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진 관치의 역설…발담근 그들만 행복, 비용은 모두의 몫 [더롱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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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롱뷰(The Long View)’는 멀리 보고, 깊게 생각하는 독자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경제 이슈의 본질과 맥락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
돈을 빌릴 때의 가격은 신용과 위험도로 정해지는 법이다. 그런데 이 시장 원리가 부분적으로 멈춰섰다. 대출금리는 신용과 위험이 아닌 정책 의지에 순응해 움직이고 있다. 은행권이 정치 메시지에 반응하면서다.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의 신규 가계대출 금리를 신용점수별로 보자. 가장 최신 자료인 지난 2월 KB국민은행의 신용점수 600점 이하 차주의 평균 금리는 6.01%다. 601~650점 구간(6.56%)보다 낮다. 신한은행도 601~650점에선 6.72%였으나, 600점 이하엔 더 낮은 6.01%를 적용했다.

신용점수가 높을수록 상환 능력이 좋다는 뜻이므로 낮은 금리를 적용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지난해 9월부터 은행권에선 금리 역전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왜 그때부터일까. 우연이 아니다. 어려운 서민층에 대한 금융 지원을 강조하는 정치권의 메시지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초우량 고객에게 조금 부담을 더 지워 어려운 사람들에게 좀 더 싸게 빌려주면 안 되나, 저소득 서민일수록 높은 금리를 부담하고 고소득층은 낮은 금리를 누린다….’
거꾸로 말해도 척 알아듣는 은행들은 즉각 ‘상생’이라는 깃발을 올렸다. 정책금융 상품을 중심으로 저신용자에 대한 금리를 낮췄다. 관련 대출액도 늘었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저신용자를 위한 ‘새희망홀씨 대출’은 2022년 2조3000억원에서 지난해 4조원으로 증가했다. 올해 목표치는 이보다 25% 이상 많은 5조1000억원이다. 반면에 가계대출 총량 규제의 영향으로 고신용자 금리는 낮추지 않았다.
신용점수 좋은데 이자 더 내고, 주담대가 '무담보'보다 금리 높아
신용이 낮고 리스크가 큰 곳에 외려 저금리를 적용하면 시장의 효율이 떨어진다. 이게 돌고 돌아 누군가에게 비용으로 전가된다. 물론 취지는 빚의 수렁에 허덕이는 취약계층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선의였을 것이다. 또 정치가 신용등급의 의미나 시장원리를 진짜 모르고 한 말도 아니었을 것이다.
신용점수는 소득이나 지위에 따른 게 아니다. 오랜 시간 약속을 얼마나 성실히 지켰는가를 수치화한 이력서다. 천하람 개혁신당 의원실에 따르면 소득 하위 30% 중에도 고신용자(신용점수 840점 이상)가 20만 명이 넘는다. 반대로 소득 상위 30% 중 신용점수가 664점 이하인 사람은 42만여 명이나 된다. 소득 하위 30%(33만여 명)보다 많다. 정치의 메시지와는 달리 소득 수준이 신용점수와 직결되지는 않는다.
금리의 이상한 역전은 또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2월 상호금융권이 신규 취급한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연 4.12%였다. 같은 달 은행의 고정형 주담대 금리는 연 4.3%를 기록했다. 안전성 높은 은행의 금리는 2금융권보다 낮아야 정상이지만 시장에선 거꾸로다. 금융당국이 가계대출을 억제하겠다며 은행권에 가산금리 인상을 압박한 탓이다. 이는 지난해 11월부터 지속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주거래 은행을 믿고 대출을 받은 소비자는 금리 역차별을 받는 셈이다.
이미 고공 비행 중이던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부동산 대책 차원의 대출규제로 인해 더 높아진 면이 있다. 지난 2월 신규 대출 금리는 평균 4.32%.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2.5%로 내린 지난해 5월(3.87%)에 비해 0.45%포인트 뛰었다. 3월엔 더 올랐을 것으로 보인다. 제자리 걸음을 한 기준금리와의 차이는 자꾸 벌어진다.
기업 대출금리와도 대비된다. 소수의 글로벌 대기업을 제외하곤 기업이 은행돈을 빌릴 때 담보가 확실한 개인 주담대보다 높은 이자를 낸다.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다. 국내에선 거꾸로 주담대 금리(4.32%)가 무담보·신용 위주의 기업 대출금리(2월 4.2%)보다 높아졌다. 지난해 10월 이후 계속 그렇다.
이 역시 창구 지도 영향이 크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당국 눈치에 가계대출 영업은 막혔다. 실적을 채우기 위해 기업 대출금리를 낮추며 출혈경쟁을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내집 마련을 위해 돈이 필요한 실수요자들은 상대적으로 무거운 이자를 부담할 판이다.
정치권 박수 받고, 은행은 돈 벌고…비용은 사회로 떠넘겨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은행들의 배를 불려줬다. 은행의 자금 조달 비용인 예금 금리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가계대출을 억제하라는 정부 방침에 금리를 높여 예금을 유치할 유인도 사라졌다. 대신 대출금리가 높아져 은행의 예대마진이 넉넉해진 것이다. 그 덕에 은행권은 기록적 수익을 냈고, 성과급 잔치를 벌였다.
공짜가 있을 리 없다. 인공지능(AI)·반도체 등 첨단산업 지원을 위해 추진되는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의 절반인 75조원을 금융권이 채워야 한다. 연체채권 정리를 위한 새도약기금에도 금융권 분담금이 들어간다. 여기에 보이스피싱 피해 전액 보상, 각종 상생·정책기금 출연 요구가 더해진다. 이미 은행 수익 1조원 초과분에 부과되는 교육세율은 0.5%에서 1%로 인상됐다. 4대 은행 기준으로 연간 수천억원대 추가 부담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된다.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지만, 결과가 좋다는 보장은 없다. 2021년 법정 최고금리를 20%로 내리자 대부업체들이 대출을 포기했고, 수십만 명의 취약계층이 불법 사금융으로 밀려났다. 영세 자영업자를 돕기 위해 금융당국이 카드 수수료를 내렸지만, 혜택이 좋은 '알짜카드'가 사라지고 연회비 상승, 무이자 할부 축소 등 소비자 혜택이 감소했다.
시장 원리의 탈선에 따른 부작용은 해외에도 많다. 미국 캘리포니아주가 주택보험료 인상을 막자 2023년께 보험사 10여 곳이 떠나거나 파산했다. 그 뒤 대형 산불로 전 재산을 잃고도 보상받지 못한 주민들이 속출했다. 프랑스에선 2022~2023년 금리 상승기에 법정 최고금리에 묶인 은행들이 역마진을 피해 대출을 중단하자 시장이 온통 얼어붙었다. 일본에서도 2006년 다중 채무자 보호를 위해 대출금리 상한을 29.1%에서 15~20%로 낮췄다. 대부업체들이 도산했고, 영세 사업자들은 제도권에서 밀려나 불법 사금융(야미킨)에 손을 벌려야 했다.
한국의 관치나 정치 금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새 정부의 어젠다에 따라 녹색금융, 창조금융 같은 낯선 개념이 계속 등장했다. 그에 맞춰진 신상품을 내놓고 대통령부터 은행장까지 ‘1호 가입자’라며 기념행사도 반복됐다. 시간이 흐르면 슬그머니 잊혀지거나 자취를 감추곤 했다. 진짜 수익성이 좋고 효율적이었다면 돈이 경쟁적으로 유입될 텐데, 그러지 않았다.
은행이 권력의 의중을 외면하는 건 중력을 거슬러 공중부양이라도 하려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럴 은행은 없다. 예전부터 그랬다. 기자들끼리 하는 말이지만, 한때 은행장 내정은 정치부가 먼저 알고, 퇴진은 사회부가 먼저 안다고 했다. 권력이 자리에 앉히고, 수사기관이 끄집어 내렸기에 나온 말이다. 그러니 은행은 권력 앞에서 몸을 움츠리는 게 체질화됐다. 외국인 주주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그들 역시 한국 금융이 시장 원리로만 돌아가진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투자하지 않았을까.
선의로 포장된 관치…'금융의 삼성전자'는 멀어진다
이번 관치가 시장 원리엔 어긋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융시장을 당장 불안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저신용자를 위한 저금리 대출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2560조원이 넘는 은행권 총대출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올해 희망홀씨대출 지원 목표를 다 채워도 전체의 0.2% 정도다. 부실 비율이 일반 대출에 비해 높긴 하지만, 은행들의 건전성 지표를 뒤흔들 규모는 아니다. 대출 증가세나 부실 비율을 감안해도 은행의 경영에 미칠 영향은 오차의 범위다. 은행도, 감독당국도 다 알고 장단을 맞추고 있다.
관치는 안주하기만 하면 달콤하다. 저신용자는 대출받아 좋고, 은행원은 성과급 챙겨 좋고, 행장은 권력에 잘 보여 좋고, 정치는 박수받아 좋다. 발을 담근 당사자들은 두루 눈에 보이는 이익을 얻어 간다. 보이지 않는 비용은 금융시장을 이용하는 전체 경제 주체에게 골고루 분산돼 전가된다. 집중된 편익과 분산된 비용이 이익의 사유화와 비용의 사회화로 완성된다. 경제학자 맨서 올슨의 집단행동이론에 딱 들어맞는 구조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선의로 포장된 관치는 반복되고, 이해 당사자들은 거리낌 없이 수용할 것이다.
여기에 하나만 인정하면 더 속 편하게 할 수도 있다. ‘금융의 삼성전자’를 키우겠다는 꿈을 접으면 된다. 현재 국제결제은행(BIS)이 선정한 40개 ‘글로벌 시스템 중요 은행(GSIB)’엔 한국계가 없다. 그래도 상관없으니 국내의 우물 안에서 서로 편하게 지내자고 솔직히 용인해 보라. 불편한 시장 원리나 골치 아픈 선진 금융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요즘 정부와 은행이 하는 걸 보면 진짜 그럴 것 같다.
손해용 경제산업기획부국장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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