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년 숙명적 갈등이라는 거짓말

정환빈 2026. 4. 13.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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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판 환단고기 ⑧] 종교가 만든 분쟁의 신화

[정환빈 기자]

▲ 중동판 환단고기 8편 5000년 역사의 숙명적 갈등이라는 거짓말
ⓒ 정환빈
필자는 올해로 11년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경력의 발단에는 KOICA(코이카, 한국국제협력단) 팔레스타인 사무소에서의 경험이 있었다. 당시 현지에서 만난 여러 한국인은 팔레스타인 땅의 주인이 유대인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었다. 성경에서 신이 이 땅을 유대인에게 약속했다는 종교적 신념 때문이었다.

한국 정부를 대표해 팔레스타인을 지원하러 온 다양한 기관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이방인으로 간주하는 현실은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비록 KOICA에 대한 팔레스타인 측의 평가는 매우 좋았으나, 이러한 태도는 개발협력의 취지에 어긋나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분쟁을 대하는 방식으로도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훗날 팔레스타인 역사를 공부하며 '어처구니없음'으로 뒤바뀌었다. 지난 2천 년 역사에서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유대인의 권리를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부정해 온 것이 기독교였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산의 진실

유대 민족의 역사는 흔히 이산의 역사로 불린다. 기원후 70년에 로마가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에서 추방한 이래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다는 이유에서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야기일 뿐이다.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로마 문헌에는 그러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고, 유대인들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팔레스타인에서 살아갔다. 심지어 4세기경에는 팔레스타인 북부 지역에서 '예루살렘 탈무드'를 편찬했다.

그런데 이 신화에도 뿌리는 있다. 로마는 기원전 63년에 팔레스타인을 정복했다. 한세기 지난 기원후 66년에 유대인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70년에 진압 과정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신전이 파괴당했다. 이후 132년에 유대인들이 2차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는 135년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거주를 금지했다. 즉, 추방의 역사는 팔레스타인이 아닌 예루살렘이라는 작은 도시 하나였다.

예루살렘은 비록 유대교 성지였으나, 이산의 신화가 이 사건만으로 탄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대에 이 정도 박해는 흔했다. 로마에 정복당하기 전에 유대인들이 세운 하스모니안 왕국은 반세기 동안의 짧은 역사에서도 나블루스에서 사마리아인들의 최고 신전을 파괴했고, 팔레스타인 중남부 이두매(Idumea) 지역 등에서 주민들을 강제개종시켰다. 로마의 탄압은 이보다 강하지 않았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떠나야만 할 서사를 형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4세기에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그간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해 오던 로마는 갑자기 비기독교에 대한 차별적 법률을 제정하며 종교적 박해를 시작했다. 유대인들 역시 박해를 피하지 못했다. 아래 설교문은 당시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의 인식을 보여준다.

"(유대교) 시나고그는 단순히 도적들과 상인들의 집합소인 것이 아니라 악마들이 모이는 곳이다. 시나고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영혼 또한 악마들의 서식지다."
- 천주교에서 성인으로 추대하는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hn Chrysostom)가 386년경에 시리아 안티오키아에서 한 설교. 당대 기독교 신학을 대표하는 설교자로 명성을 떨쳤고, 대주교직에 올랐다.
John Chrysostom, Wayne A. Meeks and Robert Louis Wilken, Jews and Christians in Antioch in the first four centuries of the common era (Missoula: Scholars Press, 1978), 85-104.

이러한 기독교의 가르침 속에서 로마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정당화했다. 135년 이래 계속되어 온 예루살렘 거주 금지를 유지한 것도 그중 하나였다. 4세기 말, 기독교 신부 제롬은 이런 감상을 남겼다.
"오늘날까지 이 위선적인 소작농들[유대인]은 신의 아들이자 마지막 예언자를 살해한 죄로 예루살렘에 오는 것을 금지당하고 있다. ... 이 비참한 집단의 후손들은 성스러운 신전이 파괴된 것을 한탄하지만, 동정할 만한 가치는 없다."
Moshe Gil, A History of Palestine, 634–1099, trans. Ethel Broido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69.

이산의 역사는 이러한 박해를 피해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떠나며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현대 학자들은 이주가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 입을 모은다. 특히 친이스라엘계에서는 많은 유대인이 이후로도 오랫동안 팔레스타인에서 거주했을 것으로 보고, 반대로 친팔레스타인계에서는 유대인들이 기독교와 이슬람으로 개종해 현대의 팔레스타인인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본다.

한편, 팔레스타인에서 로마의 지배는 7세기에 끝나고, 유대인들은 500년 만에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와 살게 되었다. 누가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냈을까? 바로 무슬림들이었다. 그런데 11세기 말에 들어 유대인들은 다시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기독교 십자군이 이곳을 정복했기 때문이었다. 2세기가 지나 십자군이 패퇴한 이후에야 유대인들은 무슬림의 지배 아래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기독교의 역사적 반유대주의

이처럼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유대인의 권리를 철저히 부정해 왔고, 수많은 박해를 가했다. 거주지와 직업을 제한하고, 흑사병의 원인으로 지목하거나 기독교 어린이의 피를 유대교 의식에 사용한다는 비방(blood libel) 등으로 학살하고, 때로는 지역 단위로 추방하거나 유대교 의식을 전면적으로 금지했다. 이러한 기조는 2천 년 가까이 이어져 오다 급작스럽게 바뀌었는데, 그 핵심 배경에는 홀로코스트가 있다.

홀로코스트는 2차 대전 중에 최대 6백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를 '나치'의 범죄로 부른다. 이러한 표현은 가해자를 명확히 하려는 의도보다는 책임의 소지를 끊으려는 '꼬리 자르기(externalization of guilt)'에 더 가깝다. 기실 많은 학자들은, 특히 유대인 학자들은 홀로코스트를 기독교 반유대주의의 연장선에서 바라본다.

독일은 기독교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기독교 중심적 국가였고, 당시 대부분의 독일인은 기독교인이었다. 나치 정당은 반유대주의를 선전 요소로 활용해 대중의 지지를 얻었고, 여러 성직자들도 이에 가세했다. 개신교의 아버지이자 독일 출생인 마틴 루터가 1543년에 쓴 아래 글은 빈번히 인용되며 유대인에 대한 차별적 조치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되었다.

"우리 기독교인은 저주받고 (신에게) 버려진 유대인 집단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첫째, 시나고그나 종교 시설을 불태워야 하며, 불타지 않는 것은 흙으로 덮어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 … 둘째, 그들의 집 역시 허물고 파괴해야 한다. … 셋째, 우상숭배와 거짓말, 저주와 신성모독이 담긴 그들의 기도서와 탈무드를 압수해야 한다. … 넷째, 랍비들을 사형에 처한다고 위협해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 다섯째, 유대인들에게 여권과 이동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금지해야 한다. … 여섯째, 그들이 이자를 취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 일곱째, 건장한 유대인 남녀는 … 자기 땀으로 빵을 벌어먹게 해야 한다."
Martin Luther, Concerning the Jews and Their Lies (1543), in Jacob R. Marcus, ed., The Jew in the Medieval World: A Source Book, 315–1791 (Cincinnati: Union of American Hebrew Congregations, 1938), 167–9.

반유대주의는 독일만의 특별한 문화가 아니었다. 기독교권에서 널리 공유되어 온 사상이었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유대인들은 차별과 박해를 경험했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유럽을 탈출해 유대인만의 민족과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시온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이 많이 이주해 간 미국은 이를 지지했으나, 정작 홀로코스트가 발생했을 때는 첩보를 숨기고 학살을 방관했다. 유대인을 구출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오면 전쟁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역사적 연속성과 보편성을 토대로 여러 학자들은 기독교 신학 자체에 반유대주의가 내포되어 있다는 비판까지 제기한다. 기독교 내부적으로도 비판적 성찰이 검토되었다. 독일 개신교 교단들은 1945년 "슈투트가르트 죄의 선언", 1947년 "우리 민족의 정치적 길" 등을 발표하며 점진적으로 반유대주의를 반성했다. 1965년에 천주교 교황청은 유대인이 예수의 죽음을 요구했다고 해서 신에게 버림받거나 저주받은 것은 아니라는 혁명적 선언(Nostra aetate)을 하기에 이른다.

역으로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홀로코스트 이후 달라진 기독교 입장을 반영해 비판적 태도를 완화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2000년 9월 10일, 220여 명의 랍비와 유대 지식인들은 아래와 같은 성명(Dabru Emet, 진실을 말하다)을 발표하였다. 이는 유대 사회 내부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기독교-유대교 간의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었다.

"나치주의는 기독교적 현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오랜 반유대주의 역사와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의 폭력이 없었다면, 나치 이데올로기는 뿌리내릴 수 없었고 실행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너무나도 많은 기독교인이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잔혹 행위에 가담했거나 동조했다. 이러한 만행에 대해 충분히 항의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치주의 자체가 기독교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한 결과였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유대교 화합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희생자를 낳았다. 바로 팔레스타인들이었다.

대다수 팔레스타인인은 1948년 시온주의자들의 인종청소로 인해 난민이 되었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투쟁했다. 이러한 저항은 서구 기독교권에서 유대인에 대한 무슬림들의 종교적 박해로 널리 선전되었고, 그 과정에서 기독교의 역사적 반유대주의는 축소하고 이슬람의 반유대주의를 부각했다. 그러나 정작 같은 시기에 유대인 역사학자들은 중세 유대인들이 남긴 40만 부의 고문서(Cairo Geniza)를 연구하여 무슬림의 지배가 기독교권보다 관용적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이는 여태까지 기독교 대중에게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아랍 무슬림 사회에서 유대인의 처지는 중세 유럽에서 보장된 것보다 상대적으로 나았다."
Shelomo Dov Goitein, Jews and Arabs: Their Contacts Through the Ages, rev. ed (New York: Schocken Books, 1974), 87-8.

"전체적으로 볼 때 유대인들은 기독교권에서보다 이슬람권에서 훨씬 나았으며, 이러한 상대적으로 더 관용적인 분위기는 아랍의 주류문화에 유대인들이 완전히 빠져들 수 있도록 이바지했고 때때로 정말로 '황금기'라는 묘사를 받을 만했다."
Mark R. Cohen, "The Neo-LachrymoseConception of Jewish-Arab History," Tikkun 6, no. 3 (1991): 59.

약속의 땅=팔레스타인?

한편, 유대인들이 신에게 버림받지 않았다는 새로운 해석은 성경에서 신이 유대인에게 한 약속, 즉 '팔레스타인 땅'의 주인으로 삼는다는 약속이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해석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관점에서 토착민인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주장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성경에서 유대인들이 약속받은 것은 팔레스타인이 아니다. 애초에 성경에는 "팔레스타인 땅"이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성경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처음에 신으로부터 애굽강에서 유프라테스강을 약속받았으나(창 15:18), 이후에는 가나안(창 17:8)을 약속받는다. 모세는 처음에는 가나안(민 34:2-12)을, 두 번째로는 홍해-블레셋 바다-광야-강에 이르는 영역(출:23:31)을, 마지막에는 광야-레바논-유프라테스강-서해(신:11:24)에 이르는 경계를 약속받았다. 수백 년 뒤 에스겔은 모세가 약속받은 가나안과 유사하지만 다른 경계(겔 47:13-20)를 약속받았다.

이처럼 성경의 신이 유대인에게 약속한 땅은 해석에 따라 4~6개의 서로 다른 경계가 존재한다. 이는 기실 '약속의 땅'이 추상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이를 현실의 개념으로 가져오려면 '인위적으로' 하나의 경계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부정해야 한다. 선택된 경계를 지도에 그리는 과정에도 '인위적 해석'이 동반된다. 가령, '애굽강에서 유프라테스강'은 대체 어떤 영토를 나타낸단 말인가? 강의 상류를 경계로 삼을지, 하류를 경계로 삼을지 등에 따라 면적은 수십 배까지도 차이 날 수 있다. 가장 상세하게 설명된 모세의 가나안(민 34:2-12)도 경계로 제시된 고대 지명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기독교 일부 종파에서는 신이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에게 약속했다는 교리가 널리 퍼져 있고, 그러한 종교적 신념으로 토착민의 권리를 부정할 수 있다는 식민주의적 사고를 정당화한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땅을 빼앗고 유대인 마을을 건설하고 있다.
▲ UNOCHA 통계 서안지구 내에 건설된 이스라엘의 유대인 마을 주민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입힌 인적·물적 피해 빈도
ⓒ UNOCHA
▲ UNOCHA 촬영 2022년 3월 24일, 서안지구 내부에 건설된 유대인 마을의 주민들로부터 공격당한 팔레스타인인이 부상을 입고 구급차로 이송되는 모습이다. 피해자의 증언에 따르면, 도끼로 머리와 등을 가격당했다.
ⓒ UNOCHA
▲ UNOCHA 촬영 2023년 10월, 서안지구 내부에 건설된 유대인 마을 주민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피란하고 있다.
ⓒ UNOCHA
팔레스타인인 = 블레셋인 = 악당?

일부 기독교 종파에는 이보다도 위험한 해석이 퍼져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단순히 남의 땅에 눌러앉은 '손님'이 아니라, 성경 시대부터 5천 년간 유대인들을 괴롭혀 온 사악한 '악당'이라는 관점이다. 이는 성경에 나오는 블레셋인이 현대의 팔레스타인인과 동일 집단이라는 해석에 근거한다.

블레셋은 기원전 12세기경에 지중해를 건너온 소수의 이주민과 다수의 토착민이 결합해 만든 정치 체제다. 이들은 가자 인근 연안을 통치하며 해양 무역을 통해 유럽에 널리 알려졌다. 그리스인들은 블레셋과 그 영토를 필리스티아(Philistia), 지역민을 필리스티노이(Philistinoi)라고 불렀다. 영어로는 각각 팔레스타인(Palestine), 팔레스타인인(Palestinian)으로 전해졌다.

기원전 6세기경에 블레셋과 남유다 왕국을 비롯한 팔레스타인의 모든 토착 세력은 멸망했다. 유럽인들은 이 지역을 통칭할 새로운 지명을 찾았고, 자신들에게 익숙한 필리스티아를 차용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의 <기후> 등 여러 사료는 시리아의 남서쪽 일대를 필리스티아(팔레스타인)로 지칭했다. 여기에는 유대인들이 거주한 산악지대(오늘날 서안지구 일대)가 포함된다.

한편, 기원전 6세기에 블레셋이란 정치 체제가 멸망한 이래 스스로나 타인에 의해 블레셋인으로 불리는 집단은 사라졌다. 필리스티노이(팔레스타인인)는 단순히 팔레스타인에서 거주하는 주민으로 의미가 변화했다. 즉, 고대의 블레셋인이나 유대인, 페니키아인, 나바테아인 등이 이 지역에서 계속해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팔레스타인인이라 불렸다. 아랍인, 유럽인 등이 이주해 와서 정착하면 그들 역시도 팔레스타인인으로 불렀다.

현대의 팔레스타인인은 바로 이러한 개념에서 탄생한 토착 집단적 정체성이다. 19세기 말 유럽과 시온주의자들의 식민 침탈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의 집단의식이 강화되었고, 팔레스타인인이라는 표현을 빈번히 사용하기 시작했다. 역사학자 엠마뉴엘 베슈카(Emanuel Beška)와 재커리 포스터(Zachary Foster)는 1908~1914년 사이에 팔레스타인에서 발간된 신문 기사에서 "팔레스타인인"이 약 170번 사용된 것을 발견했다. 반면, 친이스라엘계에서는 이보다도 늦은 1948년 인종청소 이후에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이 형성하였다고 본다.

이처럼 팔레스타인도,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인의 탄생 시점을 현대로 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학자들조차 이-팔 분쟁을 성경 시대부터 5천 년간 계속되어 온 숙명적 갈등으로 정의하며, 팔레스타인인이 블레셋인의 후손이라는 해석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유대인이 고대 블레셋인의 후손과 싸움을 계속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애당초 누가 블레셋의 후손인지도 알 수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중세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인을 이스마엘인 또는 아랍인으로 불렀다.

"프랑크인들[유럽 기독교도]이 도착해 도시[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마엘인과 이스라엘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다."
- 십자군의 예루살렘 학살 이듬해 1100년에 유대인이 작성한 편지
Shelomo Dov Goitein, "ContemporaryLetters on the Capture of Jerusalem by the Crusaders," Journal of JewishStudies 3, no. 4 (1952): 176.

"이 지역[예루살렘]에서는 아랍인들이 유대인을 박해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 지역을 동서남북 끝까지 여행 다니는 동안 누구도 길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낯선 이들에게 매우 친절했고, 특히 아랍어를 모르는 이들에게 더욱더 그러합니다. 유대인들 여럿이 무리 지어 있는 것을 보아도 불쾌해하지 않습니다."
- 1487년에 예루살렘에 정착한 랍비 오바댜(Obadiah)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
Elkan Nathan Adler, Jewish Travellers (London: George Routledge & Sons, 1930), 235.

사실, 이러한 역사적 이해가 없더라도 5천 년 역사의 숙명적 갈등이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유대교는 유대인들이 2천 년 간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이산 생활을 한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어떻게 블레셋인과 싸워 왔겠는가? 당연히 유대인들의 역사적 기억에 그러한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오로지 현대 기독교 일각에서만 주장되는 환단고기와 같은 정치적 신화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2천 년 이산의 역사와 5천 년 역사의 싸움이라는 자명한 모순을 동시에 옹호하며 강단에서, 언론·방송에서, 책에서 가르치는 실정이니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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