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미루고 연 국회의원 강연에, 학생들 "집어치워라"... 충북 4·19의 시작

박만순 2026. 4. 13.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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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기억여행 1945~1960 37화] 1960년 3·15 부정선거 규탄, 충북지역 4·19혁명의 기록

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기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웬 강연회?"
"국회의원 강연회랴."
"뭐?!"

여기저기서 고성이 오갔다. 그도 그럴 것이 시험 날에 강연회라니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반응이었다. 학생들의 반응을 눈치챈 교장이 시험 1교시를 다음 날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국회의원 강연을 듣기 위해 충주고 학생 전원이 학교 강당에 모인 것은 1960년 3월 10일이었다.

시험을 다음 날로 연기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의장은 하늘에서 내려준 민족의 지도자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반드시 이승만 각하와 이기붕 의장을~"

"집어쳐라!"

야유와 함성으로 강연이 중단되었다. 시험을 연기하면서까지 연 강연회였지만, 정작 내용이 이승만·이기붕 후보 홍보로 이어지자 학생들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

이날의 강연자 홍병각(1909년생)은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충주시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된 인물이다. 현직 국회의원이 충주고등학교 시험일에 정치강연회를 열고 여당 정·부통령 선거운동을 한 셈이다.

윤한상 주도로 학생들은 홍 의원에게 "집어치워라"고 외치며 강당에서 퇴장했다. 300여 명의 학생들은 오후 1시경 교문을 나와 "학생을 정치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민주주의를 쟁취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내를 행진했다.

학생들은 성서동에 있는 민주당 충주시당 앞으로 몰려가 약 20분간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했다. 그곳에서부터 버스정류장을 거쳐 한일양조장 앞까지 약 1.5km를 행진했을 때, 경찰대와 마주쳤다. 학생들은 경찰의 곤봉 세례를 받았고 대열은 흐트러졌다.

이날은 충주 장날이었는데, 시위대가 도망치는 과정에서 장터의 채소와 물건들이 훼손되었음에도 상인들은 학생들을 응원했다. 시위대는 오후 3시 30분경 해산되었다. 25명이 경찰에 연행됐고, 이후 주모자 4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석방됐다.

이날 사건은 충북의 4.19 시위로 이어지는 초기 흐름으로, 학원을 정치 도구화하려는 자유당과 학교 당국의 시도에 맞선 충주고와 충주여고 학생들의 저항으로 시작됐다.
 4.19 희생 학생 위령제
ⓒ 충청북도
당근과 채찍

4.19 당시 청주 지역 학생들이 내건 구호 중 가장 많았던 것은 "학원을 정치 도구화하지 말라"였다. 그만큼 집권 여당은 학생들을 각종 집회에 강제로 동원했다.

정부는 학생들을 반공주의로 무장시키고 준군사조직으로 재편하기 위해 학도호국단을 조직했다. 학도호국단은 각 학교별로 운영위원회와 군사훈련 조직체계(연대장-대대장-중대장)로 이원화되어 있었다.

운영위원회는 학생들의 전체 직접투표로 운영위원장을 선출하고, 부위원장은 대의원들이 선출했다. 각 부서장은 운영위원장이 임명하고 대의원대회 인준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학도호국단은 학생들의 자치조직으로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정부 여당의 각종 집회에 동원되었다. 1950년대 내내 이승만 대통령 생일행사에는 청주 시내 전교생이 동원되었고, 청주여중생들은 '대통령 찬가'와 '대통령의 노래'를 불렀다.

1955년 8월 16일에는 적성감시위원단 축출 궐기대회에 '8.15 감격으로 북진통일 이룩하자'는 플랜카드를 들고 동원되었다. 1959년 2월 26일에는 재일조선인 북송 반대 시위에 청주 시내 초·중·고생 1만여 명이 동원되어 중앙공원에서 집회를 갖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자유당과 학교 당국은 학생들의 정치적 관심을 차단하는 동시에 취업 등을 미끼로 학도호국단 간부들을 회유하기도 했다.

당근과 채찍은 시민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당시 대통령선거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대단했다. 3월 7일 자유당 청주 유세에는 3만여 명, 8일 충주 유세에는 2만여 명이 참여했다. 3월 9일 민주당 유세에는 사찰과 형사가 유세장인 청주공고 주변을 둘러싸 참여 시민들을 위협하고 감시했다.

이날 청주시와 청주경찰서는 시민들이 민주당 유세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각 동장을 통해 시민들에게 극장 무료상영권을 배부해 말썽을 빚기도 했다(<충북신보> 1960.3.12).

청주역전에서 대치

학원을 정치 도구화하려는 시도에 맞선 청주 지역 학생들의 저항은 3.15 투표일 이전부터 시작됐다. 3월 12일 청주 시내 각 고등학교 학생 여러 명이 모의해 13일 시위를 계획했으나, 청주농고를 제외한 나머지 학교는 사전에 제지되었다.

청주농고에서는 3학년 2반 강병웅 군 외 여러 명이 삐라를 등사하며 시위를 준비했다. 학생 50여 명은 조회를 마치고 "학원의 관권 침투를 배격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정문을 나섰으나, 정보를 입수한 경찰대의 출동으로 시위대는 분산되었다. 시위대는 우암산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무장경관의 포위로 시위는 무산되었다.
 당산에서 열린 청주농고생들의 연좌 농성. 경찰들이 학생들을 에워싸고 있다.
ⓒ 청주농고
3월 14일에도 청주 시내 교동초등학교 앞에서 일부 고교 1, 2년생 50여 명이 집결했으나 학교 교사와 경찰의 경비 강화로 좌절되고 말았다.

전국적으로 부정선거 항의 시위가 확산되자 이승만 정권은 관제 데모로 맞불을 놓았다. 3월 13일 전국대학생 구국총연맹과 국정연구회는 학생들이 시청 앞, 미도파백화점 앞, 미국대사관 앞 등 도심에서 시위할 때 "자유당의 이 박사와 이기붕 의장을 지지한다"는 플래카드를 두른 가두 선전차를 타고 "학생들은 자중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한편 충북에서는 세광고가 경찰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 관제 데모를 전개했다. 3월 11일 오후 6시경부터 약 40분간 세광고생 100여 명은 청주 시내에서 "민주당은 학생을 정치 도구화하지 말라", "학원에 자유를 달라" 등의 구호가 적힌 삐라를 살포하며 시위를 벌였다. 기독교계 학교인 세광고등학교 학생들은 남문로 1가 청주약국 인근에서 데모를 감행했다.

이들은 "학도는 민주당의 앞잡이가 아니다", "학도는 배움에 힘쓰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날의 시위와 관련해 <한국일보>는 세광고만이 아니라 청주공고를 비롯한 여러 개의 학교가 공동으로 집행한 것으로 보도했다.

4월 15일 청주공고 교내 이발관에 오성섭, 최무웅과 7개 과대표 등 총 9명이 모였다. 이들은 이발관 옆 무심천 둑으로 장소를 옮겨 4월 16일 청주역전 광장에서 시위를 하기로 결의했다. 4월 16일 낮 12시경 공고생 200여 명은 100여 명의 경찰과 대치하였다.

시위대는 청주역전에서 중앙시장 앞을 지나 북문로 2가 충북산업사 앞까지 약 200미터를 구보로 행진했다. 갑자기 대형 트럭이 앞을 막았고, 무장한 경찰들이 트럭에서 쏟아져 나왔다. 학교 교사들도 학생 해산에 동원되었다. 대열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4월 17일 중앙공원에서 다시 시위를 벌이기로 했으나 기마경찰대가 공원을 에워싸면서 시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청주 최초의 연합시위

학생들은 고립·분산적인 시위가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청주에서 연합 시위가 이루어진 것은 4월 18일이었다. 25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시위는 청주라는 중소도시에서 보기 드문 대규모 시위였다.
▲ 청주시 고등학교 현황 1960년 당시 청주고등학교 현황
ⓒ 충청북도교육청
4월 18일 청주고 학생 이래필, 이한우, 우원기 등은 아침 교무 조회 시간을 틈타 각 교실로 향했다. 그리고 전교생을 운동장에 집결시켰다. 운동장에 모인 뒤 이한우, 이상규가 교단에 서서 "3.15 부정선거 규탄한다"라고 구호를 외쳤다.

오전 9시경 200여 명의 학생들은 "부정선거 규탄", "학원 자유 보장" 등을 외치며 행진해 중앙시장 앞까지 진출했다. 출동한 기마경찰대는 학생 시위대를 휘저으며 해산시켰다. 이에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주동자급 3학년 학생들은 당산으로 피신해 숨었다.

청주공고에는 아침부터 사복 경찰과 기마병들이 학교 주변에 배치되었다. 3교시가 끝난 후 "궐기하러 나가자"는 소리와 함께 전교생이 운동장으로 나왔다.

낮 12시경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의 노래를 부르며 "마산사건에 경찰은 책임져라"라고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다. 연락조는 청주여고, 농업고, 청주고 등으로 발 빠르게 이동했다. 1000여 명에 가까운 시위대는 북문로를 지나 청주여고로 향했다. 이들은 돌멩이를 주머니와 양손에 쥔 채 함성을 지르며 행진했다.

시위대가 교동초등학교를 경유해 주성중학교에 이르렀을 때, 기마대가 시위대의 후미를 갈라놓았다. 전방에 있던 대다수 학생들은 청주상고 쪽으로 향했다. 곤봉으로 맞고 발길에 채이면서도 흩어지지 않고 5~6명씩 어깨를 낀 채 앞으로 나아갔다.

청주상고 운영위원장 신광호는 방송실로 가서 학생들에게 운동장으로 집결하라고 방송했다. 약 1400명의 학생들이 공고생 1000명과 함께 운동장에 합류했을 때 경찰이 포위했고, 기마대가 사격 자세로 운동장을 둘러쌌다. 문학동 충청북도경찰국장이 시위 자제를 호소했으나, 학생들이 던진 돌에 입술이 터지기도 했다.

쇠스랑 들고 시위 나서
▲ 가두시위 농기구를 손에 쥐고 가두 시위하는 청주농고생들
ⓒ 청주농고
청주농고생 500여 명은 4월 19일 오전 9시 조회를 마친 후 "학원에 자유를 달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시작했다. 운동장에 집합한 학생들 가운데 누군가가 "농기구 창고에 가서 농기구 1개씩 가지고 모여라"라고 외쳤다. 이들은 삽, 괭이 등의 농기구를 들고 운동장으로 모였다.

농기구를 내려놓고 가라는 교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교문을 나섰다. 전교생은 서쪽 샛길을 택해 철로로 이동했고, 신발주머니와 호주머니에 돌을 가득 채웠다.

청주대학교에서는 이종현이 학생과로 가서 "전교생은 학교 강당으로 모이라"는 방송을 했고, 오세억, 박종희, 박상기 등이 학생들을 소집했다. 오전 11시경 350여 명의 학생들이 강당에 집결했다.

이들은 김현수(총무부장)와 박종희(부 운영위원장)의 연설을 들은 뒤 낮 12시경 정문으로 진출했다. 시위대는 "3.15 부정선거를 다시 하자", "연행된 학생을 즉시 석방하라", "마산사건 관련 경찰을 처벌하라" 등 5개 구호를 내걸었다.

시위의 맨 앞 대열에는 오세억, 박종희, 박신평, 이종현, 권인식, 오세철, 심만보 등이 있었고, 뒤따르는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대오를 형성했다. 박영수 청주대 신문사 편집국장은 이정규 학장의 취재 격려 속에 시위 대열을 따라 전 과정을 취재했다.

시위대는 청주방직(현 청주시 상당구청 자리) 앞에서 경찰과 대치했으나 규율부와 운동선수들이 중심이 되어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했다. 외덕교회(현 우암교회)에 이르렀을 때 경찰과 기마대가 앞을 가로막았다. 경찰은 최루탄과 붉은 물이 섞인 물대포를 쏘고, 진압봉으로 학생들을 구타하며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투석전이 전개됐고 부상자가 발생했다.

오후 2시경 세광고 학생 200여 명은 수업 도중 교문을 박차고 나와 시위를 시작했다. "학원의 자유를 간섭하지 말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학교를 출발했다. 공원 뒷산을 넘어 도지사 관사 앞을 지나 북문로 3가로 향했다. 시위대가 상고에 이르렀을 때 경찰이 출동했다. 이날 시위로 총 120명이 연행됐으며, 이들은 오후 5시경 모두 석방됐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지역에서의 4월혁명>,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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