 이중성과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자발적 극우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책의 3장에서는 반대 집단의 눈으로 이 장기 민주화 시대가 어떻게 비판되고, 그것이 어떻게 그들 스스로의 도덕적 분노의 기반이 되는지를 87년 대선에서의 분열, 조국 사건, 이명박 정부 초기의 소고기 수입 반대 투쟁 등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른바 '햇볕정치'라는 새로운 접근을 통해서, 그런 극우의 사회정치적, 사회심리적 기반을 축소하자는 제안도 합니다.

논쟁적이지만, 저는 윤석열이 군사적 수단을 통해서 규명하고자 했던 부정선거 음모론을 '보수진보 동수의 국가 전문가 조사위원회'를 통해서 양지로 가져오자는 제안도 하고 있습니다. 내로남불의 정치를 민주진보가 주도해서 새로운 규칙의 정치로 전환하자는 제안도 하고 있습니다. 여야 정권 교체시마다 반복되는 산하기관장 임명 같은 것에 대해서도 내로남불적 옹호와 공격을 반복하기보다는,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선도성을 발휘하자는 제안도 하였습니다.

- 이 책에서 조희연 선생이 진보진영을 향해 주문하는 공화 지향의 햇볕정치는, 어찌 보면 민주시민의 기본이며 다원주의를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로 보는 자유주의 성향의 정치학자, 사회학자들의 기본 논지와도 상통한다고 봅니다. 저는 공화적 이니셔티브를 제창하는 조 선생의 사유체계 속에서, '극좌'로부터 홀대받았던 자유주의 그리고 조 선생이 지지해 온 급진 민주주의와 이번에 새로이 제안한 공화주의 간의 관계가 궁금합니다.

제 책에서 이론적으로 다양한 진보적 이론과 자유주의, 공화주의, 다원주의의 관계를 깊이 있게 다루지는 못했습니다. 이 점은 후배 학자들에게 보완을 기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역지사지형 성찰성이나 3-7제 인식을 주문하는 것은, 진보주의 내지는 급진주의 이론이 자유주의, 다원주의,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는 공화주의를 '배척'의 대상으로만 설정하고, 그 불철저성—예컨대 자본주의 체제와의 친화성—을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제 책의 문제의식은 자유, 다원성, 공동체, 공존, 공화 등의 논의와 이론을 개방적으로 바라보면서 이를 수용하고 융해하는 열린 진보의 길을 모색하자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화주의와 관련해서는 조금 더 덧붙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공화'라고 하면 공화주의를 떠올립니다.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와 같은 저작을 떠올리기도 하지요. 저는 이 책에서 굳이 특정한 자유주의적 혹은 공동체주의적 공화주의에 기대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 헌법 제1조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표현에서, 민주 속에 포섭되어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했던 공화를 새롭게 인식해보자는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만일 나와 가족·집단을 넘어 더 큰 연결망 속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세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공화라고 한다면, 이를 위해서는 공동체성, 공공선·공동선, 공공적 의지에 대한 적극적 참여, 권리와 함께하는 공동체적 책무성 같은 덕목이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저는 공화를 하나의 이론적 입장에 단단히 정박된 고정 표지가 아니라, 여러 이론적·실천적 조류에 열려 있는 '빈 기표'로 설정하였습니다. 이렇게 설정하면 다양한 이론적 조류와의 결합 가능성이 열리게 됩니다. 맑스주의, 사회주의, 코뮨주의, 급진민주주의, 포스트맑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다양한 논의와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결합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차이(difference)와 다중성의 정치와도 접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공화주의가 권력의 자의적 지배를 방지하고 시민의 자유와 자치를 보장하려는 방향을 가진다면, 보다 급진적인 발상으로는 권력을 중심적·위계적 구조가 아니라 분산적이고 리좀적인, 혹은 수평적인 네트워크로 이해하는 관점과도 결합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민주화와 산업화 양 측면에서 경이적인 성공을 이루었다고 국제사회가 격찬했던 한국 사회가, 시대착오적인 종북·반국가세력 척결론을 내세우며 내란을 시도한 극우 통치자를 경험했습니다.
조희연 선생은 이 책에서 극우를 밀어낸 민주화 이후, 다시 극우시대의 도래 가능성을 우려하면서, 우 혹은 극우를 향한 햇볕정치가 극우시대로의 회귀를 예방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진보진영의 비공화적·비성찰적 인식 그리고 햇볕정치의 부족이 의도와는 무관하게 극우를 키웠다는 복선이 깔려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햇볕정치가 공화의 정치 세계로 나아가는 만병통치약(panacea)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를테면 평화적인 시민불복종운동(CDM)을 총칼로 진압하는 군부의 테러 행위에 맞서, 시민 방어 차원에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미얀마 청년들의 비(非)공화적 결단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또한 전쟁 정치로 전환할 수밖에 없는 공화의 경계(republican boundary) 혹은 햇볕정치의 임계점(threshold)을 상정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를테면 과거 한국에서의 군정치하, 부정선거 운운하면서 쿠테타를 일으킨 미얀마 군부치하, 역시 부정선거론을 들먹이며 12·3 계엄을 내린 극우 대통령 통치 국면에서는 아방과 타방이 갈릴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물론 조희연 선생은 '적'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는 전략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비공화와 공화 사이에 보다 촘촘한 단계(fine-grained degrees)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당연히 동의합니다. 향후 그러한 고민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식화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책에서 제안하는 것은 '성찰적 진보'의 새로운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성찰성을 갖는 진보, 즉 '적'이라는 거울에 스스로를 비추어 보면서 자신을 혁신하고 풍부화해가는 진보를 제안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제 책에서는 극우가 과거의 단순한 동원 대상에서 일정 부분—민주진보운동과 마찬가지로—자발적 대중운동의 성격을 가져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종의 미러링이 일어나고 있는 측면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극우의 성장에는 민주화의 그늘에 대한 보수적 분노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지금 한국 정치의 일상적 공방의 소재가 된 '내로남불'과 같은 문제를 통해, 극우는 민주진보의 이중성, 이른바 '위선'을 비판하며 도덕적 결집을 이루고 있습니다.

극우의 성장에는 도덕적 계기와 인지적 계기가 함께 작동하고 있습니다. 인지적 계기란, 치열했던 반독재 민주화 시기의 선악 이분법적 인식을 약 40년에 가까운 장기 민주화 시대에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변화된 현실과의 불일치가 발생하고, 그 틈을 뉴라이트 등의 이론이 파고들면서 하나의 인지적 공동체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러한 인식의 비역사성, 비상식성에 대해서는 저는 분명히 비판합니다. 다만 분석적 견지에서는 그러한 흐름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PC(정치적 올바름) 햇볕정치: 올바름이 공포가 아닌 해방이 되려면
 필자와 대담중인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우)
ⓒ 박은홍
- 양극화된 진영정치와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의 정치문화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정치환경 속에서, 조희연 선생이 제시한 햇볕정치론은 가히 용기 있는 '전복적'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 하에서 불온서적으로 분류되기도 했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저자 E. H. 카는 현재 역사가가 서 있는 지점이 과거에 대한 그의 시각을 결정한다고 설파했습니다. 사회주의권 붕괴 이전의 지식인 조희연과 붕괴 이후의 지식인 조희연의 생각은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 책에서 제안하고 있는 'PC 햇볕정치'의 문제의식에 대해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과연 '올바름이 공포가 아니라 해방이 되는 좁은 길'이 가능한 것인지요.

제 책에서 가장 고민을 많이 했고, 주위의 피드백도 많이 받아본 부분이 13장, 이른바 PC 햇볕정치 부분입니다. 잘 알다시피 PC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의미합니다. 여성운동, 성소수자운동, 환경운동, 장애인운동 등 시민사회운동의 다양한 가치들은 모두 정치적 올바름의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PC는 현대에 들어 주로 보수적 비판 담론에서 경멸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트럼프나 미국 공화당이 민주당을 비판하는 데에도 이 용어를 사용합니다. 트럼프는 PC적 가치의 상징이었던 DEI(다양성·형평성·포용)를 폐지하려는 시도도 하고 있습니다. PC에 대한 이른바 백래시 역시 확대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시선으로 올바름의 행진이 동반하는 의도하지 않은 그늘을 응시해보고, '우리'의 성찰적 시선에서 '우리'의 확장된 실천 속에서 융해할 점이 있는지를 고민해보자는 것이 이른바 PC 햇볕정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올바름'의 행진에도 그늘이 존재한다고 인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대안적 노력의 하나로, 올바름을 추구하는 우리의 가치운동이 정체성 전략을 기본으로 삼고 있으나, 여기에 헤게모니 전략을 결합하는 방안을 고민해보자고 제안합니다.

정체성 정치는 억압된 정체성을 재인식·재확립하고, 그에 기반하여 그러한 변화에 공감하는 개인과 집단을 조직하며, 나아가 자신의 지지 집단—특히 강한 지지 집단—의 지지를 유지하고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헤게모니 정치는 자신의 집단을 넘어 다양한 대중을 대상으로 가치의 설득력과 동의를 확대함으로써 영향력을 확장해가는 정치입니다.

여기서 정치는 협의의 정치에 국한될 필요는 없습니다. 사회운동은 곧 생활 정치입니다. 예컨대 파울로 프레이리는 <피억압자의 교육학(Pedagogy of the Oppressed)>에서 "피억압자의 해방은 억압자의 해방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여성주의에서도 여성의 해방은 궁극적으로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왜곡된 남성성의 해방으로 이어집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실천적으로 고민하자는 것입니다. 이는 그람시가 "노동자계급이 지배적 계급일 뿐만 아니라 지도적 계급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헤게모니의 차원에 주목했던 문제의식과도 연결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의 작은 예를 들면, 초등교사 영역에서는 편만한 젠더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80~90%를 차지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한 성이 70%를 넘을 수 없다'는 양성평등 조항이 이제는 남성에게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초등 임용교사 정책과 관련하여 이러한 대안적 접근도 고민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2030세대의 보수화, 특히 그 속에 내재한 PC적 흐름에 대한 즉자적·정서적 반발을 넘어서는 공화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도 함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인식론적 화해(epistemic reconciliation)를 목표(telos)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조희연 선생의 '3.7제 민주주의'는 다양한 균열 축이 혐오와 전쟁의 일상화로 이어지고 있는 현재의 세계 시간(world time) 속에서 매우 유의미하다고 봅니다. 진보의 입장에서 가히 역사 전쟁을 도발하고 있는 뉴라이트와의 인식론적 화해 가능성이 '3.7제 인식'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제 책을 보고 어떤 보수 언론에 계신 분이 지금은 '극좌의 시대'인데 왜 극우 집권 시대를 이야기하느냐고 묻더군요. 그런데 저는 12·3 비상계엄이라는 시대착오적인 퇴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극우 대선 후보가 41%를 얻었고(2022년에 비해서는 8% 하락에 불과합니다), 범야 대 범여 후보의 구도가 5:5인 상황은 보수 대 진보, 여야의 경계가 고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대선은 여야 후보 간의 1대1 경쟁입니다. 대체로 중반 이후에는 5:5에 육박합니다. 따라서 과거 비리의 폭로나 민주진보에 불리한 어떤 우연적 사건이 발생한다면, 한국에서도 극우 집권 시대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저는 햇볕정치와 성찰적 진보 그리고 사회의 인프라에 해당하는 교육 영역에서의 공화적 교육을 통해 이러한 고착된 경계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이 문제를 반드시 한국에만 적용해서 쓴 것은 아닙니다. 지구촌 전체의 민주파, 진보파 혹은 좌파에게도 전하는 새로운 혁신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수와 자본주의에 대한 외재적 비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또한 진보적 전진이 동반하는 그늘을 응시하고, 이를 보완하는 인식과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극우 시대의 잠재력은 매우 광범위하게 존재하게 됩니다.

저는 서구 역사에서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1932년 히틀러 집권에 이르는 시기에, 다른 인식과 실천의 경로는 불가능했는가라는 역사적 질문을 서구의 진보파에게도 던지고 싶습니다. 지금도 극우 집권의 흐름은 유럽, 미국, 일본 등으로 확산되어 있습니다. K-민주주의가 다른 경로를 걷기 위해서는 다른 인식이 필요합니다. 부족하지만, 저는 이러한 인식의 지평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 장시간 질문에 응해주어서 감사합니다. 조희연 선생이 한국 사회에 던진 '햇볕정치', '3.7제인식' 담론이 '적'진영에게 승리주의의 변형된 형태로 보이는 정치공학이나 병법으로 불신을 사지 않으며 이 땅에 명실상부한 공화·공존정치의 세계를 견인해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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