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비뼈 부러지고, 응급실 실려가고... 여고생들, 시교육청을 점거하다

조한진희 2026. 4. 10.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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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에서 '우리교육'까지, 1988년 정희여상 2학년이었던 정현숙의 기억

[조한진희]

▲ 정현숙 청소년인권운동연대지음에서 청소년인권활동가들과 간담회 진행 중인 모습
ⓒ 정현숙
1988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서울시 교육위원회(현 서울시교육청) 지하 바닥에 침낭을 펴고 누웠다. 한겨울 차가운 지하 농성장에 에어컨 바람이 쏟아졌지만, 이들은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노래를 불렀다. 1987년 6월 항쟁의 열기를 학교 안으로 가져온 고등학생들은 학교를 더 적극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당시 정희여상 2학년으로서 사학비리에 맞섰던 정현숙님을 4월 3일 온라인으로 만났다. 그의 기억은 1988년의 검은 리본에서 시작되어 20년의 교육운동으로 이어진다.

'사측' 담임과 '검은 리본'의 대결

정현숙은 1988년 당시 구로구에 위치한 기독교계 사립 실업계 고등학교인 정희여상의 2학년 학생이었다. 지금은 '고등학생운동(고운)'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당시 그들에게 그것은 거창한 이름이 아닌 생존과 자존의 문제였다.

"지금은 '고운'이라고 부르지만, 그때 저희에게 그 말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저, '이대로는 안 되겠다'라는 답답함과, 뭔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만 있었죠."

그가 기억하는 학교는 모순이 가득했다. 학생들의 종교적 자율성은 무시되었고, 시설 투자는 전무했다. 종교와 상관 없이 예배에 참석해야 했고 그나마도 강당이 없어 전교생이 학교 앞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그러던 중 전교조 선생님들을 통해 학교 재단의 비리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던 그들은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기 시작했다.

"학생회에서 검은 리본을 배포했어요. '사학 비리 척결'까지 거창한 구호는 아니어도, '이 학교에 문제가 있다'는 최소한의 표시였죠.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시자마자 가슴에 리본 단 아이들 이름부터 적기 시작하셨어요. 그때 알았어요. 아, 우리 담임도 사측이구나. 그리고, 우리가 달고 있는 이 작은 검은 리본이 그냥 장식이 아니라는 것을요."

정현숙의 증언에서 주목할 지점은 '담임교사의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순간이다. 흔히 교육 현장에서 교사는 학생의 보호자이자 스승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사학비리라는 정치적 갈등 상황이 닥치자, 교사는 '교육자'가 아닌 재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측 관리자'로 기능했다. 17세의 정현숙이 목격한 '명단 작성' 행위는 고등학생들이 학교를 국가-재단-교사로 이어지는 견고한 권력 체계로 인식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검은 리본이라는 소극적 저항이 명단 작성이라는 물리적 통제와 부딪히는 순간, 고등학생은 '피교육자'라는 껍질을 벗고 '정치적 주체'로 각성하게 된다.
▲ 정희여자상업고등학생들의 성명서 교권소식에 실린 성명서
ⓒ 교권소식
교실을 뛰쳐나가 거리로

검은 리본 단속은 오히려 학생들의 분노를 키웠다.학생은 수업 거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학생으로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배움을 멈추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거창했던 것은 아니에요. 우리도 고등학생이라 두렵고, 어디까지 해도 되는지 감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수업을 거부하고 우리 입장을 보여주자고 의견이 모였고, 실제로 일부 수업을 중단하고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이들의 투쟁은 교내에 머물지 않았다. 학교 담장을 넘어 동네를 행진하며 자신들의 정당성을 알렸다.

"결국 교문 밖으로 나가, 학교 주변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어요. 그때가 저에게는 굉장히 큰 전환점이었어요. '교실 안'에서만 있던 학생이 '사회' 속으로 한 발을 내딛는 느낌이었으니까요. 그 무렵 학생들의 참여 비율은 절반 이상이었던 것 같아요."

투쟁이 절정에 달한 것은 1988년 겨울방학이었다. 학생들은 학교 울타리를 넘어 '서울시 교육위원회(현 서울시교육청)' 점거라는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방학이 되자 우리는 더 이상 학교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을 필요가 없었어요.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서울시 교육위원회를 점거하자'였어요. 정문에는 전경들이 잔뜩 서 있었고,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정문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폭력이 뒤따랐다. 한 친구는 전경의 방패 모서리에 옆구리를 받쳐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지하 1층 점거에 성공했다. 교육위원회 측은 심리적·물리적 압박을 가했다.

"한겨울에 에어컨을 틀어버리는 거예요. 지하라서 더 추웠어요. 손발이 곱을 정도였는데, 그래도 아침이면 다 같이 일어나 시위 대형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어요. 그러면 위에서 밥 먹던 전경들이 숟가락을 놓고 후다닥 내려오곤 했죠. 그 상황이, 지금 돌아보면 힘들었지만 한편으론 굉장히 '우리끼리 신나던' 시절이기도 했어요."

점거 인원은 서른 명에서 쉰 명 사이. 이들은 누구의 지시가 아닌 자발적인 교대제로 농성장을 지켰다. "오늘은 나 갈게, 내일은 네가 있어줘"라는 배려와 온기의 연대가 혹한의 지하실을 버티게 한 힘이었다.
▲ 정희여상 투쟁 지지 성명서 당시 고운 공개 단체였던 흥사단고등학생아카데미, 한국고등학생운동총연맹(KSCM)등에서 공동으로 발표한 성명서
ⓒ KSCM
10대들의 점거 농성이 남긴 공간의 민주주의

1980년대 운동사에서 '점거'는 국가 권력의 중심부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특히 정희여상 학생들의 교육위원회 점거는 '교육 행정의 주인은 누구인가'를 묻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한겨울의 에어컨 가동은 국가가 10대 고등학생 시민을 존중과 보호의 존재가 아닌, 진압해야 할 '정치적 적대자'로 간주했음을 보여주는 비인도적 사례다.

그러나 정현숙은 이 고통의 순간을 "우리끼리 신나던 시절"로 기억한다. 이는 고통을 초월한 공동체적 유대감을 의미하며, 억압적인 학교 체제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자유'와 '연대'를 점거 공간에서 비로소 만끽했음을 방증한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사회적 불의에 맞서는 단단한 내면의 뿌리가 된다.

농성은 결국 강제 해산과 경찰 조사로 끝났지만, 결과는 '승리'였다. 교장과 재단 핵심 인사들이 해임되었고, 학교는 시 교육부 관리 체제로 전환되었다.

"그 이후 변화는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예요. 그동안 없었던 강당이 새로 지어졌어요. 저희가 고3 때, 학교 역사상 첫 축제를 크게 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 자기 힘을 느끼게 된 것이 중요했어요. 이전에는 학생회가 이름뿐인 조직이었다면, 이제는 진짜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주체가 된 거죠."

선생님들의 뜨거운 인사도 잇따랐다. "너희가 나서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냥 해직만 당했을 거야. 학교가 이렇게 바뀌는 건 상상도 못 했을 거야." 학생들의 용기가 교사들의 권리과 학교의 정상화를 동시에 견인한 것이다.

은행원 정현숙 대신 교육운동가 정현숙을 선택하다

졸업 후 정현숙의 삶은 고운의 연장선이었다. 당시 여자상업고등학교 학생으로서 최고의 직장인 은행에 합격했지만, 그는 월급이 절반밖에 되지 않는 교육 잡지 <우리교육> 노동자로 합류했다.

"친구들 월급은 30만~40만 원이었고, 제가 처음 받은 월급은 세금 떼고 십몇 만 원이었죠. 그런데도 제가 은행을 안 간 이유는 분명했어요. '나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걸 할래. 교육운동 한번 제대로 해보고 싶어.' 이미 제 삶의 방향은 '고운' 경험을 통해 크게 바뀌어 있었으니까요."

그는 그곳에서 20년간 근무하며 출판 노조를 만들고, 간부로서 구조조정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회사를 떠나는 등 끝까지 '현장의 가치'를 지켰다. 신입 사원에게 "보험 왜 가입해? 노동조합도 똑같아"라며 노조 가입을 설득하던 그의 모습은 1988년 검은 리본을 달던 17세의 마음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 해직 된 안미영 교사와 함께(오른쪽이 정현숙) <우리교육>에 입사하도록 권유한 안미영 교사와 1989년 졸업여행으로 간 설악산에서 찍은 사진. 왼쪽이 안미영 교사, 오른쪽이 정현숙
ⓒ 정현숙
고운 세대가 일궈낸 일상의 민주주의

정현숙의 생애사는 고등학생 운동이 일회적 분노에 그치지 않고, 한 개인의 직업적 정체성과 사회적 실천으로 어떻게 치환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은행이라는 안정된 자본의 질서를 거부하고 험난한 출판·교육운동의 길을 택한 것은, 1988년 투쟁을 통해 얻은 '자아의 효능감' 때문이었다.

또한 20년간 <우리교육>을 지키고, 노동자들을 구조조정해야 하는 위치를 거부하며 스스로 사직을 선택하며 책임을 지는 모습은 고운이 길러낸 인간상이 어떤 것인지를 증명한다. 이들은 거대 담론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일터와 삶의 현장에서 민주주의와 노동의 가치를 실천하는 '생활인 활동가'의 원형이었다.

"내 삶을 180도 바꿔놓은 결정적 분기점"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정현숙은 '소심했던 아이'가 어떻게 목소리를 내는 존재가 되었는지 다시금 강조했다.

"만약 그때 고등학생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고개 돌리는 사람이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사회 구조를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고, 내 삶과 정치, 교육, 노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몸으로 느꼈어요. 원래 저는 굉장히 소심한 아이였는데, 학생운동을 하면서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는 이제 자신의 딸에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윤석열 정권에 맞서 거리로 나선 청년들을 보며, 딸에게 "엄마도 너만 할 때 이렇게 싸운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저에게 고등학생운동, 고운은 내 삶을 180도 바꿔놓은 아주 결정적인 분기점이었다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사학비리에 맞서 검은 리본을 달았던 그의 용기는, 2026년의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학교, 당신의 일터에서 민주주의는 안녕한가라고.

* 고운의 역사를 지금 세대와 잇기 위해,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이 고운을 했던 이들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하고 나누는 영상을 제작했다. 정현숙도 패널로 함께 했다.

- 출연: [고운 세대] 구자호, 정현숙, 조한진희, 황철우 [청소년인권운동] 난다, 공현, 은설
- 제작: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 프로듀서: 조한진희
- 촬영: 진다
- 연출 편집 그래픽: 기린
- 내레이션: 난다
- 이 영상은 아름다운재단 지원으로 제작하였습니다.
- 영상 중에 AI로 생성한 삽화가 참고 자료로 포함돼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조한진희님은 책 <고등학생운동사> 기획자이자 공저자 입니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썼고 <돌봄이 돌보는 세계> <삶을 바꾼 페미니즘 강의실> <비거닝: 채식에 기웃거리는 당신에게> <라피끄: 팔레스타인과 나> <포스트 코로사 사회> 등을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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