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헌법 기행에서 느낀 견제와 균형의 중요성

여경수 2026. 4. 11.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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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헌법이란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약속... 창이공항으로 향하며

[여경수 기자]

지난 3월 18일, 벌써 싱가포르의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아시아문명박물관으로 향했다. 과거에는 세관과 이민자 업무를 보던 관공서로 쓰인 곳이다. 오전 11시 30분에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관람을 시작했다.

상설전시관의 첫 부분에서 눈길을 끈 것은 당나라 시절 오만과 당나라를 오가던 배가 싱가포르 앞바다에서 난파되어, 현대에 들어와 유물을 끌어올려 전시한 공간이었다. 우리나라 신안 앞바다에서 발굴한 난파선의 유물과 비슷한 서사이다.

특히 서아시아에서 동아시아로 이어지는 실크로드를 설명한 지도가 볼 만했다. 해설사가 실크로드 개념을 설명하면서 이 이름을 지은 독일 학자의 이름을 말하고, 마침 해설을 듣던 독일인을 치켜세워 주었다. 이곳에서는 육상 실크로드와 대비되는 해상 실크로드에 관한 자료를 많이 전시하고 있었다.
 해상 실크로드 사진
ⓒ 여경수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가 서로 환류하는 듯한 그림 전시도 인상적이었다. 사실 우리나라는 동쪽에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의 순환선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경주에서 로마 시대의 유물과 서역의 유물이 발굴되었고, 가야의 기마문명과 철기문명도 육상 실크로드와의 연결을 증명한다. 더군다나 장보고 장군은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 무역의 중심 거점으로 삼았다. 이러한 사실이 싱가포르의 아시아문명박물관에서 소개되는 날이 오도록, 더욱 많은 연구자들의 분발을 기대했다.

점심은 예전에 의회로 쓰였던 건물의 일부를 식당으로 꾸민 곳에서 먹었다. 이곳의 종업원이 한국 출신이었다. 처음에 영어로 대화를 했는데, 나에게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싱가포르 식당은 음식 가격에 세금 10퍼센트와 봉사료 10퍼센트를 추가로 내야 한다. 그래서 주문할 때 금액과 결제할 때 금액이 차이가 난다. 식당에서 이방인의 낯선 땅에서 한국인을 만나는 반가움이 있었다.

오후에는 포트 캐닝을 산책했다. 래플스가 향신료 나무를 가꾼 곳이라, 산책 중에 향신료 향이 새콤하면서도 은은하게 났다. 자연 그대로의 향인지라 몸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과거에 서양인 묘지를 공원으로 재단장한 공간인지라, 과거의 묘지석을 공원 양옆으로 전시하고 있다. 묘지석이 줄을 지어 회랑을 만드니 색다른 감흥이 들었다.
 포트 캐닝
ⓒ 여경수
포트 캐닝 바로 옆에 있는 싱가포르 국립박물관을 들렀다. 이곳은 식민지 시대 양식의 건물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박물관과 도서관을 목적으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영국의 식민지 정책이 프랑스와 달랐음을 여기서도 느꼈다.

지하와 3층에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고대부터 지금까지의 싱가포르 지도를 마음껏 살펴볼 수 있었다. 이 박물관에서 의외로 눈길을 끈 것은 1942년 일본이 싱가포르를 침공했던 시기에 관한 전시였다. 당시 일본은 싱가포르를 쇼난도, 한자로 '남방의 빛'이라고 개칭했다. 공식 시차도 도쿄와 동일하게 조정했다. 지금 중국의 베이징과 신장 자치구가 시차가 4시간이나 나는데도 베이징의 시간으로 맞추는 것과 비슷한 억지였다.

당시 영국군 포로들이 지금의 창이공항 지역에서 공군 활주로 공사에 징용되었다고 한다. 마침 동남아시아 특유의 폭우가 내렸다. 스콜이라 불리는 현상인데, 보통 한두 시간 안에 그친다. 동남아시아 기행에서 박물관에 있다가 스콜을 피한 경험이 겹친다. 말레이시아, 캄보디아에서 그랬다. 그리고 이날 싱가포르에서도 행운이 겹쳤다.
 싱가포르국립박물관 실내 사진
ⓒ 여경수
래플스 호텔 바로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36번 버스를 타고 창이공항으로 향하면서 이번 여정을 돌아보았다.

싱가포르는 작은 섬이다. 경제적 번영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문명의 중심지로 거듭나고자 하는 모습을 보았다. 싱가포르 헌법은 1965년 공화국 선언과 함께 출범하여 2024년까지 총 13차례의 개헌을 거쳤다. 그런데 그 개정을 주도한 것은 언제나 여당인 인민행동당이었고, 개정의 방향은 권력을 제한하기보다 권력을 유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1988년 집단대표선거구제 도입이 대표적이다. 소수 인종 대표성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결과적으로 야당의 의회 진입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우리나라 역시 선거철만 되면 유불리에 따라 선거 제도를 바꾸려는 시도가 반복된다. 싱가포르 헌법은 '법에 의한 지배'는 실현했지만, 법치주의의 본질적 요소인 권력 제한 기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군사정변 등을 통한 강압적인 통치가 아니라 선거를 통해 의회를 중심으로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민행동당이 자리해 왔다. 리콴유 이후 고촉동을 거쳐 그의 아들 리셴룽이 총리를 맡아 정치적 연속성을 유지하였고, 현재는 로렌스 웡이 총리로서 새로운 세대를 이끌고 있다. 다만 인민행동당 장기집권의 폐해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은 여전히 과제로 남는다. 이번 싱가포르 헌법 기행에서 내가 가장 크게 느낀 것은 결국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문제였다.

창이공항의 탑승구로 향하면서 나는 다시 생각했다. 헌법이란 결국 권력을 만드는 문서가 아니라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약속이라는 것이다. 길거리 흡연이나 지하철 취식에 상당한 벌금이나 구류까지 부과하는 것이 과연 헌법의 중요한 가치인 비례의 원칙에 맞는지 회의적이었다. 특히 사람의 신체에 형벌을 가하는 태형이 이루어지고,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는 이곳에서 영국식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싱가포르는 그 약속을 형식으로는 지켰지만, 실질로는 아직 완성하지 못한 나라였다.

창이공항에 도착해서, 중국 상하이를 경유하여 대구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항공사는 중국의 남방항공이었다(MU544). 중국 국적기를 타는 것은 처음이었다. 요금도 저렴하고, 공항이나마 상하이를 한번 가고 싶었다. 뜻밖에도 비행기의 항로가 과거 해양 실크로드의 바닷길과 겹쳤다. 비행기의 항로 지도를 보며 지겨운 줄도 모르고 상하이에 도착했다. 국제선 환승 통로를 이용해서 도착지인 대구공항으로 향했다. 우리나라 바다로 들어서는 순간 바다에는 거대한 화물선이 무리 지어 있었다. 우리나라가 예전의 해양 강국의 명성을 이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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