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300칸,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개인 살림집

조종안 2026. 4. 13.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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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한 건축미 돋보이는 조선 후기 양반집, '나눔과 상생' 정신 깃든 강릉 선교장

[조종안 기자]

 산책로(백호길)에서 내려다본 선교장
ⓒ 조종안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운정동에 자리한 한국 최고의 전통가옥 선교장(船橋莊) 전경이다. 비가 갠 뒤라서 그런지 유난히 조용하고 고즈넉하다. 햇살 머금은 기와지붕이 운치를 더한다. 피톤치드 가득한 금강송 군락과 흙내음, 나뭇잎 소리 등이 '자연의 숨결'을 그대로 담아낸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가 아름다운 힐링 공간에서 며칠 더 머물고 싶어진다.

고색창연한 한옥과 단아한 건축미가 돋보이는 선교장. 이 고택은 조선시대 아흔아홉칸 양반집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1703년 처음 지어진 안채 주옥을 비롯해 열화당, 동별당, 외별당, 초정, 자미재, 서별당, 연지당, 중사랑채, 행랑채, 홍예헌1·2관, 하인들 거처(초가), 전통문화 체험관, 박물관, 기획전시실(초가), 사당 등이 적당한 공간을 유지하며 조화를 이룬다.

선교장은 야트막한 태장봉 줄기가 병풍처럼 감싼 좌청룡, 우백호 형태의 지세이다. 지세를 딴 산책로(청룡길, 백호길)도 조성되어 있다. 명칭 유래는 처음 터를 잡았던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포호 물이 선교장 앞까지 들어와 배로 다리를 만들어 오가던 '배다리(船橋里) 마을'에서 유래했다는 것. 지금도 강릉 지역에는 선교장을 '배다리가옥'이라 부르는 주민이 많다고 한다.

선교장 터에 얽힌 '족제비 설화'
 활래정 방향에서 바라본 선교장 전경
ⓒ 조종안
선교장은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1703~1781)이 조선 후기에 건립한 전통 주택으로 안채와 부속 건물들로 이뤄져 있다. 무경 후손들이 10대에 걸쳐 거주하며 새 가옥을 짓거나 증축하는 등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조선 시대 사대부가(士大夫家)의 명성과 전통을 잇고 있다. 1967년 국가지정문화재(중요 민속자료 제5호)로 등록되었다.

경호(鏡澔) 이강륭(李康隆:1943~2025: 효령대군 19대손)의 자서전 <鏡澔日誌>에 따르면 무경 이내번은 효령대군 11대손(가선대부)으로 선교장 터를 닦은 인물로 전해진다. 그와 더불어 전설 같은 '족제비 이야기'가 내려온다.

무경은 충주에서 살다가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안동 권씨)와 함께 강릉으로 이주, 경포대 인근(저동)에서 살았다. 가산이 일기 시작하여 좀 더 너른 터를 물색하던 어느 날이었다. 한 무리의 족제비가 나타나 서북쪽으로 이동하는 광경을 목격, 신기하게 여기고 따라가 보니 1km쯤 떨어진 야산의 울창한 송림 속으로 사라지는 게 아닌가.
 선교장 건물 중 처음 건립한 안채 주옥
ⓒ 조종안
족제비 무리가 사라진 후 한동안 망연히 서 있던 무경은 정신을 가다듬어 주위를 살피고는 '이곳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명당'이라며 무릎을 쳤단다. 앞으로는 얕은 내가 흐르고 우측엔 안산(案山), 좌측으로 흐르는 시내 건너에 조산(朝山)이 있어 '배산임수'에 '좌청룡·우백호' 지세였던 것. 무경은 그해 거주지를 지금의 선교장 자리로 옮긴다.

당시 무경이 지은 선교장은 안채, 사랑채, 아래채 등이 하나의 구조로 연결된 '口 자'형 주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개인 살림집'이 되었다. 본채 102칸에 부속 건물까지 총 300칸에 이르는 대장원으로 거듭난 것.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후손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보였다.

동진학교, 열화당, 활래정에 얽힌 이야기

구한말 개화파로부터 영향받은 당시 선교장 장주(주인) 이근우(李根宇: 1877~1938)는 팽배하던 민족주의 교육 사조 추세에 부응하여 마을 유지들과 1900년 전후 동진학교(東進學校)를 설립한다. 그는 민족과 국가 장래를 도모하는 선각자요 애국자였다. 1897년 태극기를 만들어 보관했다가 동진학교 입학식 때 사용했다. 근대 지식 보급과 인재 양성이 설립 목적이었고, 수업 연한은 3년이었으나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 학생 유치 어려움 등으로 1911년 폐교하게 된다.
 선교장 남자 주인이 거처하는 열화당(챙랑채)
ⓒ 조종안
열화당(悅和堂)은 선교장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난 사랑채로, 형제간 우애가 남달랐던 무경의 손자 후(垕)가 순조 15년(1815) 서별당과 함께 지었다고 전한다.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왔다는 것. '悅和'는 '친척들과 더불어 즐거운 얘기를 즐긴다'는 뜻이란다. 시원한 대청마루에 테라스가 특이한 모습인데, 구한말 러시아 공사관에서 선물했다고 전한다.
선교장은 시·서·화 등 풍류가 있는 문화·예술의 공간이었다.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하기 위해 조선 팔도에서 모여든 선비들의 베이스캠프였던 것. 전라, 경상, 충청 등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선비들은 수일에서 많게는 몇 달씩 묵으면서 주인과 시·서·화를 즐겼다는 것. 그들은 선교장에서 숙식을 해결했으며, 심지어 옷과 버선까지 제공받은 선비도 있었단다.
 사계절의 변화와 생동감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활래정
ⓒ 조종안
 활래정에 내걸린 김구 선생 편액(휘호 ‘천하위공’은 ‘세상은 공평하고, 사람의 마음은 의연하다’는 뜻이라 한다)
ⓒ 조종안
활래정(活來亭)은 창덕궁 비원의 부용정을 본 때 중건한 정자로 알려진다. 정자의 특징은 네 개 기둥이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것. 선교장의 연꽃차가 유명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따라서 연꽃이 만개하는 여름에는 조선의 VIP 풍류객들이 모여 차를 마시며 시를 짓고, 음악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등 사교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정자에 걸린 편액이 눈길을 끈다. 광복 후 상해에서 귀국한 백범 김구 선생이 천하위공(天下爲公), '천군태연(天君泰然)' 등의 휘호를 1948년 당시 이돈의(李燉儀: 1897~1961) 선교장 장주에게 보냈단다. 낙관 옆으로 '이돈의 동지(同志)'가 보이는데, 백범 글씨 중 '동지'라고 쓴 휘호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 따라서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음을 암시하는 휘호로 여겨졌다.

조상의 유지 받들어 선교장은 사회에 환원
 박물관에 전시된 선교장 태극기
ⓒ 조종안
선교장 박물관에는 700여 매의 토지 매매문서와 1897년 이근우 장주가 민족정신 고취를 위해 그렸다는 태극기(국가등록 문화유산 648호), 주요 서책, 퇴계 율곡 등 문인들 서찰, 생활 도구, 서화, 도자기 등이 수천 점 전시되어 있었다. 다양한 생활 도구는 물론 방문객이 남긴 각종 서화에서도 전통문화의 멋과 아름다움 그리고 옛 선비들의 민족애와 국가관이 엿보였다.

선교장 제사 방식은 이근우 장주가 그동안 내려오던 기제사를 없애는 등 대개혁을 단행했다고 한다. 이강륭 장주도 그 뜻을 받들어 전통 제례를 현대에 맞게 조정, 1년에 봄가을 두 번씩 지내도록 결정했다고 한다.

이강륭 장주는 자신이 쓴 책(<鏡澔日誌>)을 통해 '선교장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가슴으로 와닿은 그 대목을 아래에 옮긴다.

"(선교장은) 최근 들어 중앙정부와 강원도, 강릉시 지원으로 수리와 보전이 완벽하게 이뤄지고 박물관까지 개관하였다. 많은 국민의 세금으로 도움을 받았으니 선교장은 등기부상은 장주인 나(이강륭)의 소유지만, 이 모든 것은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 이것이 과거 조상님들의 '나눔과 상생(相生)'의 정신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선교장 장주(莊主) 역임한 경호 이강륭 자서전 <鏡澔日誌>(2023)
선교장 안내문, 문화관광해설사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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