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옥의 세계경제전망] 전쟁이 되살려낸 인플레이션…빨라질 중앙은행의 긴축 시계

물리친 줄 알았던 ‘인플레 야수’가 다시 눈을 떴다. 각국 중앙은행이 코로나19에 따른 재정 지출 확대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위축이 부추겼던 물가 상승을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야수의 명줄을 끊지는 못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쏘아 올린 중동 전쟁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에 다시 숨을 불어 넣었다. 인플레이션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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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잉 유동성에 오일 쇼크 가세
70년대식 스태그플레이션 경고
유가 10% 뛰면 물가 0.4%p 올라
기대 인플레이션 고착화 막아야
」
인플레이션은 사라진 단어와 같았다. 세계화의 진전과 함께 가격과 생산의 효율성을 추구할 수 있게 되면서 저물가 시대가 이어졌다. ‘인플레가 더는 짖지 않는 개가 됐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자국 생산 체계 와해와 중산층 붕괴 등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탈세계화가 본격화하고 코로나 팬데믹 후유증과 보호무역주의의 득세, 거기다 전쟁까지 더해지자 인플레이션이 귀환했다.
“모든 길은 더 높은 물가로 이어져”
물가가 오르면 화폐 가치는 하락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구매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실질 소득의 감소다. 그렇다고 인플레이션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적절한 수준의 인플레이션은 건강한 경제의 신호다. 오히려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이 경제에는 부정적일 수 있다. 가격 하락에 대한 기대 심리가 소비 등을 지연시키며 경기 둔화를 부추길 수 있어서다. 그렇지만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의 물가 상승은 시장에 재앙을 몰고 온다.
인플레 경고음은 곳곳에서 울린다. 오스틴 굴스비 시카고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지난 6일 “현재 인플레이션 상황은 오렌지(경고)에서 빨간색(위기)으로 향하는 흐름”이라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이제 모든 길은 더 높은 물가와 낮은 성장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닥터 둠’으로 불리는 루비니 뉴욕대 명예교수는 1970년대식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 속 경기 침체)을 경고하고 나섰다.
고통스러운 긴축으로 이어졌던 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시장이 이 기억을 소환하는 건 현재의 상황이 당시와 닮은 점이 많아서다. 뉴욕타임스(NYT)는 “70년대와 지금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몇몇 불안한 유사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늘어난 재정 지출과 중앙은행인 미 연방준비제도(Fed)에 대한 정치적 압력, 오일 쇼크다.

1970년대 후반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베트남 전쟁 참전과 대규모 재정 지출 확대 및 1973년과 79년 두 차례에 걸친 석유 파동, 완화적 통화정책으로 발생했다. 특히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당시 아서 번스 Fed 의장에게 압력을 가해 기준금리를 내리면서 물가가 급등한 탓에 이 시기 물가 급등을 일컫는 ‘대(大) 인플레이션(GI·great inflation)’은 중앙은행의 정치화가 어떤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지 드러내는 용어가 됐다. 결국 ‘인플레 파이터’로 불리는 후임 폴 볼커 Fed 의장이 금리를 19%까지 끌어올리며 ‘대 인플레이션’을 진압했지만 높은 실업률과 깊은 침체라는 고통의 시기를 겪어야 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시장에 공급된 과잉 유동성은 인플레이션이 자랄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됐다. 각국이 대규모 재정 적자를 유지하면서 유동성을 공급한 탓에 통화량은 늘고 주요국의 국가 부채는 급증했다. 프란체스코 비앙키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지난해 6월 한국은행 국제콘퍼런스에서 “코로나 이후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고물가 현상이 정부의 재정 지출 증가로 인해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인플레이션 2.0 시대’의 도래다.
정부 지출 늘며 ‘인플레이션 2.0 시대’로
여기에 올해 초 Fed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전방위 압박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흔들며 ‘대 인플레이션’ 논란을 불러왔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는 Fed가 독립성을 상실하면 인플레이션이 고착화하면서 물가가 2040년까지 41% 급등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인플레이션 2.0 시대’의 마지막 퍼즐은 유가다. 중동 전쟁의 충격으로 3월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는 1년 전보다 3.3% 상승했다. 상승 폭은 2024년 이후 가장 컸다. 물가를 끌어올린 건 10.9%나 오른 에너지 가격이다. 휘발유 가격은 21.2% 급등하며 1967년 통계 집계 이후 최대 상승 폭을 기록했다. 배럴당 110달러를 돌파했던 브렌트유 가격은 100달러 아래로 내려왔지만 국제 유가의 고공행진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타격을 입은 걸프국 에너지 시설 복구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 있고, 호르무즈 해협 통행을 둘러싼 갈등의 봉합까지도 갈 길이 멀다.

오일 쇼크에 따른 세계 경제의 충격은 불가피하다. IMF는 국제 유가가 10% 오를 때마다 세계 인플레이션은 0.4%포인트 상승하고 세계 경제성장률은 0.1~0.2%포인트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세계은행 시나리오에 따르면 만약 휴전이 깨지고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성장률은 1%포인트 하락하고 물가는 0.9%포인트 상승할 수 있다.
물가와 경기 사이 중앙은행 고심 깊어져
인플레 방어선을 구축하는 각국 중앙은행이 일단 막아야 하는 건 ‘기대 인플레이션’의 고착화다. 물가가 계속 오를 것이란 심리가 번지면 노동자는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기업은 인건비 등 각종 비용 상승을 예상해 상품 가격에 반영하면서 물가를 끌어올리는 ‘임금-물가 소용돌이(Wage-Price Spiral)’에 빠질 수 있어서다. 이런 악순환이 이어지면 일시적인 인플레이션이 구조적인 인플레이션으로 바뀔 수 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는 지난 9일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의 고삐가 풀릴 수 있다면 중앙은행은 금리 인상으로 단호하게 개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준금리를 동결하며 긴축 대응 태세에 돌입한 주요국 중앙은행이 언제든 매(통화 긴축)의 발톱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적절한 시기와 강도다. 너무 이르고 과도한 통화 긴축은 성장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그러나 야수(인플레)가 마을에 나타난 것은 분명하다. 긴축이 점점 불가피해지는 상황이다. 물가 안정과 경기 부양 사이에서 중앙은행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시작됐다.
하현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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