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월드]일상을 탈출하는 가장 우아한 '체크인'

권재희 2026. 4. 12. 08:03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레스케이프호텔 도슨트 투어
벨 에포크…서울에서 경험하는 프랑스의 황금기
일상과 도심으로부터의 ‘탈출’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비는 명동 거리를 지나,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남대문시장으로 이어진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이 유서 깊은 시장은 여전히 활기와 소음, 사람들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상인들의 목소리와 발걸음이 뒤섞인 풍경 속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가다 보면, 이질적인 공기가 스며드는 지점과 마주하게 된다.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골목 어귀. 무심코 지나칠 법한 그 틈 사이로, 전혀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가 숨어 있다.

서울 중구 명동과 남대문이 이어지는 한 골목 어귀에 자리한 레스케이프호텔. 눈에띄지 않는 골목 어귀에 입구를 의도적으로 배치함으로서 '탈출'이라는 컨셉을 더욱 극대화했다. 권재희 기자.

조선호텔앤리조트가 운영하는 레스케이프 호텔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방금 전까지의 소음과 빛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시야는 서서히 어둠에 적응하고, 야생 장미향이 코 끝에 닿으며 완전히 다른 시공간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마치 무대의 막이 오르기 직전, 객석의 불이 꺼지는 찰나처럼 그 짧은 전환의 순간. 이미 일상에서 벗어나 있다. 레스케이프 호텔이 설계한 '탈출'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름부터가 상징적이다. 프랑스어 정관사 'Le'와 'Escape'를 결합한 '레스케이프'는 '그 탈출'을 의미한다. 단순한 휴식이 아닌, 의도적으로 현실을 벗어나 전혀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경험. 이 호텔이 지향하는 바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단어다.

600년 역사의 상업 중심지 위에 들어선 이 호텔은, 주변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결을 만들어낸다. 인근의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근대 상업의 상징이라면, 레스케이프 호텔은 감각적 서사의 공간이다. 오랜기간 글로벌 체인 호텔들이 자리하던 이 지역에서 독창적 콘셉트로 존재감을 구축한 뒤, 2025년 12월 29일부터 메리어트 럭셔리 컬렉션에 합류하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강북에서는 유일한 사례다.

레스케이프호텔의 아뜰리에 스위트룸. 레스케이프호텔은 전체 204개 객실 중 40%가 스위트룸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재희 기자

루브르 박물관과 베르사유 궁전 등 프랑스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프로젝트에 참여한 프랑스 디자이너 자크 가르시아는 '벨 에포크(Belle Epoque)라는 시대적 미학을 레스케이프 호텔을 통해 구현했다. 19세기 말, 산업혁명과 만국박람회를 배경으로 에펠탑과 물랑루즈가 등장하던 시기. 가장 화려하고 향락적인 동시에 예술과 욕망이 공존하던 시대. 레스케이프 호텔은 이 찬란하면서도 덧없는 시기를 공간으로 재현했다.

호텔은 다섯 가지 문법으로 감각을 자극한다. 골목 속에 숨겨진 입구, 서커스 텐트를 연상시키는 골드와 블랙의 색채, 의도적으로 낮춘 조도, 벨벳과 금속이 대비되는 소재, 그리고 머스크와 붉은 장미가 어우러진 시그니처 향. 이 모든 요소는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완성하며, 방문객을 하나의 극적 장면 속으로 끌어들인다.

객실 역시 단순한 휴식 공간이 아니다. 전체 204개 객실 중 40%가 스위트룸으로 구성된 레스케이프 호텔에서 경험한 아뜰리에스위트, 코너 스위트,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은 각각 다른 서사를 품고 있었다. 특히 코너 스위트룸은 코너 통창 너머로 남산타워를 조망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객실로 전체 204개 객실 중 단 15개만이 코너 스위트룸이다. 벚꽃 시즌에는 남산 등선을 따라 만개한 벚꽃이 어우러지는 풍경이 인상적이다.

프레지덴셜스위트룸의 화장실. 권재희 기자

이 호텔의 진가는 디테일에서 드러난다. 가장 인상적인 건 공간 곳곳에 스며든 '시선의 설계'다. 욕조는 침대에서 은근히 보이도록 배치되어 있고, 욕조 앞에 놓인 의자는 이 장면을 더욱 의식하게 만든다. 살롱을 구현한 6층의 '티 살롱' 역시 좌석 간 시선이 교차하도록 구성돼 있다. 이는 인테리어가 아니라, 의도된 감정의 연출이다.

여기에 더해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 놓인 캐노피 침대는 또 다른 상징을 담고 있다. 캐노피는 하늘과 맞닿아 신의 가호 아래 안온한 밤을 보내길 바라는 의미를 지니며, 단순한 가구를 넘어선 시대적 상징으로 기능한다. 또한 스위트룸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사자 장식은 공간의 위계를 드러내며, 이곳이 단순한 '집'이 아닌 '왕궁'의 개념으로 설계됐음을 암시한다.

레스케이프호텔 6층에 위치한 '티 살롱' 이 곳은 좌석 배치를 옆 좌석과 시선을 교환할 수 있도록 해 은밀한 분위기를 풍기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권재희 기자

이처럼 '보여짐'과 '엿봄'의 구조, 그리고 은근하게 배치된 에로틱한 긴장감은 벨 에포크 시대의 살롱 문화와 맞닿아 있다. 당시 살롱은 사교와 예술, 그리고 은밀한 욕망이 공존하던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관찰하고, 드러내며, 은밀하게 관계를 형성했다. 완전히 노출되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보이는 구조, 시선을 의식하게 만드는 배치는 그 시대 특유의 긴장감을 반영한다. 레스케이프 곳곳에 배치된 에로틱한 분위기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노골적이지 않지만 분명히 감지되는 감각. 이 것이 레스케이프 호텔이 지향하는 럭셔리의 본질이다.

이 호텔은 화려함의 이면까지도 담아낸다. 벽지 곳곳에 스며든 오리엔탈리즘적 장식은 당시 프랑스 상류층의 취향과 안목을 과시하던 문화적 맥락을 반영한다. '나는 이만큼의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이다'라는 은근한 드러냄. 시들어가는 꽃을 형상화한 장식과 함께 이러한 요소들은 화려함과 허영, 그 경계에 선 벨 에포크의 양면성을 드러낸다. 가장 아름다웠던 시대가 동시에 가장 덧없었던 순간이었듯, 이곳의 경험 역시 찰나로 남는다.

조선 팰리스가 절제된 현대적 럭셔리를 보여준다면, 레스케이프는 감각과 서사를 통해 몰입을 이끄는 공간이다. 이곳은 머무는 호텔을 넘어, 하나의 무대이자 이야기다.

레스케이프 호텔의 4월 12일부터 매주 컨시어지 주관 하에 도슨트 투어가 진행될 예정이다. 수요일은 영어, 일요일은 한국어로 진행된다.

레스케이프호텔의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두 개의 분리된 침실이 양 옆으로 배치된 구조로 가족단위 관광객이 머물기에 적합하다. 권재희 기자.

권재희 기자 jayful@asiae.co.kr

Copyright ©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