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고민하지만 채찍질을 멈추는 타입은 아니야”

이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스물 몇 살 때쯤, 어느 기업의 임원을 만난 적이 있다. 명문대를 나와 노동운동으로 감옥까지 다녀왔다던 그는 90년대 후반 한껏 밀려오던 IT 기술에 새로운 희망을 걸었다. 복제와 유통의 비용이 제로에 가까운 인터넷을 이용한다면, 노동자의 부가가치를 착취하지 않고도 기업은 번창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분연히 벤처 열풍에 투신했고, 영민한 머리와 빠른 실행력으로 승승장구했다.
우리는 한때 유토피아를 꿈꾸던 이들의 꿈이 대체로 어디에 도달했는지 알고 있다. 술잔을 비우는 그는 고통스러워 보였다. 사업은 빠르게 성장했으나 이상하게도 그의 계산은 잘 맞지 않았다. 하나의 서비스를 수백만 명이 사용하는 시대, 서류 봉투를 들고 직접 거래처에 방문하는 대신 메일 한 통이면 충분한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노릇인지 IT 노동자들은 연일 야근을 해야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개발자들이 쓰러지지 않으려고 제 발로 병원에 가 링거 주사를 맞는다는 흉흉한 이야기가 돌던 시절이었다. 스물 몇 살 청년에게 예의 바른 말투로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는 중년의 임원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얼마 후 술자리에서 그 회사에 다니던 동창을 만난 나는 그 인상적인 임원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친구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분이 그런 고민을 하시는 건 회사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어. 하지만 채찍질을 멈추시는 타입은 아니야.
나는 당황했다. 그러면 울면서 막 때리는 거야? 그렇다고 봐야지. 우리 회사가 이 동네 등대잖아. 어두운 밤에 홀연히 사무실 불을 켜고 밤하늘을 지키는 IT 노동자들의 고독을 떠올릴 때쯤, 술에 얼큰히 취한 다른 선배가 끼어들었다. “야, 우리는 ‘황의 법칙’을 ‘황의 명령’이라고 부른다. 법칙이 뭐냐, 만유인력처럼 사과 던지면 그냥 땅에 떨어지는 거 아니냐? 우리가 무슨 요정처럼 사과 들고 포로롱 날아서….”
저 방정맞은 입에 벼락이라도 떨어지는 건 아닐까. “형, 알겠으니까 술이나 먹어.” 우리는 불안해하며 그의 입을 막았다. 그러게, 메모리반도체를 가만히 놔둔다고 해서 용량이 매년 두 배씩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노동자들이 그 ‘법칙’을 수호하기 위해 맹렬히 달렸을 것이고, 그 질주는 많은 이들의 자긍심이 되었겠지만 사실 ‘법칙’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의아한 구석이 있었다. 이를테면 그것은 명령문 대신 서술문을 사용하는 훈련소 조교들의 말투와 닮았다. “조용히 해” 대신에 “훈련병들 잡담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면 더 무섭게 들리므로.
오랜 시간이 지났다. 친구는 창업을 했고, 선배는 반도체 신문 기사에 종종 등장한다. 나는 대학에서 수업을 하다 가끔 그 술자리 이야기로 학생들을 웃긴다. “지금 왜 이 이야기를 할까요? 1번, 여러분들이 졸려 보여서. 2번, 강사의 갱년기 우울증 때문에.” 봄날의 햇빛 아래 킥킥 웃음소리가 난다.
“답은 3번. 의아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는 걸 말해주기 위해서. 지금 우리는 수많은 IT 기술을 사용해서 더 많은 일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느끼지만, 그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어요. 한때 IT 기술은 해방의 매개처럼 보이기도 했고, 기술 발전의 당위성을 농담으로라도 비틀어 말하는 이들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저 공기와 햇빛처럼 당연한 삶의 조건처럼 보이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지금의 세계가 자연법칙에 의한 당연한 결과물이 아니라는 걸 기억하기 위해서예요. 어쩌면 한 세대 후 여러분은 AI와 결합된 전쟁 기술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시대를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서 반드시 지금의 이 순간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계가 사람을 죽이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 세계는 다른 모습일 수도 있었다는 것. 그걸 배우기 위해서 우리는, 봄날 강의실에 앉아서 지난 세계의 이야기를 읽고 공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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