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화장실을 빌려줬더니... 기회로 되돌아왔다
[오성훈 기자]
서울 강남구 일원동, 안온한 주거단지 한복판에 자리한 서울로봇고등학교는 요즘 이른바 '대세'가 되었다. AI와 로봇이 시대의 화두가 되니 언론의 조명은 자연스레 우리 아이들을 비춘다. 누군가는 이를 운이라 말하지만, 나는 이를 크롬볼츠의 '계획된 우연'이라 부르고 싶다.
34년 교육 현장을 지켜오며 깨달은 것은, 세상에 거저 주어지는 행운은 없다는 사실이다. 이 화려한 조명은 갑자기 떨어진 유성이 아니라, 학교 공동체가 오랜 시간 낮은 곳에서 쏘아 올린 작은 불꽃들이 모여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사실 직업계고가 강남 한복판에 있다는 것은 지역 주민들에게 '기꺼이 받아들여진 현실'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는 불편한 동거'였을지도 모른다. 학벌주의가 공기처럼 감도는 사회에서 작업복을 입은 아이들이 오가는 학교는 때로 낯선 섬처럼 존재했다. 하지만 우리는 담장을 높이는 대신 문을 열었다. 대모산을 오르는 주민들이 급할 때 기꺼이 학교 화장실을 내주었고, 배움터지킴이 선생님들은 친절한 미소로 이웃을 맞이했다. 학교 후문은 동네 소식이 오가는 사랑방이 되었고, 주민들은 아이들의 교육 성과가 담긴 현수막 앞에서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발걸음을 멈추기 시작했다.
노교수가 내어준 화려한 '사회적 자본'
그 길목에서 강정호 교수님을 만났다. 건강을 지키려 매일 대모산을 오르내리던 그는 늘 배움터지킴이 선생님과 정답게 인사를 나누었다. 어느 날 그 선생님이 내게 귀띔해 주었다. 이 노교수가 반듯하고 인성 좋은 우리 학교 학생들을 도울 방법을 평소에 고민하신다고. 그 마음이 감사해 교장실로 초대해 마주 앉았다.
그의 이력은 실로 놀라웠다. IMF 대리대사로 세계를 누비고, 코스닥증권시장 사장, 한국 선물거래소 이사장으로 경제 전선을 지켰으며, 경상남도 부지사로서 행정의 정점에 섰으며, 대학 강단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분이었다. 화려한 사회적 자본을 확인한 순간, 그는 뜻밖의 약속을 건넸다.
"내가 가진 이 자본을 서울로봇고 아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써보겠습니다."
| KSVF 소개 |
| KSVF(Korea Stanford Venture Forum)는 1999년 스탠퍼드 대학교 경영대학원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협력하여 설립한 대한민국 최초의 글로벌 벤처 리더십 프로그램이다. '벤처 육성을 통한 경제 활성화'와 'IT 강국 실현'을 목표로 정부 정책과 함께 출범하였으며, 현재까지 산업계 주요 인사들이 참여하는 민관 협력 네트워크로 이어지고 있다. |
사실 내게는 오랜 숙원이 있었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분당쯤에서 유독 눈에 띄는 두산타워를 보며 품었던 꿈이다. 그곳엔 우리 아이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기업, '두산로보틱스'가 있다. 하지만 고졸 채용의 문턱은 높았다. 삼성전자가 매년 우리 학교 우수 학생들을 선발해 채용을 보장하는 것처럼, 두산로보틱스와도 그런 파트너십을 맺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교장실에서 이 간절한 설계를 교수님께 털어놓았다. 노교수는 묵묵히 듣더니 "도움이 될 기회를 만들어보자"고 답했다. KSVF의 회장이 바로 박태원 두산그룹 부회장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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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당 두산타워에서 열린 KSVF 월례 포럼 강정호 교수님의 주선으로 20대부터 70대까지의 CEO들에게 서울로봇고 아이들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
| ⓒ 오성훈 |
"젊은 CEO 회원들께 서울로봇고등학교를 각인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각인(刻印)'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가슴에 와닿았다. 스치듯 지나는 정보가 아니라, 쇠붙이나 돌에 새기듯 깊고 선명하게 남기겠다는 의지였다. 당신이 평생 쌓아온 신뢰를 기꺼이 우리 아이들을 위한 '보증서'로 내어준 것이다.
초대장을 들고 찾아간 분당 두산타워에서 나는 '연대의 힘'을 목격했다. 강 교수님은 20대부터 70대까지의 CEO들에게 일일이 나를 소개하며 우리 아이들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학교와 나를 추켜세우는 그의 목소리에는 권위 대신 손자뻘 되는 아이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어른의 진심이 묻어났다. 특히 박태원 부회장 앞에서는 더욱 간곡했다. 두산로보틱스라는 일터에 서울로봇고의 학생들이 도전할 수 있도록 길을 청하는 노학자의 모습에서 나는 진정한 어른의 품격을 보았다.
나는 평소 공동체의 수준은 가장 약한 고리에 있는 이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직업계고 아이들이라는 소중한 자산이 편견의 벽에 막히지 않도록, 은퇴한 지식인과 글로벌 기업의 리더가 손을 맞잡는 그 순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감동적인 서사였다.
학교 후문에서 화장실을 빌려주던 작은 호의가 분당 두산타워에서 '각인'으로 돌아오기까지. 이 모든 과정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닫힌 학교가 아니라 지역사회와 공존하기 위해 활짝 교문을 열 때, 더 많은 성장의 기회는 우연처럼, 그러나 필연적으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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