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지지자 앞에선 말조심? 어쩌다 뉴욕이 이렇게

장소영 2026. 4. 15.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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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영의 숨쉬는 뉴욕] '이민자의 나라' 미국 문화의 다양성... 이를 위협하는 트럼프 정권

미국의 역사를 온몸에 품고 있는 뉴욕. 누군가 살아냈고, 누군가 살아가는 빌딩 숲 사이사이의 이야기를 하나씩 담아 보려 합니다. <기자말>

[장소영 기자]

이란에 대한 미국의 타격이 시작되자 지역사회 게시판에 가장 먼저 성명(Official Statement)을 올린 곳은 나소 카운티 지역 경찰국(Police Department)이었다.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뉴욕 맨해튼 동쪽의 롱아일랜드는 나소와 서폭, 두 개의 군(county)이 있다. 경찰국은 지역사회 보호를 최우선으로, 특히 종교 시설에 대한 순찰과 경찰력을 증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여러 기관에서 '지역사회 안전'에 관한 비슷한 성명과 공지가 속속 올라왔다.

경찰국 성명 이후 지나가며 보니, 유대인 회당과 모스크에 배치된 경찰차가 보였다. 우리 가족이 다니는 교회에도 예배가 끝날 때까지 한쪽에서 경찰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기차역을 비롯한 주요 시설 주변에도 경찰이 상주 중이다.

지난 3월, 조란 맘다니 뉴욕 시장의 자택 근처에서 두 명의 남성이 무슬림 반대 시위대에게 폭탄 테러를 가한 사건이 일어났고, 비슷한 기간 우리 지역의 한 고등학교에 폭탄 테러가 예고되어 경찰이 조사에 들어갔다는 지역 뉴스의 보도가 있었다. 지역의 유대인 회당과 센터 몇 곳은 프로그램을 축소, 연기하기도 했다.

이란 공격 이후, 달라진 동네의 풍경
▲ 사원에 배치된 경찰차 중동과의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유대교 회당, 이슬람 사원, 시크교 사원, 중대형 교회 등 종교 시설에 경찰이 상주하고 있다.
ⓒ 장소영
중동의 상황이 악화되면서 기름 가격이 급격히 올랐다. 이란에 대한 공격 후 이틀 만에 갤런당 40센트가 오르더니, 한 달 사이 72센트가 올랐다는 지역 신문의 보도를 봤다.

미국은 주유원이 따로 없는 셀프 주유소가 많고, 현금으로 지불할 경우 조금 더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주유소들이 있다.

낯익은 점원에게 현금 선지불을 하며 투덜거렸다. "미친 가격이야. 한 달 사이에 20달러를 더 내야 한다니!" 그런데 점원이 갑자기 눈을 깜박거리며 뭔가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 손님 한 분이 나가자 그는 깃발과 스티커로 꾸며진 픽업트럭을 가리키며 "저분, 트럼프 지지자야. 그거 알아? 나는 뉴욕에서 911을 겪었어. 난 다시 직업을 잃고 싶지 않아. 그땐 아무도 나에게 일을 주지 않았거든"이라고 말했다.

점원에게 어느 나라 출신인지 상세히 묻지 않았다. 나도 911과 코로나 팬데믹을 겪었고, 중동계 혹은 아시아계의 외모만 보고 공격 받고 차별 받은 사례들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에 띄고 싶어 하지 않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 그중에서도 뉴욕 맨해튼 인근에 살다 보니 다민족 사회의 장단점을 피부로 느낀다.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이웃 간에 누리는 즐거움도 크지만, 미국 안팎의 이슈를 따라 금세 주변 분위기가 경직되고, 사안의 경중에 따라 특정 인종에 대한 혐오 정서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엔 아시안계가, 우크라이나 침공 시기엔 러시안계가, 이후엔 ICE(미국 이민세관단속국)의 불법체류자 추방 문제로 남미계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지역 인터넷 게시판에는 ICE가 어느 거리에 출몰했는지 알려주는 영상과 소식이 뜨고, 그 아래에는 오히려 ICE를 응원하는 댓글 수십 개가 달리며 서로 충돌 중이다.

최근에는 'We stand with Israel(이스라엘과 연대)' 깃발 또는 전쟁 반대 깃발을 꽂아 두는 이웃집을 간간이 본다. '국기 아래 우리는 하나(United under the Flag)'라는 미국의 모토가 무색하게, 두고 온 본국의 상황에 따라 정치적 입장도,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는 것이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이지만, 지난 역사 속에 이민자 차별 정책이 여럿 있었다.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 1882)은 대표적인 인종 차별이자 이민자 차별 정책이었다. 1943년에 폐지되기까지, 60여 년 동안 중국인 노동자들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희생되었고, 가족을 데려오지도 못해 인구가 급격히 줄었다.

최근 미국 내에서 찬반 논란이 일고 있는 다양성 정책(DEI:인종, 성별, 소수자에 대한 기회 확대)에는 차별을 당연시하던 법과 사회적 시선을 개선해 보고자 하는 노력이 담겨 있다. 교육계의 다문화 교육(Multicultural Education)도 이런 노력 중 하나이다. 특정 인종이나 문화가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고, 교류를 통해 공존을 모색하자는 취지이다. 미국의 어린이들은 작은 교실 파티에서부터 교내 인터내셔널 이벤트, 동네의 거리 축제에 이르기까지 문화 장벽을 낮출 수 있는 즐거운 경험들을 쌓아간다.

다양한 문화를 자연스레 접하는 아이들
▲ 세인트 페트릭스 파티중인 초등학교 교실 미국의 초중고 공립학교에는 '연합 그리고 다양성'에 관련된 이벤트가 다양하게 열린다. 아일랜드 민속 '세인트 패트릭스데이'를 맞아 초록색 옷을 입고 레프리칸 요정을 잡는 덫을 만드는 등 클래스 파티를 즐기고 있다.
ⓒ 장소영
미국 전역을 초록색으로 물들이는 세인트 패트릭스데이(St. Patrick's Day: 아일랜드의 절기) 처럼 이미 토착화된 연례 민속 축제도 있고, 일정 지역에서 주로 열리는 절기도 있다. 생소했던 디왈리(Diwali: 인도의 절기), 로슈 하샤나(Rosh Hashanah: 유대인의 절기)도 뉴욕으로 이사한 후 알게 되었고, 공립 학교는 이런 절기를 고려해 학사 일정을 계획한다. 우리의 '음력설(Lunar New Year day)' 또한 2023년 뉴욕주지사의 승인을 받아, 2025년부터 음력설 하루를 명절 휴교(Holiday Break)하고 있다.
▲ 인터내셔널 데이 - 문화 축제 (Culture Fest) 미국의 공립학교에서는 인터내셔날 데이 혹은 비슷한 이름으로 각자가 뿌리를 둔 문화를 소개하고 즐기는 행사가 열린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이를 확장시켜 매년 국제 문화 주간에 학생회와 클럽 학생들이 팀을 나누고, 약 20개국의 부스를 만들어 각국의 문화 체험을 하고 있다.
ⓒ 장소영
사적인 교류를 통한 즐거운 경험은 더 잦다. 우리 아이들은 유대계 친구의 성년식에 한 번씩 초대를 받았다. 전통 방식으로 성년식 '미츠바'를 치르고 나면 뒤풀이처럼 유대인이 아닌 친구도 불러서 함께 생일 파티를 즐기는 가정들이 있다. 초대를 받으면 그들의 전통에 따라 13의 배수로 맞춘 축하금을 준비하고 드레스코드를 따라 옷차림에도 신경을 썼다.

친구들의 생일 파티는 어쩌면 가장 훌륭한 다문화 체험 장소였던 듯싶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부모와 어른들 틈에서 다양한 언어를 만나고, 민속 음식을 먹고, 독특한 놀이와 축하의 방법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네 도서관도 다양성과 다문화 체험의 훌륭한 플랫폼 역할을 한다. 지난 2월 음력설(Lunar New Year)이 다가올 무렵, 동네 도서관 사서 한 분이 나를 불렀다.

"미세스 챙, 그거 알아? 우리 도서관, 상갓집 될 뻔했어!"

새로 주문한 장식용 종이 램프를 도서관 여기저기 걸고 있는데 한 아시아계 여성이 와서 이건 축제의 램프가 아니라고 귀뜀해 주더란다. 도서관 사서분이 보여준 사진에는 조(弔)라고 쓰여진 하얀 조등(弔燈)이 있었다. '곧 은퇴인데, (아직도) 알아야 할 것이 많다'며 사서분은 유쾌하게 웃으셨다.
▲ 동네 도서관의 음력설 장식 2월이면 중국과 한국의 청사초롱이 걸리고 작은 규모의 전시도 있다. 올해에는 중국 사자 탈춤과 가족이 참여하는 공작 교실이 열렸다.
ⓒ 장소영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동네는 인도계와 무슬림, 시크교도로 보이는 이웃들이 부쩍 늘었다. 10여 년 전 이사를 올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히잡(Hijab) 스카프를 두른 학생과 교사들을 초중고 교정에서 흔히 만난다. 가까운 작은 몰에는 인도와 할랄 푸드를 취급하는 식당과 관련 가게들이 차근차근 들어서고 있다. 아이 학원 옆의 정육점은 기도 시간이면 문을 닫고 직원들이 함께 기도한다. 종교 시설과 전통 카페는 일반 주민들의 접근성이 떨어지지만, 퓨전 레스토랑과 모던 카페는 소문난 맛집이어서 평도 좋고 찾는 이가 많다.

지난 3월, 아이를 픽업해 오는 길에 모던 카페 M에 들러보았다. 엠파나다(Empanada-만두처럼 생긴 남미 요리)를 하나 주문하고 커피와 어울릴 만한 다른 메뉴는 없을까 베이커리 세션을 살펴보는데, 줄 서 있던 손님 한 분이 "이 집 대추야자(Dates)는 다 진짜"라면서 괜찮으면 예멘 차이(Yemen Chai)와 먹어보라고 추천해 주었다.

옆자리에는 그룹 스터디를 하고 있던 동북 아시안계 학생들이 있었다. "넓은 테이블과 와이파이 시설이 좋고, 색다른 분위기가 좋아서" 카페에 자주 온다고들 한다. 벽그림과 글이 무슨 뜻인지 아냐고 물어보자 한 학생이 핸드폰으로 번역해 보더니 "이해와 교류에 대한 내용이네요"하고 별스럽지 않게 대답했다.

카페를 나서는데 내게 대추야자 디저트를 추천해 주었던 분이 강아지와 함께 야외 테이블에 앉아 계셨다. "라마단이 끝나가네, 평화를 희망한다"라고 인사를 건네자 나를 잠시 바라보시더니, "자주 와, (그보다) 좋은 길은 없지"라고 답했다. 그리고 커피 좋아하면 가보라며 튀르키예 커피(Turkish Coffee)를 마실 수 있는 카페를 알려주셨다.

'공존'의 가치, 언제쯤 되찾을 수 있을까
▲ 모던 카페 M 독특한 인테리어와 착한 가격의 먹거리, 무엇보다 인터넷 시설이 좋아 청년들의 핫플이자 동네 맛집이다. 벽면에 쓰인 글은 '신이 남자와 여자, 서로 다른 민족과 부족을 만든 것은 (반복과 갈등이 아니라) 서로 교류하고 알게 하기 위함'이라는 쿠란을 인용하였다. 카페에서 일하는 바리스타는 본인도 무슬림이 아니라며 '환영의 뜻'이라고 설명해줬다. 이곳은 유럽식, 남미식 디저트와 현대식으로 바꾼 중동의 음료와 간식을 두루 판매하는 모던 카페이다.
ⓒ 장소영
그런데 작은 문제가 생겼다. 평소처럼 개인 SNS에 대추야자 쿠키 사진과 함께 "음료는 내게 향이 강했지만 쿠키는 맛있었다"라는 게시물을 올렸다. 처음엔 가까운 지인에게, 그 다음엔 알고리즘을 탔는지 낯선 이들에게 '할랄푸드점에 왜 갔느냐'는 질타의 댓글을 받았다.

그곳은 일반 카페였고, 사실 나는 아이 픽업길에 이웃들이 별일 없이 평안한지 둘러보러 간 것이었지만 해명을 멈췄다. 그분들의 신앙심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유대인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코셔 푸드(유대교 율법에 따라 만든 음식)를 먹는 것은 괜찮고, 중동에서 온 차를 마시는 건 곤란한 걸까. 잡다한 생각이 머리를 맴돌다가, 갈등을 물려주고 장벽을 높이는 건 어른들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씁쓸해졌다.

얼마 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과의 전쟁을 두고 "오늘 밤 한 문명 전체가 사라져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강경 발언을 했다.

그동안 트럼프 행정부는 다양성 수용 정책(DEI)을 철회하고, 대학을 비롯 교육기관에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해왔다. 미국 보수층 사이에는 '트레드와이프(Traditional과 Wife의 합성어)'처럼 이전 세대의 성역할과 전통적인 가치관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번지는 중이다. 그동안 DEI와 페미니즘, PC(정치적 올바름)로 쌓였던 피로감에 대한 반목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민의 나라 미국은, 서로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배려와 교류를 통해 평화롭게 살아가는 '공존의 미'를 다시 세계에 수출하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

뮤지컬 <해밀턴>에서 조지 3세는 왕정이 아닌 대통령제를 선택한 미국을 조롱하며 '그 다음은 뭐지(What comes next?)'라고 묻는다. 나라 안팎의 혼란이 가라앉을 때쯤, 미국은 어떤 방향을 선택해서 나아갈까. 극단에 서 있는 가치의 충돌을 잠재우고 지혜롭게 균형을 맞춰갈, '왕보다 나은 대통령과 지도자'들을 선출할 수 있을까. 11월에 있을 중간 선거가 기다려진다.
▲ 마당 앞에 세운 푯말 'Dump King TRUMP'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잡다한 말을 무분별하게 쏟아내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조롱으로 보인다.
ⓒ 장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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