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영친왕 관저에 남북 좌우 인사까지 드나든 이유

김종성 2026. 4. 13.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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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21세기 대군부인>

[김종성 기자]

가상의 한국 왕실을 다루는 MBC <21세기 대군부인>에는 의례적으로나마 왕실을 떠받들며 살아가는 입헌군주제 국가가 등장한다. 주인공인 이안대군(변우석 분)이 여덟 살짜리 임금인 어린 조카의 섭정이 되어 왕실을 이끌어가는 모습이 드라마에서 묘사된다.
 MBC <21세기 대군부인> 관련 이미지.
ⓒ MBC
이안대군의 섭정은 조선시대식 섭정은 아니다. 10일 제1회에서 그는 자신을 의심 어린 눈치로 경계하는 윤 대비(공승연 분)에게 "섭정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라며 "정치는 정치인들이 하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그런 뒤 "왕실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라고 강조한다. 이 드라마 속의 왕실은 국민적 주목은 받지만 정치적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실제의 대한제국 황족 후예들은 의례적으로라도 황실을 복원시키고 싶어 했다. 이런 움직임은 영친왕의 부인인 이방자가 작고(1989.4.30.)한 뒤에 두드러졌다. 대한제국 황제가 일제 강점과 함께 이왕(李王)으로 격하된 지 16년 뒤인 1926년, 전직 황태자인 영친왕이 순종에 이어 제2대 이왕이 됐다. 이때 이왕비가 된 이방자가 세상을 떠나자,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아들인 이석을 중심으로 그런 분위기가 형성됐다. 1994년 10월 17일자 <조선일보> 31면의 설명이다.

"황실 복원 움직임은 지난 89년 영친왕비인 이방자 여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석 씨가 미국에서 귀국하면서부터 일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은 국민을, 국민은 대한제국을 저버린 일이 없다. 대한제국 또한 공식적으로 문을 닫은 적이 없다. 오직 일제가 강점, 서류를 위조했을 뿐'이라는 비분강개가 후손들 간에 인 것이다."

이석은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라는 가사가 담긴 '비둘기집'의 가수다. 한동안은 그가 텔레비전에 자주 등장했다. 1991년 11월 8일자 <경향신문> 24면은 "왕자가수로서 70년대 초 '비둘기집'을 히트시켰던 그가 지난달부터 가요초대석의 MC를 맡으면서 구수한 입담을 들려주고 있다"고 전했다.

드라마 속의 이안대군처럼은 아닐지라도, 1990년대 초반에 이석의 공개 활동은 활발했다. 이 시기에 황족 후예들도 황실 복원을 향한 의욕을 강하게 표출했다. 이들의 목표는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대한제국 복원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황실 복원을 위한 밑그림까지는 마련했다. 황실 사무처인 종정부도 복원시키고, 서양식 연호가 아닌 대한제국 마지막 연호도 사용했다. 위 1994년 보도의 일부다.

"이들은 이미 대한황실 종정부를 구성, 황실 교지를 내리고 있고, '서기 1994년' 대신 '융희 87년'이란 연호를 쓰고 있다. 대한황실 종정부의 총재는 이경길(의친왕의 여덟 번째 아들) 황손, 노래하는 황손으로 알려진 가수 이석 씨(54)가 총재직무대리를 맡고 있다. 황실 종정부는 '대한제국 황실은 지금도 확실히 살아 있습니다', '뭉치자 우리 국민! 일으키자 우리 황실!'이라는 전단까지 제작했다. 입헌군주 내각책임제를 통해 황실 복원을 실현시키겠다는 것이 이들의 '꿈 같은 꿈'이다."

그런데 이 시기는 1987년 6월항쟁 이후의 한국 사회가 민주화를 향해 한창 나아갈 때였다. 그래서 황실복원 운동은 대중의 관심은 끌 수 있어도 사회적 공감까지는 얻기가 어려웠다.

해방 직후에는 그런 복원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널리 알려져 있었고 어느 정도의 지지는 받았지만, 국내에 대한 영향력이 확고부동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정부 기능을 수행한 미군정은 민주주의를 표방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황실 복원의 결정적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전범인 일본 왕실을 존속시킨 데서도 나타나듯이 미군정의 민주주의는 미국의 국익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서는 대한제국 황실 후예들도 미국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1910년에 소멸된 것은 대한제국이지 대한제국 황실이 아니다. 황실은 '이(李)왕실'이라는 격하된 형태로 살아남았고, 일제지배하에서 순종과 영친왕이 이왕 자리에 있었다. 이 상태가 8·15 때도 유지됐으므로 이왕실이 황실로 복원될 여지가 약간이나마 남아 있었다.

도쿄 영친왕 관저 방문객 숫자의 의미
 MBC <21세기 대군부인> 관련 이미지.
ⓒ MBC
그것에 대한 기대감을 보여주는 것이 도쿄 영친왕 관저의 방문객 숫자다. 황실 전문가인 김을한(1905~1992) 기자의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도쿄 영친왕저에는 방문객이 빈번했다"고 말한다.

방문객 중에는 세력화를 도모하는 이들도 있었다. 위 책은 "그중에는 조총련의 김천해와 민단의 박열도 있었다"고 한 뒤 "두 사람 모두 영친왕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라며 "그들은 사전에 의논이나 한 듯 한결같이 영친왕을 최고 고문으로 추대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친왕은 나서기를 꺼려 했다. 한동안 귀국을 생각했던 그는 국내 상황을 지켜보면서 그 생각을 접었다. 위 책의 설명이다.

"본국에서는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됨으로써 38도선은 더 한층 굳어지고 그 사이 송진우·장덕수·여운형·김구 등 여러 지도자가 연이어 암살되었다. 한때는 곧 환국을 할까 하던 영친왕도 이런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는 절대로 귀국하지 않을 것이며, 좌든 우든 정치적 운동에는 일체 관계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주 이씨인 이승만의 움직임도 황족 후예들에게 불리했다. 충녕대군에 밀려 세자 폐위를 당한 양녕대군의 16대손인 이승만은 왕실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청년 이승만이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독립협회에 참여한 일은 다른 시각에서 보면 충녕대군 후예들의 힘을 빼놓기 위한 시도였다.

그런 이승만이 해방 뒤에 황족 출신들을 견제했다. 이방자는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에서 자신과 남편이 1947년 10월 18일 평민으로 강등된 일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회고했다.

"1947년 10월 18일 왕족들은 신적강하(臣籍降下)를 당했다. 왕족이라는 구름 위에서 모두 평민으로 지상에 내려선 것이다. 이날을 기해 이은과 이방자 여사라는 평민이 된 외국인인 우리들은 일본 정부와의 모든 관계가 끊겼고, 한국의 이승만 씨도 우리에게는 냉정했다."

황실 복원 가능성이 약간이나마 있었던 해방정국이 그렇게 흘러간 뒤, 1990년대 초반에 위와 같은 철 지난 복원운동이 있었다. 1990년대에는 황실 후예들의 의욕은 컸지만, 이 시기는 그런 일을 할 때가 아니었다. "왕실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라는 이안대군의 말이 어울리는 시기였다.

황실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해방 직후에도 활력이 있었고 미군정의 지지도 받았다면, 왕실 복원을 위한 유력한 시도가 해방 후에 꿈틀거렸을 수도 있다. 이때 복원 운동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1990년대보다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회는 얼마 뒤 사라져, 1950년대부터는 황실 복원이 '꿈 같은 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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