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 회사가 왜 농장을?…원료로 옮겨간 K뷰티 경쟁 [비크닉]

이소진 2026. 4. 10.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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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자이언트 병풀 스마트팜인 리만팜은 연구동·재배동·관람존을 갖춘 재배 및 연구 기지로 재배동에는 길이 18m의 재배 베드 64기, 연구동에는 길이 13m의 재배 베드 24기가 설치돼 있다. 사진 리만코리아

제주시 구좌읍에 위치한 스마트팜 공간. 하얀 온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거대한 초록빛 병풀 농장이 펼쳐졌다. 18m 길이의 ‘재배 베드’ 64개가 일렬로 놓인 실험실 같은 풍경. 20~25도를 유지하는 온실, 생육에 적합한 기후와 습도, 배양액을 통한 영양 공급까지 모든 시스템이 병풀에 최적화되어 있는 환경이다.

모종 후 45일째, 출하를 앞둔 자이언트 병풀은 손바닥을 거의 가릴만큼 자라 있었다. 줄기를 끊어보니 쌉쌀한 향이 올라왔다. 병풀 속 ‘사포닌’ 성분 덕이다. 피부 진정과 항염·항산화 효과가 있어 화장품의 주요 원료로 쓰인다. 매년 11톤(t)의 자이언트 병풀을 생산하는 이곳은 뷰티 기업 리만코리아가 지난해 만든 ‘리만팜’이다. 연구동·재배동·관람존을 갖춘 1만 4800㎡(약 4500평) 규모의 재배 및 연구 기지로 약 100억원을 들여 조성했다.

제주에서 자라는 병풀 30여 종을 개량해 탄생한 자이언트 병풀. 생병풀 원물 그대로 화장품 원료로 가공된다. 사진 리만코리아

2019년 리만코리아가 신품종 개발에 성공한 자이언트 병풀은 자사 스킨케어 브랜드인 ICD(구 인셀덤)와 보타랩, 건강기능식품 브랜드 라이프닝의 핵심 원료다. 왜 화장품 회사가 식물 품종을 연구하고 농장까지 짓게 됐을까. 지금 K뷰티 경쟁이 제품을 넘어 원료로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당근 패드·PDRN 세럼…성분 내세우는 K뷰티


요즘 K뷰티는 성분이 곧 메시지다. 한때는 제형이나 마케팅·홍보가 구매 동기로 작용했다면, 이제는 성분과 기술이 제품의 정체성을 만든다. 올리브영의 스킨케어 부문 베스트셀러 제품을 보면 어성초·당근·PDRN(연어 DNA 추출물)·녹두 등 성분 이름을 앞세운 걸 알 수 있다. 특정 원료가 제품의 이름이 되고, 리들샷이나 리포좀 같은 전달 기술이 효능을 설명하는 식이다. 미국 아마존에서 히트한 조선미녀 ‘맑은쌀 선크림’도 쌀과 곡물 발효 성분을 내세운 이름이 주효했다.
이는 K뷰티 산업 구조와도 연관이 있다. 그동안 국내 뷰티 시장은 코스맥스나 한국콜마 같은 ODM·OEM(제조자개발생산) 기업을 중심으로 성장해왔다. 뛰어난 제조 역량을 기반으로 다양한 브랜드가 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제품력은 빠르게 평준화됐다. 브랜드 간 차이를 만드는 요소가 점점 희미해진 것이다. 제조 기술이 상향 평준화된 상황에서 무엇을 만들었는지가 아닌 ‘무엇으로’ 만들었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K뷰티는 최근 녹두, 당근, 어성초 등 자연에서 유래한 성분을 앞세운 제품들로 각축전을 벌이는 중이다. 사진 올리브영


원료에도 ‘K’붙었다…수입산 대체한 국산 프리미엄


특정 성분의 효능을 전면에 내세우는 제품이 늘면서 원료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통제할 수 있는지도 중요해졌다. 병풀은 ‘시카 화장품’으로 통하는 K뷰티의 핵심 성분 중 하나지만 정작 원료는 해외 수입에 90% 가량 의존해 왔다. 마다가스카르나 베트남 등지에서 생산한 건조품을 들여와 제조하는 환경이었는데 품질이 균일하지 않고, 수급도 일정치 않았다. 원료 재배부터 가공까지 완성하는 ‘한국 병풀’을 개발하자는 움직임이 인 이유다.

지난해 아모레퍼시픽은 바이오 소재 기업과 손잡고 병풀 신품종인 ‘호인’을 개발했다. 리만은 일반 병풀보다 유효성분이 높은 자이언트 병풀로 수급 문제와 품질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리만의 연구시설인 에스크베이스 김정환 연구원은 “수입산 건조 원료는 잡초나 벌레가 섞여 품질이 좋지 않고 일부 지역에서 중금속이 검출되는 경우가 있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며 “현재는 생 병풀을 수확 즉시 원료로 가공한 뒤 OEM 업체에 보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리만코리아는 2019년 자이언트 병풀을 신품종으로 출원, 2022년 품종 보호 등록을 마쳤다. 일반 병풀과 자이언트 병풀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는 에스크베이스 병풀연구팀 김정환 책임연구원. 이소진 기자

국내 화장품 제조 시장은 2010년대 초반까지 72% 이상 해외 원료를 사용했지만 지난해 기준 40%대로 줄며 꾸준히 국산화로 전환하는 추세다(삼일PwC). 원료를 확보하고 기술화하는 흐름도 뚜렷하다. 코스맥스는 100여종의 약용식물을 직접 키우면서 마이크로바이옴 기술을 통한 원료 효능 개선을 연구하고, 한국콜마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신규 펩타이드 성분을 개발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인삼·녹차·콩·병풀 등 한국의 자연유래 성분이 최근 글로벌 스킨케어 시장에서 차별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친환경·비건 트렌드와 맞물리며 원료의 출처와 생산 방식 자체가 경쟁력이 된 것이다.


브랜드 스토리가 된 생산지


제주 구좌읍에 위치한 리만팜. 약 1만4846㎡(약 4500평) 규모로 매년 약 11톤의 자이언트 병풀을 생산한다. 약 130만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사진 리만코리아
리만코리아는 제주에 리만팜을 중심으로 원료를 가공하는 에스크베이스, 신소재의 효능을 연구·개발하는 에스크랩스를 운영하며 원료 R&D 체계를 갖춰가고 있다. 이곳에서 개발한 자이언트 병풀은 제주의 야생 병풀 30여 종을 개량해 개발한 것으로 일반 병풀보다 크기는 물론 폴리페놀·폴라노이드·콜라겐 발현량 등 유효성분도 높다는 설명이다. 리만은 2019년 신품종 출원에 이어 2042년까지 독점 사용 권리를 확보한 상태다.

리만코리아 관계자는 “지난해 글로벌 시장의 호응으로 ‘3천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며 “천혜의 환경인 제주에서 자란 성분이라는 점이 해외 소비자들에게 통하고 있다”고 말했다. 차기 프로젝트로 한국생명공학연구원과 함께 제주 비자림에서 균주를 추출한 클로렐라 연구·개발도 진행하고 있다. 클로렐라는 수입 의존도가 높은 금잔화 성분의 루테인을 대체할 수 있는 차세대 기능성 원료다.

K뷰티의 강점이던 가성비와 빠른 제품 개발력은 이제 ‘K원료 프리미엄’으로 확장되고 있다. 지금 화장품 회사가 공장이 아닌 농장을 짓고 운영하는 이유다.

■ b.이슈

「 비크닉이 흘러가는 유행 속에서 의미 있는 이슈를 건져 올립니다.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매력적인 공간을 탐색하고, 시대와 호흡해 성장하는 브랜드와 기업을 조명합니다. 비즈니스적 관점은 물론, 나아가 삶의 운용에 있어 유의미한 ‘인사이트’를 전합니다.

비크닉

이소진 기자 lee.sojin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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