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이 생의 마지막 보낸 곳, 이런 사연 있었네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이길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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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에 있는 레만호의 풍경. 레만호는 1966년 발표된 패티김의 노래 <레만호에 지다>와 1979년 TV 드라마 <레만호에 지다>를 통해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졌다. |
| ⓒ 이길상 |
몇 해 전 자동차를 몰고 이곳을 지났다. 지나는 차를 거의 볼 수 없는 겨울이라 도로변 카페조차 문을 닫았다. 한 시간쯤 운전해 구불구불한 알프스를 넘으니 작은 도시 마흐띠늬가 나를 반겼다. 산등성이를 꽉 채우고 있는 계단식 포도밭 물결이 장관이었다. 포도 산지 화성시 송산면 출신인 나에게 포도밭이 주는 감동은 남달랐다.
그 누구와 공유하기도 불가능할 정도로 감동적인 한 시간 반가량의 드라이브 끝에 도달한 곳은 레만호 동쪽 작은 도시 몽트뢰였다. 재즈 페스티벌과 프레드 머큐리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도시다.
1979년 6.25 기념 2부작으로 KBS 1TV에서 방영된 정애리와 이영하 주연의 드라마 <레만호에 지다>를 통해 레만호가 우리나라에 알려졌다. 결혼하자마자 벌어진 6.25 전쟁으로 남남북녀가 된 주인공 두 사람이 레만호가 보이는 제네바에서 만나지만 끝내 부부가 되지 못하고 레만호에 지고 만다는 슬픔 가득한 분단 드라마다.
이 드라마의 작가 한운사가 가사를 쓰고, 작곡가 박춘석이 곡을 붙이고, 패티김이 부른 같은 이름의 노래가 1966년에 먼저 발표되었다. 노래에 맞춰 드라마가 탄생한 셈이다. 레만호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유튜브에서 이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
그 이름 잊은 것은 아니지만은 / 그 얼굴 잊은 것은 아니지만은 / 흘러간 세월 속에 묻어둔 사랑 / 레만의 호숫가에서 만났을 때에 / 나는 울었네 / 갈라진 나라를 / 말 못할 사연을 / 나는 울었네
포도주보다 유명한 특산물 커피
몽트뢰의 첫인상을 곱게 심어준 것은 호텔 직원이었다. 호텔 앞에 차를 세워놓고 호텔 리셉션에 갔더니 여직원이 반겼다. 주차를 물으니 웃으면서 나에게 따라오라는 것이었다. '금방 돌아오겠다'는 표지판을 세워놓고 앞장서 걸었다. 언덕 아래 주차장에 도착해 주차장 셔터를 올리고 내리는 방법까지 시연한 후 함께 호텔로 돌아왔다. 베트남계 스위스 여성이었다. 속으로 '프레드 머큐리가 좋아할 만한 도시구나'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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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온성 입구에는 이곳을 방문했던 영국 시인 로드 바이런의 이름을 딴 조용한 카페가 있다. 바이런은 이곳 지하에 갇혔던 수도사 보니바르를 기리는 시 '시온성의 죄수'를 발표했다. |
| ⓒ 이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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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온성 입구 바이런 카페에서는 고객이 커피머신에서 원하는 메뉴를 직접 내려 마신다. 필자가 내린 라떼카푸치노. |
| ⓒ 이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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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만호 기슭에 있는 인구 2만의 작은 도시 브베에는 세계 1위 커피 기업 네슬레 본사가 있다. 1866년 이곳에서 창업한 이후 이 도시를 떠나지 않고 있다. |
| ⓒ 이갈상 |
본사 건물은 규모가 매우 크고 아름답다. 방문객은 1층 로비까지 출입할 수 있고, 로비 끝에 있는 매장에서 커피 관련 용품을 구입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스타벅스 제품도 판매한다는 점이다. 2018년에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여, 네슬레가 스타벅스 브랜드 커피 제품을 전 세계에서 판매할 권리를 얻었다.
그 한 해 전인 2017년 당시 스타벅스를 넘어 제3의 물결 커피를 주도하던 미국 커피 기업 블루보틀을 인수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것도 네슬레였다. 2026년 네슬레는 블루보틀을 중국 투자회사 센트리움 캐피털에 매각하여 다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도시
브베를 유명하게 한 것은 네슬레만이 아니다. 이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낸 유명인이 있다. 바로 미국의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이다. 채플린은 왜 생의 마지막 25년을 먼 이국땅 브베에서 보냈을까?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미국은 반공 열풍, 애국 열풍이었다. 요즘과 비슷한 미국 우선의 보수 시대였다. 영화 홍보 차 외국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려는 채플린은 '공산주의자'라고 의심받아 입국을 거부당했고, 채플린은 미국 대신 스위스 브베를 자신의 정착지로 선택했다. 그는 브베를 선택한 이유로 "여기에서는 세상이 조용하게 흐르는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브라질 커피협회가 네슬레를 선택한 것도, 채플린이 브베를 선택한 것도 결국은 스위스가 지닌 평화 이미지였다. 전쟁을 좋아하는 이미지로 성공한 국가, 인류에게 존경받는 국가는 역사적으로 없다. 그런 나라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역사다. 레만호가 보이는 호숫가에 서 있는 채플린 동상 앞에서 잠시 평화를 생각한 후 스위스를 떠나 다시 프랑스로 향했다.
고속도로를 피해 국도를 선택했다. 이유는 통행료였다. 스위스 여행을 할 때 고속도로를 이용하려면 미화 45달러(6만 6000원) 정도 하는 '비네트'라는 스티커를 구입해 부착해야 한다. 그런데 이 스티커는 1년짜리 한 종류밖에 없다. 만일 스티커 없이 고속도로를 이용하다 적발되면 스티커 구입비의 다섯 배 정도 되는 벌금을 내야 한다.
45달러를 절약하기 위해 선택한 레만호 북쪽 국도를 통해 프랑스 국경 방향으로 달리다 보니 마치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한 영화 속 유럽 시골을 지나는 느낌이었다. 눈 덮인 언덕과 농장, 그리고 굴뚝에서 간혹 연기가 오르는 한가한 마을 풍경이 반복되었다. 45달러를 절약한 것이 아니라 450달러를 번 느낌이었다. 계획된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는 것, 좋은 여행은 계획이 아니라 우연이 만든다는 것을 느낀 낭만 가득한 하루였다.
브베에서 시작된 네슬레, 몽트뢰가 자랑하는 재즈 페스티벌, 샤모니에서 시작된 동계올림픽 등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간단하다. 문화의 중심은 반드시 대도시가 아닐 수 있다. 네슬레의 도시 브베에서 생을 마친 찰리 채플린 이야기는 우리에게 조용히 흐르는 시간의 가치를 느끼게 한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도시, 문화가 강한 작은 도시가 많은 나라에서 살고 싶다. 물론 그게 우리나라였으면 좋겠다.
(<커피 한잔에 담긴 문화사>의 저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이길상(2025). 커피 한잔에 담긴 문화사. 싱긋. 이길상(2023).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 역사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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