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삼성의 라인은 돌아가야 한다

삼성전자는 지난 반세기 동안 ‘무노조 경영’이라는 특유의 토양 위에서 성장했다. 이는 단순히 노조를 금기시하는 차원을 넘어 삼성 조직을 지탱해온 핵심 경영 철학이었다. 고(故) 이병철 창업주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 된다”며 확고한 ‘반(反)노조’ 원칙을 고수했다. 단순한 경영자의 고집이라기 보다, 노사 갈등으로 인해 국가 발전을 위한 기업 경영에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사업보국’ 신념의 발로였다는 게 삼성의 설명이다.
고 이건희 선대회장 역시 이 원칙을 계승했다. 그는 “유능한 경영자는 노조가 필요 없도록 경영하는 사람”이라며 노조의 필요성 자체를 선제적으로 차단하고자 했다. 업계 최고 수준의 임금과 복지, 노사협의회 활성화 등 내부 시스템을 통해 직원들의 불만을 흡수하는 방식이었다. 이른바 ‘관리의 삼성’이 노사 분야에서도 정교한 매뉴얼로 작동한 것이다.
삼성 노사 관계가 대전환점을 맞은 건 이재용 회장 체제에 들어서다. 이 회장은 2022년 5월 대국민 사과와 함께 무노조 원칙의 종언을 선언했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노조 와해 문건’의 실체가 드러나 고위 임원들이 줄줄이 처벌받는 지경에 이른 게 결정적이었다. 여기에 애사심과 국가 발전 논리를 앞세운 ‘톱다운(Top-down)’ 경영이 젊은 세대의 실리주의와 충돌하면서 더 이상 노조 없는 삼성 체제를 유지하기 어려운 임계점에 도달한 결과였다.
물꼬가 터지자 여러 노조가 기다렸다는 듯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2024년 창사 55년 만의 첫 총파업에 이어 2026년 현재 또 한 번 서늘한 파업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양상은 2년 전보다 더욱 파괴적이다. 삼성전자 3개 노조가 결합한 공동투쟁본부는 이미 93.1%의 압도적 찬성률로 쟁위 행위를 가결하고 5월 총파업을 예고한 상태다.
사측은 실적 1위 달성 시 경쟁사 이상의 성과급 지급, 6.2% 임금 인상, 주거 안정 지원 등 파격적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노조는 초과이익성과급(OPI) 상한 폐지와 영업이익 15%의 성과급 재원 활용 등을 요구하며 대치하고 있다. 실적이 좋을 때 최대한 보상을 받겠다는 노조 측 인식도 일견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다만 평균 연봉 1억5800만원 근로자들이 요구하는 ‘이익 배분 극대화’가 과연 국가 기간산업의 생산라인을 멈춰 세워야 할 만큼 절박한 사안인지에 대해서는 국민적 공감대를 얻기 어렵다.
반도체 공장은 1초의 공백도 허용치 않도록 설계돼 있다. 라인이 멈추는 순간 공정 중인 제품은 전량 폐기물로 변하며, 다시 가동된다 해도 장비 재세팅과 수천 개의 공정 점검에만 수주가 걸린다. 지난 2018년 삼성전자 평택 공장에서 일어난 단 28분간의 정전으로 수백억원 손실이 났던 사례는 라인 중단의 치명성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더 큰 재앙은 고객사와의 신뢰 붕괴다. 엔비디아를 비롯한 글로벌 빅테크들에 반도체 공급사는 가장 안정적이어야 할 파트너다. ‘파업 리스크’를 안고 있는 기업은 언제든 공급망에서 잘라낼 수 있는 대상이 된다. 그간 삼성전자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얼마나 절치부심해 왔던가. “더 많이 달라”며 택한 극단적 수단이 한순간 자신들의 생존 터전을 훼손하는 부메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삼성전자는 일개 기업을 넘어 우리 경제의 버팀목이다. 한국 수출의 약 20%를 차지하는 삼성의 생산라인이 멈추면 국가 신용과 성장 동력의 근간이 흔들리고, 그 여파는 환율과 물가 등 민생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젊은 직원들에게 선대의 ‘사업보국’ 논리는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나, 최소한 삼성전자 구성원들이 한국 경제에 민폐를 끼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오늘날의 삼성이 있기까지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국민적 성원이 뒷받침됐음을 부정할 순 없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젓는 것은 상식이지만, 앞뒤 재지 않는 노질은 자칫 배를 뒤집을 뿐이다. 파국을 향해 구르는 바퀴를 멈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호일 산업1부장 blue5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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