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BS 폐지, 9개월 간의 대혼돈
[공공을위한과학기술인포럼]
국가에서 운영하는 연구기관은 크게 국공립연구기관과 정부출연연구기관(아래 출연연)으로 나눌 수 있다. 출연연은 국공립연구기관과 달리 기관의 운영에 필요한 예산을 정부에서 100% 지원 받는 것이 아니라, 일정 비율만 예산 지원(출연금)을 받고 나머지 자금은 정부나 기업에서 연구과제를 위탁받아 수행함으로써 충당하는 구조로 운영되고 있다. 즉, 출연연 연구자들은 자신의 인건비와 연구비 일부를 스스로 외부에서 수탁받아야 하는 의무를 지니게 되며 이러한 운영 형태를 연구과제 기반 운영제도(Project-based system, 아래 PBS)라 부른다.
PBS는 그 장단점이 분명하다. PBS 도입 이전 출연금 위주로 운영이 되던 시기에는 기관 연구 방향 설정이나 연구비 배분 등에 상급자들의 입김이 많이 작용하기 때문에 연구 자율성이나 다양성이 제한되는 한계가 있었다. PBS 도입을 통해 개별 연구자의 역량을 살릴 수 있는 다양한 연구가 활성화된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PBS의 문제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개인 차원의 과제 수주 경쟁에 매몰됨으로써 출연연 고유 임무 수행, 연구자 집단에 의한 융합 연구를 저해하는 부작용이 발생하였고,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이에 지난해 7월, 정부는 전격적으로 "PBS를 폐지"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였다. 경제인문사회 계열 출연연은 올해부터 즉시, 과학기술 계열 출연연은 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폐지하여 인건비의 100%, 직접비(연구 수행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재료비, 활동비 등)의 80%를 정부가 출연금으로 보장하고, 나머지 직접비의 20%는 각 기관 특성과 필요에 따라 기존처럼 외부에서 수탁 받는 형태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PBS의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한 과감한 조치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제도 개편을 시작한 현재, 사전에 충분한 공감대 형성과 세부 방안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음이 시행 과정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기존 외부에서 수탁해오던 연구비 재원을 출연금으로 전환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제시한 방안은 기존 출연금으로 진행되던 "기본사업"과 별도로 "전략연구사업"이란 체계를 만들고, 이를 절차에 따라 각 출연연에 배분하는 형식이다.
문제는 제시된 방안에 따르면, 공모 절차에 따라 출연연 간 경쟁 형태로 전략연구사업이 배분되므로, 상황에 따라서는 확보할 수 있는 연구비가 기존보다 감소하는 출연연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기존 개인 차원의 과제 수주 경쟁이 기관 차원 경쟁으로 확대될 우려도 있다.
전략연구사업의 사업 당 연구비가 연간 100억 원에 달한다는 점에서, 중요성과 규모를 고려할 때 투명하면서도 체계적인 절차를 통해 설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작년과 올해에 걸쳐 진행되고 있는 전략연구사업 기획 과정은 졸속과 무원칙 두 단어로 정리된다고 할 수 있다. 복수의 출연연 연구자들에게 확인한 바에 따르면, 당장 올해 시작되는 사업의 경우 작년 PBS 폐지 방침이 발표되자마자 급하게 각 출연연에 사업 아이템 제출을 강제하였고, 불과 일주일 만에 사업안을 부랴부랴 만들어서 제출해야 했다고 한다. 통상 연구개발사업의 기획 및 선정에 1년 이상 시간과 여러 단계 평가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제대로 된 사업 기획이 가능했을지 우려된다.
작년의 상황은 급박한 제도 변화에 따른 한계였다고 이해하려 해도, 현재 준비 중인 "2027년도 전략연구사업"의 기획 과정을 보면, 전략연구사업 추진에 대한 정부의 원칙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거둘 수가 없다. 기획 초기 단계에서는 각 출연연 연구자 대상 수요조사를 통해 아이템을 도출하는 상향식(Bottom-up)으로 진행되는 듯 했으나, 도중에 각 정부부처의 수요를 받는 하향식(Top-down)으로 진행하겠다고 방침이 바뀌어 준비 중이던 연구자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기존 정부 R&D 사업의 기획이 정부부처별로 진행되었기에 익숙한 구조로 회귀하여 혼란을 줄이겠다는 의도였는지 모르겠으나, 사전에 충분한 고민 없이 서둘러 진행하는 바람에 현장의 혼란은 도리어 가중되었다.
도출된 연구주제를 구체화하는 단계에서 또 한 번 촌극이 발생하였다. 각 부처별, 출연연별로 제출된 연구사업안에 "융합형"이라는 구분을 추가하여 필요 시 여러 출연연이 공동 연구를 수행하는 체계로 구성하라는 방침이 나왔다. 기존에 비슷한 형태의 출연연 간 공동 연구 사업이 있었기 때문에 현장에서도 자연스러운 변화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공동연구와 전략연구사업의 특성이 서로 부딪히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 문제는 전략연구사업이 근본적으로 출연금을 각 출연연에 배분하기 위한 제도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예를 들어 A, B 두 출연연이 각각 100억 규모 사업을 하나씩 수주했다고 할 때, A 출연연의 사업은 단독형이지만, B 출연연의 사업은 융합형으로 A 출연연이 20% 지분을 가진다면, 실질적으로는 A 출연연은 120억, B 출연연은 80억을 수주한 셈이 된다. 문제는, 아직 공식 발표되지는 않았으나, 각 출연연이 수주할 수 있는 전략연구사업의 총액 한계를 설정한다는 방안이 회자되고, 여기에 융합형 사업의 연구비가 산입되는지 여부에 따라 융합형 사업을 다수 수주할 경우 실제 확보 가능한 연구비가 그만큼 줄어들 수도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결국 다수의 출연연이 자신들이 주관기관이 아닌 경우에는 융합형 사업 참여 불가 방침을 정하면서 상당수 융합형 사업 구성이 불발됐다. 출연연 간 공동연구를 활성화하려는 의도 자체는 좋았다고 볼 수 있으나, 제도의 세부부분에 대한 검토가 부족하여 융합형 연구를 구성하기 힘들어지는 모순적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현재 전략연구사업 기획은 제출된 사업들에 대한 전문가 검토가 진행 중인 단계이고, 이후 결과에 따라 내년도 예산에 반영하기 위한 일련의 절차들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처음 시행되는 제도인 만큼 이런저런 문제점이 드러나기 마련이고 하나하나 보완해나가면 될 부분도 있지만, 현재까지 진행 상황을 보면 과연 "PBS 폐지"를 통해 정부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기관 고유 임무를 강화한다고 했으나 연구주제 도출 과정은 기존과 다를 바가 없고, 출연연 간 연구비 배정에 대한 모호한 가이드라인으로 인해 출연연 간 융합은 멀어졌다. 여기에 전략연구사업에 참여하는 연구자와 미참여 연구자 간 처우에 대한 부분은 각 출연연에 떠넘겨버림으로써 곳곳에서 내부 갈등도 벌어지고 있다.
PBS는 단순히 예산을 나눠주는 제도가 아니라 출연연 운영 체계의 근간 제도이기 때문에, 이를 폐지하는 것은 30년 동안 작동되던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를 불러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까지 바라본 전략연구사업의 추진 과정은 출연연 운영체계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에서부터 출발했다고 보기 어렵고, 일단 추진부터 하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 덮어나간다는 인상을 짙게 받게 된다.
3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높아졌고, 과학기술 분야도 이제는 추격자가 아닌 선도자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대내외 연구 환경이 바뀐 만큼 연구개발 시스템에도 큰 변화가 필요한 시기임에는 다수의 연구자들이 동의할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비판이 있었음에도 질질 끌기만 했던 PBS 폐지를 실행에 옮긴 과감한 결정은 평가 받을 만한 일이지만, 지금처럼 원칙도 철학도 찾아보기 힘든 밀어붙이기식 정책 추진은 성공적 결실로 이어진 적이 없다는 점을 정부는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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