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버틴 은행나무에 배운 한 가지
[김상목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경학 권위자 '토니'는 고향 홍콩에서 독일의 유서 깊은 대학 교수로 초빙된다. 낯선 곳이지만, 열정적으로 강의와 연구에 돌입한다. 그가 주목하는 연구 분야는 언어 체계로 의사를 전달하는 데 한계가 뚜렷한 아기의 신경 감각 분석이다. 그는 첫 수업부터 자신의 학설을 피력하며 증명에 매진한다. 기성 체계에 익숙해진 성인은 각각의 파편으로 세계를 포착하지만, 갓난아기는 거대한 연속과 연결로 바라본다는 게 그의 요지다.
하지만 하필 그가 이 학교에 도착한 때는 2020년, 곧 전 세계를 뒤덮은 코로나 19 팬데믹 아래에서 대학 문은 닫히고, 교직원이고 학생이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토니는 휴교한 캠퍼스에 고립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유배자 처지다.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던 그는 유일한 낙으로 오래된 교내 식물원을 산책한다. 그런 토니의 눈에 1832년부터 우뚝 선 채 한 자리를 지키는 장엄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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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침묵의 친구> 스틸 |
| ⓒ ㈜안다미로 |
영화는 추상적이고 얼핏 불친절하게 출발하는 도입부부터 전작들과의 연계성을 확인해 주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시공간 규모와 표현력이 장난이 아니다. 한 세기를 아우르는 SF 풍의 기운은 인류의 역사와 자연과의 관계, 진리를 찾는 인간 고유의 집념을 한데 통합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팬데믹 당시 사회적으로 고립된 이들이 겪었던 고독감과 함께 인간 대 인간 & 인간 대 식물 사이 의사소통은 가능한가에 대해 과학철학 통찰이 진하게 배어든다.
<침묵의 친구>는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 걸까? 몇 세대를 거듭하며 나무와 인연을 맺어온 이들의 사연이 의미심장하게 관객 뇌리에 꽂히지만, 그 모든 좌표는 결국엔 나무로 환원된다. 마치 세계 각지의 민속 신화들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세계수'를 상징하듯, 200살 먹은 은행나무는 각각의 시대와 삶의 변곡점을 품으며 영화의 제목처럼 '침묵의 친구'가 되어준다.
어찌 보면 우리 주변에 흔하디흔한 은행나무 한 그루에 불과하지만, 영화 속 고목은 신적 존재인 양 소리 없이 권능과 위엄을 한껏 발산했다. 상징적 표현을 통해 자연의 섭리를 응축한 시청각 효과가 가미되면 식물 신화가 따로 없다. 존재감만으로 하나의 질서이자 세계를 구축한 듯하다. 화면 속 등장인물들의 과묵하고 진지한 성향도 마치 식물의 끈기와 지혜를 닮았다. 겉으론 목청 높이지 않고 강한 척하지도 않지만, '외유내강'을 체현한 것만 같다.
감독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다양하게 활용된 '세계의 나무'를 절대적 존재로 설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제임스 캐머런의 <아바타> 연직 배경인 판도라의 생태계 연결망 중추 '에이와'는 거대한 나무를 정점으로 하는 모든 생명체의 신경 연결망이다. 생사의 경계조차 넘어서는 존재이지만, 전능한 신은 아니다. 다만 종을 초월한 생태계 네트워크가 '집단지성'을 발현한다. 신화가 아니라 현대과학의 치열한 연구 성과를 수렴한 인간 지식의 결정체가 적절히 구사될 때 어떻게 우리의 발상을 바꿀 수 있는지 실증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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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침묵의 친구> 스틸 |
| ⓒ ㈜안다미로 |
그 첫 주자는 1908년, 이 대학 식물학과에 최초로 입학한 여학생 '그레테'다. 여자는 집에서 육아와 가사에 헌신하면 족하다며 똑똑한 여자를 대놓고 질시하는 권위주의 교수집단에 둘러싸여 험난한 면접을 치른다. 오만과 편견으로 똘똘 뭉친 남성 교수들은 당시 학계에 파란을 몰고 온 린네의 식물 분류표를 악용해 그녀에게 상스러운 농담과 모욕을 서슴지 않는다. 굴욕을 견디며 실력으로 돌파하려 해도 사회 곳곳에 여전한 차별과 배제의 성벽은 뛰어넘기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레테는 과학자의 끈기와 관찰력으로 부당함에 맞선다.
두 번째는 1972년, 독일 사회가 격동에 휩싸이던 시절에 농촌에서 태어나 도시에 발들인 문학청년 '한스' 차례다. 시골에서 농사일에 신물이 난 그는 식물원에서 만난 매력적인 또래 여학생의 식물 심리 연구를 도우며 지적 흥분과 청춘의 사랑을 동시에 겪는다. 여자친구의 부재 기간 부탁받은 제라늄 관리에서 그가 시도한 비밀스러운 도전은 예기치 않은 결과로 이어진다.
돌고 돌아 2020년 고립무원에 처한, 마치 먼 오지 감옥에 유배된 것만 같은 신경과학자 토니의 시간은 계속된다. 짜증이 나고 우울증에 시달릴 판인데도 그는 무익하게 시간을 보내기보단, 과학자의 본분을 수행하려 매진한다. 공인된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단 점에 착목해 식물 심리학을 연구하는 동료 학자 '앨리스'와 21세기 시대적 특권인 온라인 줌 미팅을 이어간다. 대화나 문자를 통한 의사 전달은 가능하지 않은 서로 다른 종의 교감은 곧 성인 어른과 아기의 관계와 유사하지 않은가.
자신의 가설을 수립한 토니는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산책로, 식물원에 단골로 드나들며 은행나무와 계속 마주친다. 그 나무에 애착을 가진 또 다른 이와 불편한 만남을 겪기도 하고, 관료적인 행정절차 때문에 연구 진행에 애로가 꽃피는 난관도 닥친다. 물론 토니에게만 닥치는 시련이 아니다. 그레테는 집에 갇히길 거부하고 홀로서기에 도전했지만, 주변에선 그녀를 품행이 문란한 여자로, 말 많고 기어오르는 버릇없는 존재로만 취급한다.
숙식 해결을 위한 거처도 구하기 힘든 그레테는 우연히 발견한 사진관 조수 자리를 따내며 자신의 연구에 시대의 첨단이던 사진술을 활용할 전기를 마련한다. 사진이 현실 존재를 대하는 방식과 과학적 방법론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그녀에게 촉매가 되어준다. 한스 역시 시대의 광풍 속에 서로 다른 집단 간에 갈등과 항쟁이 거듭되던 학내 분위기와 표표히 떨어진 채 자기만의 항로를 개척하려 한다. 물론 몰이해와 무지에 의한 훼방이 그를 거듭 괴롭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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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침묵의 친구> 스틸 |
| ⓒ ㈜안다미로 |
김수영의 "풀"에서 예찬하던 덤불의 우직한 끈기처럼, 나무는 인내와 지혜를 자신에게 손을 내밀던 이들에게 기꺼이 베푼다. 쉽게 여기는 대화가 아니라, 비록 오롯이 번역될 순 없을지언정, 생명체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같은 '움벨트(Umwelt: 환경)'에서 공존해야 한다는 설파다. 은행나무 또한 초월적 존재로 보일지언정, 인위적으로 구현된 교내 식물원에서 고립되고 외로운 이라는 동질감이 어느새 관객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레테가 남자의 부속이 되길 거부하듯, 한스가 진영 논리에 휘말려 자기 성찰 대신에 우르르 몰려다니길 거절하듯, 토니가 등 따숩고 배부른 강제 휴가(?!)에 매몰되지 않고 굳이 연구를 재개하듯, 은행나무 역시 식물원의 다른 존재들과 공명하지 못한 채 외롭게 은둔한 처지다. '그녀'가 물려받은 속성, 수나무와 암나무가 함께 해야 가능한 종의 보존과 번식에서 배제된 상태는 마치 손과 발이 묶인 채 자유를 박탈당한 영화 속 인물들과 동질감으로 승화한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거대한 가지와 열매를 만개하며 거대한 정물화를 완성한다. 각자의 배경과 사연은 다르지만, 세상이 천천히 바뀌게 된 건 소신과 의지를 가진 이들의 꾸준한 헌신 덕분이라는 것. 그레테는 결국엔 상아탑의 인습을 부수고 후대에 길을 개척할 것이다. 한스는 식물 커뮤니케이션 연구에서 중대한 이정표를 기록할 테다. 토니는 그런 앞 세대의 자양분을 겸허히 물려받아 다음 단계 도전을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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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침묵의 친구> 스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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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친구>는 우리가 흔히 '예술영화'를 떠올릴 때 상상하는 거의 모든 요소를 채워줄 작업이다. 즉자적 사회 문제 폭로나 개입 대신 인간의 정체성과 윤리, 세계관을 아울러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고민을 투영하고 작가의 입장과 답변을 내놓는 '필사의 도전'이 영화 내에 가득 넘실거린다. 극한의 영화적 체험과 21세기 세계가 향해야 할 진로를 동시에 제시하는 역작이란 상찬은 겉치레가 아니다. 선택을 망설일 필요 없다.
<작품정보>
Stille Freundin
Silent Friend
2025|프랑스, 독일, 헝가리|드라마, 역사
2026.04.15. 개봉|147분|15세 관람가
감독 일디코 에네디
주연 양조위, 루나 배들러, 엔조 브룸, 레아 세이두
수입/배급 ㈜안다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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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침묵의 친구> 스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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