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빈의 수장고 안팎 훑기] 분단의 긴장 증폭시키는 부조리한 붓질과 색채
임멘도르프의 ‘독일을 바로잡는 일’

독일 화가 요르그 임멘도르프의 ‘카페 도이칠란트’ 연작 중 하나이다. 1945년생인 임멘도르프는 안젤름 키퍼, 게오르크 바젤리츠와 함께 전후 독일 회화를 이끈 예술가 중 하나이다. 동료들에 비해 덜 알려진 것은 61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한 탓이 크다. 52세에 루게릭병을 진단받고 붓을 잡던 왼손이 먼저 마비되었으니 제대로 활동한 기간은 더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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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동 예술과 결별, 현실 주목한 작품
나치·분단·전체주의 공포 드러내
사창가에서 술집도 운영한 괴짜
독일 국기 모독죄로 체포되기도
예술은 세상의 경고등이라는 신념
전쟁 난무하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
」
![‘독일을 바로잡는 일-전장에의 복귀’, 1983,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대표작인 ‘카페 도이칠란트’ 연작의 하나다. [사진 이사빈]](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10/joongang/20260410001405120jjos.jpg)
2007년 봄, 임멘도르프가 사망했을 때 독일의 슈피겔지는 “독일이 회화의 전설”을 잃었다고 표현했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임멘도르프를 독일 신표현주의 화가 중에서 가장 이야기꾼 기질이 강한 인물로 묘사하며, 그의 죽음이 한 시대의 종말임을 시사했다.
교수·파티광·총리의 친구·다다이스트
한편 유력일간지 남독일신문은 임멘도르프를 이렇게 요약했다.
“교수이자 파티광, 총리의 친구, 술집 주인, 멋쟁이, 다다이스트.”
실제로 그는 꽤나 독특한 삶을 살았다. 20대에는 마오쩌둥 추종자였고, 40대에는 함부르크의 사창가에서 술집을 운영했다. 50대에는 학생 시절에 퇴학당한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2003년에는 코카인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독일의 전 총리 슈뢰더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1945년생인 임멘도르프는 18세에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에 입학했다. 원래 무대디자인을 공부했지만 교수와의 갈등으로 쫓겨나자 요제프 보이스가 받아주었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보이스는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임멘도르프는 곧 그의 가장 충실한 제자가 되었다.
![‘보이스란트’, 1965. 예술 멘토였던 요제프 보이스의 나라라는 뜻이다. 그림 한가운데 낚시조끼와 모자를 쓴 인물이 보이스. [사진 이사빈]](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10/joongang/20260410001406366txdv.jpg)
임멘도르프는 열한 살 때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가 인사도 없이 집을 나간 것이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한다. 이런 그에게 카리스마 넘치고 헌신적인 보이스는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한 강력한 멘토였다. 그는 평생 동안 작품 속에 보이스를 등장시켰는데, 1965년작 ‘보이스란트’가 그 시작이다. ‘보이스의 나라’라는 뜻의 제목은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는 스승의 철학에 경의를 표하면서, 동시에 보이스의 엄청난 영향력을 살짝 풍자한 것이었다.
당시 보이스는 많은 젊은 예술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임멘도르프는 특히 예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스승의 신념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대학 시절의 그는 보이스의 영향 하에서 다양한 행위 예술을 선보였다. 집세 상승과 주택 부족에 대항하는 시위에 참여했고,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퍼포먼스를 발표하기도 했다.
![독일 국기색으로 칠한 나무 토막을 끌고 다닌 1968년의 퍼포먼스. [사진 이사빈]](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10/joongang/20260410001407634isqx.jpg)
가장 유명한 것은 1968년에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벌인 퍼포먼스였다. 학생 임멘도르프는 독일 국기의 색을 칠한 나무 블록을 자신의 발목에 묶은 후 의사당 앞을 걸어 다녔다. 독일의 역사적 과오와 국가주의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당대 젊은이들의 상황을 풍자한 행위였다. 임멘도르프는 국가 상징 모독죄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멘토였던 보이스와도 갈라서
이 사건에서 보이스는 제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여 퇴학을 면하게 해주었지만 보이스의 학교 내 입지도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예술관에도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임멘도르프가 마오주의를 추종하고 예술가도 계급 투쟁에 직접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보이스는 그 또한 독단이라며 비판했다. 보이스에게 예술은 더 유연하고 영적인 것이어야 했다. 임멘도르프는 스승의 신비주의적 예술관으로부터 결별을 선언하며 독자 노선을 걷기로 결심했다.
과격한 퍼포먼스를 지속하던 임멘도르프는 결국 대학에서 퇴학을 당하고 공립학교 미술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까지는 이데올로기에 심취하여 자신의 정치관을 드러내는 선동적인 회화를 주로 그렸다.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메시지가 선명하게 담긴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1976년, 서른을 갓 넘긴 임멘도르프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우선 마오이즘을 버리고 예술 활동에 집중했다. 카셀 도큐멘타와 베니스 비엔날레에도 참여했는데, 베니스에서는 예술가들의 국제 교류를 촉구하고 동독의 비민주적 체제를 고발하는 내용의 전단지를 배포하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은 미·소 갈등으로 냉전의 긴장감이 고조된 시기였다. 1977년에는 독일 적군파가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납치하면서 서독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국가가 강경 대응을 하는 과정에서 68혁명의 유산을 이어받은 젊은 세대와 나치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기성세대 사이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독일의 가을”이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전후 독일 민주주의의 최대 위기였다.
분단 독일의 현실을 다뤄야겠다고 결심한 임멘도르프는 인생 역작이 될 시리즈를 시작한다. ‘카페 도이칠란트’라는 제목의 이 연작은 1977년부터 1984년까지 제작되었다. 당시로써는 아무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두 독일이 다시 하나가 된 가상의 세계를 화폭에 담은 것이다.
‘카페 도이칠란트’는 말하자면 ‘독일’이라는 이름의 카페에 이념과 역사를 초월한 주요 인물들이 함께 모여 있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 속 배경은 당시 뒤셀도르프의 ‘레볼루션’이라는 디스코텍의 내부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주요 등장인물은 마오쩌둥과 스탈린, 동독 서기관 호네커, 서독 총리 슈미트, 그리고 모자를 쓴 모습의 요제프 보이스와 동독 화가 A R 펭크 등 정치인과 예술가들이었다.
그림 속 인물들은 기이하고 과장된 모습으로 표현돼 있다. 어지러운 구성과 거친 붓질, 강렬하면서도 조화롭지 못한 색채가 화면 전체에 불편함과 긴장감을 더한다.
여기에 분단과 냉전을 상징하는 얼음 장벽, 독일의 상징인 독수리, 나치 문양 하켄크로이츠 등의 상징물들이 더해져 초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면 왼쪽에 있는 커다란 팽이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끊임없이 회전하며 균형을 잡아야 하는 당시의 상황을 나타낸다.
한편 임멘도르프 자신의 모습도 화면 곳곳에 등장한다. 민소매 티셔츠에 모히칸 스타일의 머리 모양을 한 인물이다. (실제로도 여기에 검정 가죽옷과 화려한 액세서리를 곁들인 것이 당시 그의 스타일이었다.) 화면에서 그는 붓을 들고 있거나 팽이를 돌리는 손으로 그려져 있다. 이 모든 상황을 목격하고 중재하는 예술가의 역할을 표현한 것이다.
당시에 발표한 선언문을 보면 그의 의도와 예술관이 명확히 드러난다.
“서독 및 유럽의 예술가들이여, 여러분의 작품 속에서 일상의 문제와 부조리, 두 제국주의 강대국에 의한 전쟁의 위협, 그리고 정치적 탄압을 다루십시오. 평화를 위해 행동하십시오. 첫 번째 폭탄이 투하되는 순간, 그 어떤 이젤도 멀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979년에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1980년대 초에는 나토가 서독에 핵미사일 배치했다. 독일은 냉전의 최전선이었기 때문에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터는 독일 땅이 될 것이라는 공포가 가득했다.
‘카페 도이칠란트’는 큰 호평을 받았다. 나치즘의 트라우마, 분단국가로서의 긴장감, 전체주의에 대한 공포를 이보다 더 강렬하게 표현한 예술가는 없었다. 임멘도르프는 분단 독일의 복잡한 상황과 부조리한 현실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극찬을 받았다.
독일 통일 후 자아 성찰로 전환
한편 이 작품 이후, 임멘도르프의 예술에서 정치색은 점차 옅어졌다. 무엇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냉전과 분단이라는 소재도 사라진 셈이었다. 세상은 바뀌고 예술가는 나이가 들었다.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촉구하던 작품세계는 예술적 자아에 대한 성찰로 옮겨갔다. 그리고 1998년에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후에는 조수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죽음과의 투쟁 자체를 담은 작업으로 선회했다.
과천의 전시장에 걸려 있는 임멘도르프의 작품을 보면 확실히 옛날 그림 같다. 제작연도인 1983년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1980년대 한국에도 민중미술이라는 뜨거운 예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우리는 이념과 집단보다는 윤리와 개인에 집중하는 예술에 더 익숙해졌다. 냉전의 종식으로 평화가 찾아왔다고 믿었던 것이다. 정치와 역사의식이 이토록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예술은 2026년의 시점으로는 왠지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임멘도르프는 예술을 시계에 비유한 바 있다. 예술작품은 단순히 아름다운 대상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가 어디쯤 와 있는가를 알려주는 계측기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문득 그가 아직 살아 있다면 3차 대전의 가능성이 거론되는 현재의 국제정세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 속에서 예술가의 역할을 어떻게 정의할지 궁금해진다. 지금 예술의 시계는 과연 몇시를 가리켜야 할까. 임멘도르프가 43년 전에 그린 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그림의 메시지는 불행히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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