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이미 폐허일지 몰라도, 이런 이들이 있다면
[김성호 기자]
노조 설립 시도 같은 비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워룸'을 만들고 24시간 상황 대기를 하고 소집 훈련도 이루어졌다. 노동조합 간부들과 노조에서 적극 활동하는 조합원들을 등급으로 나눠 일거수일투족을 사찰했다. 대기업에서 월급 받으며 동료들을 뒷조사하고 미행하고 짐을 뒤지는 사람들이 놀랍게도 있었다. 그것도 정말 많이. 가족 나들이와 병원 진료에도 미행이 붙었다. 대출 내역 등 금융 기록, 질병 기록도 털렸다. (중략) 그들이 '불온 단체' 딱지를 붙인 곳에 후원금이나 회비를 내는 임직원들은 문제 인력, 즉 'MJ'로 분류했다. 그룹 차원에서 감사 대상, 징계 대상이 선별 되었고, 길고 긴 법적 다툼 끝에 징계가 무효가 되면 재차 징계했다.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이 노조 설립 신고 동향을 실시간으로 S그룹에 전달했다. - 71, 72p
넓고 화창한 벌판에도 폐허가 있음을 깨닫는다. 가까운 언니와 청계천이 보이는 호프 테라스 자리에서 낮맥을 마시던 박다혜 변호사도 문득 그 폐허를 본다. "너 진짜 밤길 안 무서워?" 하고 묻는 언니의 물음으로부터다. 기업의 폭압적 노사전략에 맞서 노동자를 변호하는 소송을 수행해온 그녀의 글은 수많은 전선에서 고단한 싸움 끝에 겨우 얻어낸 승리가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무력화되는가를 알린다.
시가총액 1위, 코스피6000 시대 같은 휘황찬란한 오늘을 지나는 한국에서 박 변호사는 스스로 건너온, 여전히 복구되지 않고 있는 폐허에 대해 쓴다. 수많은 전선에서 고단한 싸움 끝에 겨우 얻어낸 승리들과 그 승리로 얻은 것들이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사라지는지를 알린다.
'소송에서 지는 게 가장 무서운 일인 줄 알았다'던 그녀는 모든 소송에서 이겼음에도 모든 곳이 더 빠르게 폐허가 되어가는 광경을 보았다고 고백한다. 2013년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국회서 폭로한 '삼성그룹 노사 전략' 문건, 몇 년이나 방치되었던 사건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뇌물수수 의혹을 수사하던 중 다시 불거지며 드러난 진실, 그리고 기소와 승소까지의 이야기다. 세상에 알려진 일련의 이야기를 그러나 언론은 얼마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은 그마저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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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잡지 표지. |
| ⓒ 복음과상황 |
S그룹 노사 전략은 폐기되지 않았다. S그룹 다른 계열사에서, 빵 만드는 S사에서, 로켓 배송을 하는 C사에서 닮은꼴로 반복된다. 어디 뒷구멍으로 복사본이 돌고 있나 싶을 정도로. -74.p
개신교 월간지 <복음과 상황> 425호에 실린 '모든 소송에서 이겼지만 모든 곳이 폐허였다'란 글이다. 나는 이달로 1년 넘게 이 잡지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을 하고 있다. 목회활동을 하는 현직 목사들부터 소설가와 경찰, 서점 주인, 출판사 대표 등이 참여하는 김포시 지역 모임에 초청을 받고 합류한 게 지난해 3월이었다.
시작은 호기심이었다. 종교도 신앙도 없어도 글 쓰는 이로 살며 <성경>은 한 번쯤 읽어본 터였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내용과 오늘의 한국 개신교단의 모습은 도저히 겹쳐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저 멀리 하는 것보다는 다가가 그 진상을 보아야겠다, 그것이 모임의 초청에 응한 이유였다.
<복음과 상황>은 제법 참여적인 개신교 잡지다. '복음' 곁에 오늘의 세상을 뜻하는 '상황'을 이어 붙인 것만 보아도 이 잡지의 지향이 드러난다. 경전의 참 뜻과 세상에서의 삶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고민과 의지가 이 안에 담긴 것이다. 어언 14개월의 동행을 끝으로, 나는 이 잡지에 대해 글 한 편을 남기려 한다.
이 잡지를, 또 모임을 통하여 나는 저기 나와 다른 집단 안에도 나와 같은 이와 다른 이가 뒤섞여 있음을 깨달았다. 이른바 '성전 정화 사건', <성경> 가운데 기록된 예수가 교회를 찾아 호통을 치고 채찍을 휘두르며 환전상들을 쫓아낸 일이 오늘의 교회 안에도 여전히 시도되고 있단 걸 본다. 교회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고민하고, 더 낮고 힘겨운 이들 곁에 서며 정의를 바로 세우려 노력하는 이들이 있단 걸 확인한다.
때로는 노조를 파괴하고 아무렇지 않게 불법을 자행하는 기업을 비판한다. 또 때로는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들과 연대하고, 전쟁에 반대한다. 신앙을 가진 이들이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의 활동에 가 닿고, 그들을 구하는 순간도 여럿이다. 나는 나와 다른 이들이 또한 저 마다의 자리에서 나와 같은 윤리적 고민을 하는 순간을 읽는다. 세상으로 나아온 신앙과 그들의 세계 안에 들어선 나의 관심이 마주 닿는 순간이 신선하다.
단 한 명에게라도 더 닿았으면
내가 읽은 십여 권의 잡지에서 유독 마음에 닿았던 글들이 있다. 그중 다수가 대전 주사랑교회 담임목사인 이한주의 글이었음을 기록한다. 그는 최근에 꾸준히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얽힌 글을 연재하고 있다. 그 글 하나하나가 매우 값져서 나는 곁에 놓아두고 틈틈이 읽고는 한다. 이번 호에 실린 글이 또한 그러해서, 나는 이 글이 더 많은 이들에게 읽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평을 쓰고 있다.
20대 초반에 당시 90을 넘긴 시인 구상과 만난 일로부터 시작하는 글이다. 생명의 신비, 그러니까 숨을 쉬고 하늘을 보고 꽃을 보며 새소리를 듣는 일의 신비로움을 이야기한 구상 선생과의 만남 뒤, 이한주는 자신의 친구에게 "선생님은 반쪽만 안다. 생명의 기쁨만 알지 죽음의 슬픔은 모른다. 세상에는 신의 신비라는 말로 덮을 수 없는 비극이 너무 많다"고 말하였다. 이는 사실 도스토옙스키가 제 소설에서 펼친 이야기이기도 했다. 글은 소설 가운데 실린 끔찍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대지주인 퇴역 장군의 집 행랑채에 살던 여덟 살 소년이 있었다. 어느 날 소년이 장난치다 날아간 돌이 장군이 가장 아끼는 사냥개의 다리에 상처를 냈다. 장군은 소년을 잡아 구류간에 가두었다. 다음날 사냥을 나갈 때 장군은 소년의 옷을 벗기고 사냥개들을 풀어놓는다. 소년은 어머니 앞에서 개들에게 갈가리 찢겨 죽는다. 이반은 제정러시아 시대에 실제로 일어난 이 이야기를 들려준 뒤 개 떼를 풀어 아이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박해자와 그 아이와 그의 어머니가 얼싸안고 함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때가 온다 해도 그 조화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한다. 이반은 말한다. "나는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게 아니야, 알료샤, 다만 아주 정중하게 그에게 입장권을 돌려주는 것 뿐이지." -91, 92p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폭격을 거듭하고, 이미 전진해 있는 지상군도 물리지 않고 있다. 미국과 이란 간 협상은 결렬됐고 이란 본토와 호르무즈 해협이 다시금 전란에 휩싸일 조짐이다. 고립된 가자지구에서 물을 구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의 모습이 SNS로 생중계되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 부활절을 맞아 일시 휴전한 러·우 전쟁도 12일 자정을 기해 다시 재개될 예정이다. 수단 내전이며 미얀마 내전 또한 종전이 요원하다. 한국 외교부가 포함된 국제 협상단이 중재 중에 있으나 전쟁 가능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상황도 빠뜨릴 수 없다.
이 모든 전쟁에서 죽고 다치는 무고한 이들이 있다. 어린 아이들, 세상에 죄를 짓기엔 너무도 약하고 귀한 아이들이다. 유니세프에 따르면 이란에서만 340명 이상의 아이들이 죽었다. 누구보다 신을 찾는 이들이 이토록 참담한 상황과 마주하여 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디에 있느냐고, 당신의 세계가 이토록 비참해서는 안 된다고, 이 참극 위에 세우는 천국이라면 나는 그 입장권을 반환하겠다고 말이다.
구상 선생이 젊어 폐결핵을 앓고 반평생 한쪽 폐로만 호흡했단 사실을, 자식을 먼저 보내는 참척의 아픔을 겪었음을, 저를 만나던 당시에도 깊은 질환을 안고 있었단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는 저자다. 그리하여 그는 세상을 신비롭게 대하는 마음을, 그에 대한 기대를, 긍정하려는 마음을 잃지 않으려 한다. 이토록 참혹한 세상에도 희망이 있기를 기도하려 든다. 나는 그의 글이 슬프고도 아름답다 여긴다. 그리하여 더 많은 이에게, 종교와 지향을 넘어 닿기를 원한다.
어떤 시각에서 보자면 세상은 이미 폐허다. 전쟁에 가장 책임 없는 이들이 전쟁으로 죽어나간다. 악당은 활보하고 정의는 좀처럼 세워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S기업의 역대 최고 실적을 찬양하면서도 그 뒤에 자리한 부조리는 기억하지 않는다. 호르무즈 해협에 묶인 배와 한국의 경제를 걱정하면서도 그 아래 자리한 고통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 모습 또한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단 걸 안다. 그러나 누군가는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거부하고 영원히 고통 가운데 자리하겠다 결심하는 광경을 본다. 세상엔 폐허를 폐허로만 남겨두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있는 한 폐허도 그저 폐허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기 이 글이 더 많은 이들에게 닿았으면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단 한 가지 이유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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