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프면 타인도 아프다" 대통령의 말이 가리키는 것
[박철 기자]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는 '야드바셈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있다. 야드 바셈은 "나의 집, 나의 울 안에 그들의 송덕비를 세워주리라. 어떤 아들 딸이 그보다 나은 이름을 남기랴! 나 그들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름을 주리라"라는 성경 구절에서 왔다고 한. 야드는 '기억, 기념'이란 뜻이고 바셈은 '이름'이란 뜻이다. 곧 '이름을 기억하라'는 의미이다.
이 기념관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 정권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된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관이다. 기념관 입구에는 히브리어로 "망각은 포로의 상태를 이어지게 하고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라는 문구가 돌에 새겨져 있다. 이 기념관에는 유대인이었기에 죽어야만 했던 150만 명의 어린이들을 위한 기념관도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어린이들의 희생을 상징하는 촛불들이 천정에서 바닥까지 빛을 발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추모관에 들어서면 그때 희생당한 150만 명의 어린이 이름이 한 사람씩 스피커를 통해 호명되고 있다.
선택적 기억의 그림자
이스라엘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단순한 역사 전시관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증언하는 동시에, 그 잔혹함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장소다. 홀로코스트라는 비극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백만의 생명을 다시 불러내는 이 공간은, '기억'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마지막 보루임을 말해준다. 이곳의 정신은 분명하다. 고통을 잊지 않되, 그 고통이 또 다른 고통을 낳지 않도록 하는 것. 피해의 기억을 보편적 윤리로 승화시키는 것. 그러나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기억이 보편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특정 집단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도구로만 작동할 때,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선별된 서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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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 3월 24일 팔레스타인인들이 가자 지구 중부의 알마가지 난민 캠프에서 이스라엘 공습으로 파손된 구급차를 살피고 있다. |
| ⓒ AFP=연합뉴스 |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이 원칙들이 계속 훼손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군사 작전은 안보를 이유로 정당화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민간인 피해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특히 어린이 희생의 증가는 국제사회에 깊은 도덕적 충격을 주고 있다. 문제는 국제사회의 태도다. 강력한 제재나 실질적 개입 없이 반복되는 '우려 표명'은 사실상 현상을 방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떤 생명은 보호 받고, 어떤 생명은 통계로 처리되는 이 현실 속에서 인권은 점점 더 선택적 개념으로 변질되고 있다.
드러난 윤리의 균열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을 두고 "끊임없는 반인권적, 반국제법적 행동"이라고 비판하며, "내가 아프면 타인도 그만큼 아프다"는 인간적 공감의 원칙을 강조했다. 이 발언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를 넘어, 보편적 윤리를 기준으로 한 문제 제기였다(관련 기사 : 이재명 대통령, 이스라엘 항의에 "끊임없는 반인권적 행동으로 고통받는데, 실망").
특히 그는 전시 상황에서도 인간 존엄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위안부 강제, 유대인 학살이나 전시 살해는 다를 바 없다"는 그의 발언은, 역사적 비극을 비교하는 방식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핵심은 분명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은 상대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 외무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대통령의 발언이 홀로코스트를 경시하는 것이라며 "용납할 수 없다"고 규탄했고, 해당 사건 역시 이미 조사와 조치가 이루어진 사안이라고 반박했다. 또한 이란과 헤즈볼라의 공격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발언의 불균형성을 문제 삼았다.
이 충돌은 단순한 외교적 갈등을 넘어, 더 깊은 문제를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기억의 독점'과 '피해의 위계화'다. 어느 고통은 절대적이며, 다른 고통은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순간, 인권의 보편성은 무너진다.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이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특정 사건을 넘어, 보편적 윤리의 기준을 제시하려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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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8일 이스라엘의 공습을 당한 레바논 베이루트의 아인 알 무라이세 현장에서 9일 중장비가 가동되고 있다. |
| ⓒ 로이터/연합뉴스 |
오늘날 이스라엘이 직면한 비판은 단순한 정치적 공격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세운 윤리적 기준에 대한 질문이다. 과거의 피해를 기억하는 국가가 현재의 피해를 만들어내는 주체가 될 때, 그 모순은 피할 수 없다. 동시에 국제사회 역시 자유롭지 않다.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인권의 기준, 선택적으로 작동하는 정의는 결국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특정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이 던지는 보편적 교훈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이 던진 메시지는 단순하다.
"내가 아프면 타인도 그만큼 아프다."
이 너무나 당연한 명제가 오늘날 국제 정치에서는 왜 이토록 낯설게 들리는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처한 현실의 비극이다. 기억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언제나 현재의 행동으로 증명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이름이 사라지고 있다. 그 이름들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기억을 통해 배워야 할 가장 기본적인 윤리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어져야 할 보편적 윤리
이스라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힘의 과시가 아니라 기억에 대한 성찰이다. 유대 민족이 역사 속에서 겪어온 극심한 고통, 특히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은 인류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교훈이다. 그 기억은 단지 피해의 역사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보편적 윤리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그 기억이 제대로 계승되고 있는지 되묻게 한다. 과거의 고통을 누구보다 깊이 알고 있는 공동체가, 이제는 다른 이들에게 끝없는 고통을 가하는 주체로 비친다면 이는 역사에 대한 배반이다.
안보와 생존의 논리가 아무리 절박하더라도, 그것이 타인의 삶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면 정당성을 얻기 어렵다. 특히 현재와 같이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지도자의 언어와 선택은 더욱 엄중한 책임을 지닌다. 복수와 응징의 논리가 아니라 절제와 공존의 원칙이 요구된다. 과거의 상처를 기억한다면, 그 기억은 타인의 고통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윤리로 드러나야 한다. 이제는 멈춰야 한다. 자신들이 겪었던 고통을 망각한 채, 또 다른 고통을 재생산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한다. 역사적 기억은 정당화의 도구가 아니라 경계의 기준이어야 한다.
그 점에서 네타냐후의 선택과 발언은 다시금 깊이 성찰되어야 하며, 국제사회 역시 그 책임을 분명히 물어야 할 시점이다. 이중잣대는 결국 신뢰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신뢰를 잃은 정의는 더 이상 정의가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무기가 아니라, 더 일관된 양심이다. 기억이 진정으로 구원의 비밀이 되기 위해서는, 그 기억이 모든 인간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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