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 두 노인의 기묘한 동행

김형욱 2026. 4. 14.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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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레사마 공원에서>

[김형욱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레사마 공원, 한적한 한낮의 벤치에 안토니오가 앉아 신문을 읽고 있다. 하지만 그는 눈이 거의 멀었으니 그저 읽으려 애쓰고 있을 뿐이다. 그의 곁으로 레온이 다가와 앉더니 끝없이 이어질 말을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르완다 해방군 소속의 비밀 요원으로 위장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거짓말이었다. 다만, 86세 노인인 건 거짓말이 아닌 듯하다.

안토니오로서는 3년 전에 찾은 조용하고 편안한 자리인데, 일주일 전부터 웬 노인이 찾아와 온갖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방해하고 있다. 그는 관리인 보조로, 52년간 지하 보일러실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몇 번이나 결혼했는데 그때마다 바람을 피웠다는 말도 덧붙인다.

둘은 거짓말을 하고 적대하다가,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각자의 삶을 꺼내 놓는다. 함께 대마초를 피우며 과거로 돌아가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농담을 주고받기도 한다. 그런데 난데없이 안토니오가 직장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4개월 치 봉급의 위로금을 받아들이려던 찰나, 레온이 끼어드는데… 급진 공산주의 투사 출신이라는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또 어떤 거짓말을 늘어놓을까?

현실을 버티기 위한 상상과 거짓의 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레사마 공원에서>의 한 장면.
ⓒ 넷플릭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레사마 공원에서>는 독특하다. 공원에서 두 백발노인이 이야기를 나누고 소소한 사건에 얽히지만,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거짓말과 진실이 뒤섞여 있고, 그들이 얽히는 사건들 또한 사실 그들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깊숙이 개입했다가 결국 실패하고 만다.

문제는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함께 이른바 '정의'를 실현하려 하지만, 해결되는 것은 없고 몸만 다칠 뿐이다. 잔인한 현실에서 두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렇기에 레온이 끊임없이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는 현실이 아닌, 거짓의 세계로 도망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레온은 고백한다. 과거 한때 급진 공산주의 투사로 광장을 누볐지만, 이후 오랫동안 카페에서 웨이터로 일해 왔다고 말이다. '별 볼 일 없는 삶'이었다고도 덧붙인다. 하지만 안토니오는 믿지 못한다, 아니 믿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레온은 다시 과거의 무용담을 거짓으로 덧칠하며 다른 세계로 훌쩍 떠나 버린다.

레온은 또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상상의 세계가 현실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상상력이 필요하지만, 그 반대는 무의미하다. 결국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살기 위해서는 충분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레온은 거짓말로 그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다.

사라진 존재들의 투쟁, 그리고 노인의 미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레사마 공원에서> 포스터.
ⓒ 넷플릭스
두 노인의 대화를 듣고 그들이 함께하는 사건들을 들여다보면, 노인에게도 '미래'가 존재하는 듯하다. 더 이상 인생이 짧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길다는 것이 문제다. 그런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두 노인은 그런 대우를 그냥 넘기지 않고 맞서 싸운다. 바로 그 지점이 노인의 미래인 것이다.

그와 동시에 노인의 피할 수 없는 현실도 드러난다. 레온은 말한다. "우린 둘 다 유령이야, 오히려 현실이 꿈 같아." 투명 인간처럼 취급 당하고,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현실이다. 그때 두 사람의 태도는 정반대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보살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그들 자신은 잘 모르지만 함께일 때 더 강해진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그들이 바랐던 모습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레온은 거짓말을 멈추고 진실을 말하기 시작한다. 그의 거짓말은 잔인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였으니까. 안토니오 또한 나약함을 벗어 던지고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낸다. 그의 나약함 역시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 듯하지만 본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쓰러지는 법과 물러서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처럼. 더 나은 대가를 위해 바쁘게 살아가야 하지만,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서는 옛 방식의 싸움, 이른바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처럼. 레사마 공원에서 두 노인이 한적하게 나누는 이야기는, 그래서 결코 가볍지 않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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