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근의 시선] ‘하위 70%’란 말의 씁쓸함

“소득 하위 70% 이하의 국민에 1인당 10만원의 고유가 피해지원금을….”
지난달 31일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의 추가경정예산안 발표문을 보다 뭔가 턱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위 70%’란 대목에서다. 지원 대상이 적정하냐는 건 차치하더라도, 70%라는 숫자 앞에 하위란 말을 붙이는 게 영 어색하게 느껴져서다. 국민의 70~80% 앞에 하위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붙기 시작한 건 문재인 정부 시절 재난지원금을 나눠줄 때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식의 지원금이 잦다 보니 이제는 다들 익숙해졌는지 정부의 공식 발표에도 스스럼없이 쓰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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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경·부동산 대책·세제에서
중산층 개념 어느덧 사라져
정책도 ‘K자 양극화’ 따라가나
」

박 장관이 말한 소득 하위 70%는 정부 추계로 3256만 명에 달한다. 이들이 하위라면 나머지는 상위일 테다. 그런데 이렇게 나눠놓고 보면 뭔가 빠진 것 같다. 바로 중위, 즉 중산층이다. 사실 하위 70% 이하에는 상당수 중산층이 포함돼 있다. 그래서 과거에는 보통 ‘중위 소득의 150% 이하’라는 표현이 쓰였다. 70% 선은 국제 기준으로 봐도 중산층의 상단이다. 4인 가구로 치면 연 소득이 1억원에 육박한다. 월급 받아 이것저것 빼고 나면 아주 넉넉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세금 꼬박꼬박 내고, 아이들 키우고, 열심히 돈 모아 내 집 마련에 나서는 이들일 것이다. 아무리 지원금을 준다지만 이들도 하위로 지칭되는 건 께름칙하지 않을까.
말꼬리를 잡자는 게 아니다. ‘잊혀진 중산층’ 얘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예전에는 중산층을 핵심 수요자로 바라보며 정책을 세워야 한다는 인식이 어느정도 있었다. 숫자가 많은 데다 이들이 두텁게 자리 잡아야 경제도, 사회도 건강해진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사이인가 정부 정책에서 중산층의 존재감이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하위 아니면 상위일 뿐이다.
지난해부터 쏟아진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서도 그랬다. 아래와 위만 볼 뿐 중간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사실상 핵심 목표도 강남 집값 잡기, 공공임대 확대다. 한 전직 관료는 “모두가 ‘K자 양극화’를 얘기하며 강남 아파트값만 바라본다”면서 “사실 주거안정의 중심은 K자의 중간인데 아무도 그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사이 중산층이 주요 수요자인 중저가 아파트값과 전셋값은 계속 동반 상승 중이다. 토지거래허가제로 실거주가 의무화하며 전·월세는 씨가 마르고 있다. 그러니 그나마 대출규제가 덜한 중·저가 아파트로 수요가 몰리고 가격이 오른다. 시장 안정을 위해선 중산층이 원하는 적정한 가격의 집을 꾸준히 공급하겠다는 확실한 시그널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서 공급이란 말은 어느새 쑥 들어간 상태다.
경제가 양극화하니 정책도 현실을 따라갈 수밖에 없지 않냐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관성이라도 있어야 한다. 중산층은 고유가 피해지원금을 받을 때는 하위에 포함되지만, 세금을 낼 때는 상위와 엮인다. 지난해 근로소득세는 68조4000억원이 걷혔는데 전년보다 12.1%가 늘었다. 나머지 주요 세목인 법인세와 부가가치세가 줄거나 제자리걸음 한 것과 대조된다. 그러다 보니 특히 중산층 월급쟁이들 사이에서 불만이 크다. 명목임금은 오르는데 근소세 과표는 18년째 사실상 그대로니 ‘소리 없는 증세’가 아니냐는 것이다. 물가 상승에 따라 과표도 올리는 물가연동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최근에 만난 재정당국의 고위 관계자는 “그건 못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드는 핵심적인 이유가 예상 밖이었다. 지금도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자가 근로자 셋 중 한 명인데 과표가 올라가면 그 숫자가 더 늘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2024년 기준 한국의 근로소득세 면세자 비율(32.5%)은 미국(30.9%), 캐나다(13.6%), 호주(15.2%), 일본(14.5%) 등 주요국보다 여전히 높다. 원칙대로 간다면 면세점을 좀 낮추고 소액이라도 세금을 받으면 되겠지만, 정치적 부담이 클 것이다. 여기에 과표가 올라가면 고소득자들의 세금도 줄 게 되니 ‘부자 감세’라는 비판이 거세질 수 있다. 중산층 납세자가 면세자와 고소득자 사이에 끼여 옴짝달싹 못 하는 형국이다.

10여 년 전 정부 청사 한가운데에는 ‘서민을 따뜻하게, 중산층을 두텁게’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걸려있었다. 그리 성공적이진 못했으니 K자 양극화 얘기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향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지 않다간 하위 70%를 넘어 하위 80%, 하위 90%라는 말이 일반화할지도 모르기에 하는 얘기다.
조민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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