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성이 절로 나오는 무지개 폭포, 용산에 있습니다

전갑남 2026. 4. 15. 12:27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거울못부터 미르폭포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산책로에서 찾은 우리 문화의 생명력

[전갑남 기자]

 봄의 전령사 튤립이 수놓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입구, 걸음마다 계절의 색이 묻어난다.
ⓒ 전갑남
박물관은 박제된 시간이라고들 말한다. 유리 진열장 안에 갇힌 유물처럼, 그곳의 풍경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 쉽게 짐작한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의 봄은 그 짐작을 조용히 배반한다. 같은 자리, 같은 건물, 같은 유물들 사이로 계절은 끊임없이 다른 얼굴을 내민다.

지난 11일, 입구부터 반기는 것은 정갈한 화분에 가지런히 심긴 튤립들이다. 단정한 검은 화분들이 계단을 따라 줄지어 서서 화사한 꽃길을 열어준다. 그 길을 따라 오르는 이들의 뒷모습마저 따스한 봄의 풍경이 된다. 붉고 노란 꽃잎이 햇살에 투명하게 번지는 길을 지나며 나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진다. 꽃을 본다는 것은 결국, 시간을 천천히 읽는 일인지도 모른다.

천 년의 미소 위로 흐르는 4월의 빛

그 꽃길 끝에서 지난 7일부터 전시를 시작한 안동 봉정사 영산회상 괘불도를 보기 위해 전시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2층 불교회화실에 들어서는 순간, 부처의 설법 현장을 눈앞에 펼쳐 보이는 거대한 영산회상의 자태에 숨이 멎는 듯했다. 높이 솟은 괘불의 위엄에 압도된 채, 은은한 묵향 속 불보살의 미소를 차분히 둘러보고 나니 마음속에 경건한 울림이 차오른다.

다시 바깥으로 나선다. 문을 나서는 순간 공기의 결이 달라진다. 박물관은 더 이상 고요한 시간의 창고가 아니라, 살아 있는 계절의 한복판이 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입구. 거대한 프레임 속에 담긴 서울이 살아움직인다. 과거의 공간에서 현재의 도시를 조망하다.
ⓒ 전갑남
 하늘과 정자를 품은 거울못의 고요, 수면 위로 흩어지는 윤슬이 마음을 씻어낸다.
ⓒ 전갑남
조금 더 들어가면 넓게 펼쳐진 거울못이 눈을 붙잡는다. 이름 그대로 수면은 하늘과 봄 풍경을 투명하게 투영하며 과거와 현재를 함께 비춘다. 거울못 한가운데, 비취색 지붕을 얹은 청자정이 햇살을 머금고 우아하게 서 있다. 바람이 스치면 수면 위로 잔잔한 물결이 일고, 햇살은 그 위에 부서져 반짝인다. 윤슬이 흩어지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 속에 쌓인 소음들이 하나씩 가라앉는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바라본 서울의 모습. 아스라이 남산타워가 보이고 평화로운 서울이 조망된다.
ⓒ 전갑남
도심 속 비경, 미르폭포에 피어난 무지개

중앙 통로를 따라 걷다 탁 트인 계단 위로 올라선다. 시야가 확 트이며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스라이 북한산이 머리를 내밀고, 남산타워는 손에 닿을 듯 가깝다. 산허리 곳곳에 산벚꽃이 듬성듬성 피어 봄의 화려함을 수놓고 있다.

인위적으로 크게 손 보지 않은 숲길에는 이제 막 틔워낸 신록들이 봄의 얼굴을 내민다. 용산의 옛 이름에서 따온 '미르폭포'에 다다르니 풍경은 더욱 깊어진다. 아주 먼 옛날, 이곳에 살던 용왕의 아들이 폭포 아래서 명상에 잠긴 한 여인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여인이 눈을 뜨며 "당신이 나의 운명이구려!"라고 화답한 뒤 두 사람이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이곳을 '용이 사랑을 내려주는 장소'로 기억하게 한다.
 용의 전설이 흐르는 미르폭포, 쏟아지는 물줄기 끝에 찰나의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 전갑남
그래서일까. 육중하고 투박한 바위들 사이로 맑은 물줄기가 쏟아지고 그 포말이 고운 무지개를 피워내는 곳마다, 젊은 연인들이 멋진 포즈로 사랑의 인증 사진을 남기고 있다.

"아, 정말 아름답다."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탄성은 시공간을 초월한 사랑의 기운에 대한 화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늘 아래 선 국보, 바람과 햇살로 쓴 역사

박물관을 품고 있는 야외 정원은 그 자체로 거대한 전시장이다. 봄의 기운에 표정을 달리하는 나무와 꽃들은 석탑과 석비 등 석조물들과 어울려 역사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야외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우리 역사의 정수를 담은 국보급 유물들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박물관 건물 옆으로 늘어선 보물급 석조물들. 비바람을 견뎌낸 돌의 얼굴 위로 따스한 봄볕이 내린다.
ⓒ 전갑남
 고려의 기품을 간직한 남계원칠층석탑을 비롯한 석탑들. 세월의 무늬와 신록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 전갑남
특히 여러 석조물 중에서도 유독 키가 큰 '남계원칠층석탑'이 눈에 띈다. 신라 석탑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처마 끝이 살짝 들려 있고, 위로 올라갈수록 느껴지는 묵직한 조형미는 고려 석탑의 멋을 마음껏 뽐내는 듯하다. 실내 '경천사지10층석탑'의 화려한 기교에 감탄했다면, 이곳에서는 기단부에 낀 이끼와 세월의 무늬에 마음을 빼앗긴다.

바람을 맞고 햇살을 견디며 계절을 온몸으로 받아낸 돌의 얼굴은 어쩐지 더 단단하고 깊게 느껴진다. 숲 사이로 들려오는 까치와 박새의 지저귐이 적막한 석탑의 시간에 경쾌한 박자를 더한다. 우리 동네에서 봤던 작은 새들을 서울 도심에서 마주하니 반가움에 녀석들의 움직임을 한참이나 눈으로 따라갔다.

길가에는 이름 모를 풀들이 고개를 내밀고, 연둣빛 새잎은 차분하게 산책길을 채운다. 수백 년의 비바람을 지나온 석탑의 시간과 그 곁을 스쳐 지나가는 오늘의 봄. 박물관은 과거를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시간들이 서로를 비추는 장소라는 확신이 든다.

'어제'와 '오늘'의 공존

걷다 보니 처음 이곳에 왔던 날이 떠오른다. 그때는 유물을 놓치지 않으려 바삐 움직였고 설명문을 읽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유물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내가 달라졌다. 그래서 같은 장소가 전혀 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나오는 길, 광장 한복판에 세워진 단정한 입간판 하나가 발길을 붙잡는다. '국립중앙박물관, 2025년 연간 관람객 세계 3위'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프랑스의 루브르, 바티칸 박물관에 이어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이다. 영국박물관보다도 앞선 순위라는 사실에 가슴 한구석이 뿌듯해진다. 이는 단순히 우리 문화유산의 양이 많음을 뜻하는 숫자만은 아닐 것이다.
 세계 3위라는 자랑스러운 기록. 묵묵히 지켜온 우리 문화의 가치가 전 세계에 닿았음을 증명하는 징표다.
ⓒ 전갑남
박물관이 과거의 유물을 지키는 데 머물지 않고, 매 계절 새롭게 깨어나며 누구나 찾아와 쉴 수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 되어주었기에 가능한 화답이 아닐까. 세계인이 매료된 것은 어쩌면 화려한 유물 그 너머, 어제와 오늘이 이토록 정답게 공존하는 우리만의 따뜻한 풍경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유물과 봄 사이를 지나며 오래된 시간과 지금의 시간이 한 겹으로 겹친다. 그 사이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서 있는 봄의 한 장면이 된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