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하구, '금단의 물길'에서 '시민 주권의 바다'로

이원영 2026. 4. 15.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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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사의 군사적 월권을 넘어 남북 공동 하상 조사를 제안한다

[이원영 기자]

 광활한 한강하구. 강화도에서 서해안을 내려다 본 장면.
ⓒ 이원영
고려 때 국제 무역항 벽란도(碧瀾渡)는 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들던 동아시아 해상 실크로드의 관문이었다. 그 벽란도가 자리한 곳이 바로 한강 하구다. 천 년 전 세계를 향해 열려 있던 이 물길이, 지금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봉인된 수역으로 남아 있다.

몇 달 전 이재명 대통령은 이 지명을 언급하면서 현실을 넘어선 미래에의 기대를 표출하기도 하였다. 최근 한반도 평화 질서의 재편 가능성이 언급되는 가운데, 우리는 이 잊힌 물길의 법적 지위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직시해야 할 때가 되었다.

잊힌 물길 그리고 봉인된 정전협정 제1조 5항

대한민국 지도에서 한강은 서울을 관통해 서해로 흘러가는 것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정작 그 끝단인 한강 하구는 우리 의식 속에서 사라진 '섬'과 같다. 조강(祖江)이라 불리며 수천 년간 물류와 문화의 동맥 역할을 했던 이 수역은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70여 년간 적막에 잠겨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전협정은 이 땅의 그 어떤 법전보다도 한강 하구의 개방성을 강력하게 보장하고 있다. 협정 제1조 5항은 "한강 하구의 수역은 쌍방 민간 선박의 항행에 이를 개방한다"고 명시했다. 육상의 비무장지대(DMZ)가 철책으로 가로막힌 '금지의 땅'이라면, 한강 하구는 법적으로 '자유의 물길'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남북의 민간인은커녕, 기초적인 수로 조사나 생태 조사조차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유엔사의 역할, 정전 관리인가 주권의 대행인가

이 봉쇄의 중심에 유엔군사령부(유엔사)가 있다. 유엔사의 역할에 대해서는 공정하게 살펴보자.
유엔사가 한강 하구의 통행을 제한하는 데에는 나름의 논거가 있다. 정전체제가 유지되는 한 군사적 긴장은 상존하며, 민간 선박의 무질서한 진입이 예기치 않은 충돌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 그리고 북한 측이 민간 항행을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 단속 등 실질적인 정전 관리 업무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논거는 '통제의 범위와 기간'이라는 맥락에서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정전협정은 유엔사에 '항행의 자유를 보장할 의무'를 부여했지, '항행을 원천 봉쇄할 권력'을 부여한 것이 아니다. 안전을 위한 조건부 관리는 필요하나, 70년 넘게 일체의 민간 접근을 차단하는 전면 봉쇄는 과도하다. 전자는 정전 관리이고, 후자는 사실상 주권을 대행하는 행위로 비칠 수 있다.

게다가 유엔사는 UN의 공식 산하기구가 아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안보리 결의에 근거해 창설된 특수한 군사적 통합체일 뿐이다. 그런 기구가 주권 국가의 영토 안에서 민간의 통행과 학술 조사까지 무기한 차단하는 것은, 정전 관리의 범위를 넘어선 권한의 비대화나 다름없다.

남북이 평화적 교류를 합의해도, 지자체가 하상 조사를 추진하려 해도, 유엔사의 '승인' 없이는 단 한 척의 배도 띄울 수 없는 현실은, 안전의 논리가 주권 위의 특권처럼 변질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 '남북 공동 하상 조사'인가

한강 하구의 물길을 여는 것은 단순히 배를 띄우는 행위가 아니다. 분단이 강요한 '공간의 독점'을 해체하고, '국민의 시간'을 회복하는 과정의 첫걸음이다. 이제는 우리가 나서야 한다.

필자는 그 시작점으로 '남북 공동 하상 기초 조사'를 제안한다. 현재 한강 하구는 수십 년간 준설이 중단되어 하상 지형이 완전히 변해 있다. 어디가 깊고 어디가 얕은지, 어디에 퇴적물이 쌓여 생태계가 변했는지조차 파악되지 않는다. 기초 데이터 없이 평화적 이용을 논하는 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남과 북의 전문가들이 함께 배를 타고 물길의 깊이를 재고, 갯벌의 생태를 살피는 작업은 그 자체로 강력한 평화의 실천이다. 이는 군사적 대결의 긴장을 완화할 뿐만 아니라, 향후 이 지역을 평화 생태 관광이나 물류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한 과학적 토대가 된다.

물론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현재 남북 관계는 경색 국면이며, 북한이 이러한 공동 조사에 즉각 호응할 가능성은 낮다. 그럼에도 남측은 북한의 태도와 무관하게 조사 설계와 준비를 미리 완료해 놓아야 한다.

2018년 판문점 선언 당시 남북은 이미 한강 하구 공동 이용에 합의한 전례가 있다. 대화의 창이 열릴 때 구체적 계획이 테이블 위에 있어야 실행 가능성이 커진다.

국제사회와 시민 주권의 이름으로

유엔사가 끝내 민간 조사의 길을 열지 않는다면, 국제사회의 판단을 구하는 방안을 우리는 적극 검토해야 한다. 가장 유력한 경로는 국제사법재판소(ICJ)의 권고적 의견 요청이다. UN 총회에서 우호국과의 공조를 통해 '정전협정상 민간 항행권의 범위'와 '주권 국가의 기초 조사권'에 관한 결의안을 발의하고 ICJ에 의견을 구하는 절차를 밟을 수 있다. 이는 즉각적인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중장기적 국제법적 논거를 축적하는 전략이다.

동시에 보다 현실적인 접근도 필요하다. 경기도·인천시 등 접경 지자체가 주도하여 드론, 무인선 등 비접촉 방식의 과학 조사를 먼저 추진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엔사와의 협의 채널을 확대하는 방안도 병행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것이 정치권만의 숙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시민이 주도하여 '한강 하구 평화 조사단'을 구성하고, 접경 지자체가 이를 제도적·재정적으로 뒷받침하는 '아래로부터의 주권 행사'가 필요하다. 시민 스스로 물길의 주인이 되기를 포기할 때, 군사적 통제는 그 공백을 채우며 관성적 특권으로 굳어간다.

결언 —국토의 미래는 물길에서 시작된다

경기도와 황해도가 만나는 한강 하구는 한반도경제의 거대한 정보와 물류가 군집할 가능성이 큰 클러스터링의 핵심 요충지다. 이 잠재력을 봉인해 둔 채 국토의 미래를 논할 수는 없다.

70년 묵은 봉인을 걷어내자. 남북의 전문가들이 손을 잡고 강바닥의 모래알부터 다시 조사하자. 4·19 혁명이 권위주의적 특권을 부정하며 민주주의의 기틀을 세웠듯, 한강 하구의 물길을 여는 것은 군사적 관성을 해체하고 시민의 국토 주권을 완성하는 새로운 민주화의 과정이 될 것이다.

평화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금지된 선을 넘어가는 시민의 발걸음에서 시작된다. 조강(祖江)이 다시 도도하게 흐를 때, 비로소 우리의 주권도 온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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