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 왜 이러나...기업 부담 완화? 투자자 다 떠나게 생겼다
[최경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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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융위원회 |
| ⓒ 금융위원회 |
ESG는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를 의미한다. 기업이 얼마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지, 노동과 지역사회를 어떻게 대하는지, 경영은 얼마나 투명한지를 보여주는 핵심 정보다. ESG 공시는 이러한 정보를 공식적으로 공개하는 제도다. 투자자 입장에서 보면 이는 일종의 '기업의 영양성분표'와 같다. 이 정보가 없다면 기업이 실제로 지속가능한 경영을 하는지, 아니면 그린워싱(친환경 이미지로 포장하려는 행위)에 그치는지 판단할 수 없다.
문제는 이 공시가 단순한 정보 공개를 넘어, 오늘날 자본시장의 작동 조건이 되었다는 점이다. 국민연금과 같은 기관투자자는 이미 ESG 정보를 핵심 투자 기준으로 활용하고 있다. 공시가 부실하면 리스크를 사전에 식별하지 못한다. 이는 곧 투자 손실로 이어진다. ESG 공시는 더 이상 '선택적 정보'가 아니라, 자본이 움직이기 위한 최소한의 인프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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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불어민주당 기후행동의원모임 '비상'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2024년 9월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2026년 기후 공시 의무화 로드맵' 시행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 ⓒ 연합뉴스 |
이 사이 세계는 빠르게 움직였다. 유럽연합(EU)은 2024년부터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을 통해 대규모 기업에 공시를 의무화했고,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는 글로벌 공시 기준을 확정했다. 영국, 호주, 대만, 중국은 2026년부터 단계적 의무화를 시행하고 있으며, 일본도 2027년부터 법정공시를 도입한다. 싱가포르는 이미 2025년 모든 상장사에 의무공시를 적용하고 있다.
문제는 속도뿐만이 아니다. 공시의 '형식' 역시 중요한 쟁점이다. 금융위원회의 로드맵은 도입 초기 거래소 공시로 운영한 뒤 추후 법정공시로 전환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에 비해 일본은 법정공시 체계로의 전환을 명시하고 있으며, 싱가포르도 거래소 규정 기반이지만 증권선물법의 법적 뒷받침으로 사실상 법정공시에 준하는 구속력을 갖는다. 자본시장법에 기반한 법정공시는 허위 공시에 대한 민사·행정·형사 책임이 적용되어 신뢰성을 담보한다. 반면 거래소 공시는 제재 수단이 제한적이어서, 공시의 신뢰성과 투자자 보호 측면에서 구조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제3자 인증(Assurance) 문제는 더 심각하다. EU와 일부 선진국은 공시 의무화와 동시에 또는 단기간 내에 인증을 요구하고 있으며, 싱가포르도 공시 개시 후 2년 내에 배출량에 대한 제3자 검증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제3자 인증을 자율에 맡기고, 단계적 의무화 방안을 '추후 마련'하겠다는 수준에 그쳤다. 공시의 신뢰성을 담보할 최소한의 장치조차 불확실한 상태다.
여기에 '연결공시 예외' 조항까지 더해지면 실질적 효과는 더욱 축소된다. 매출 또는 자산의 10% 미만 종속회사를 공시 대상에서 제외하면, 실제 공시 범위는 평균 1~2개 계열사 수준에 머물게 된다. 겉으로는 대기업 중심 공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개별 공시와 다를 바 없는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설계는 결국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보낸다. 공시가 불완전하면 투자자는 불확실성을 더 크게 반영하고, 더 높은 위험 프리미엄을 요구한다. 이는 기업의 자본 조달 비용 상승으로 이어지고, 결과적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심화시킨다. ESG 공시의 문제는 환경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 비용과 직결된 경제 문제다. 이미 이러한 징후는 국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국민연금은 2023년 3월 수탁자 책임 활동 지침을 개정하여 '기후변화 관련 위험 관리'를 중점관리사안으로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후 공개된 자료와 국정감사 지적에 따르면, 2024년 하반기까지 해당 사안과 관련한 기업 선정 및 비공개 대화 등 실질적인 관여 활동은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같은 시기에 신설된 산업안전 중점관리사안에서는 10개 기업을 대상으로 총 18회의 비공개 대화가 진행되는 등 보다 적극적인 관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차이는 기후 분야에서 제도 도입에도 불구하고 실제 이행이 뒤따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공시 기반이 미흡한 상황에서 사전적 관리보다 사후 대응에 의존하는 구조적 한계를 시사한다.
해외에서는 기관투자자의 기후 대응 요구와 기업에 대한 관여 수준이 빠르게 강화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노르웨이 국부펀드(GPFG)는 2024년 기준 기후 리스크가 높은 기업 약 267곳을 '중점 관리 대상'으로 선정하고, 이들 기업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관여(engagement)와 리스크 모니터링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기후 및 자연 관련 투자 원칙과 관여 전략, 주요 주제 등을 비교적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
유럽의 대표적 연기금인 네덜란드공적연금(ABP) 역시 기업과의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 기후변화 대응을 핵심 투자 의제로 다루고 있으며, 에너지 전환과 탄소 감축을 중요한 기업과의 소통 주제로 설정하고 있다. 다만 구체적인 대화 건수나 비중과 관련된 일부 수치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어 일반화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이처럼 글로벌 주요 투자자들은 기후 리스크를 재무적 위험으로 인식하고, 투자 대상 기업에 대해 정보공개, 감축 목표 설정, 전환 전략 수립 등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특정 국가에 국한되지 않으며, 한국 기업 역시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동일한 기준과 압력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계는 비용과 준비 부족을 이유로 공시 유예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본질을 오해한 주장이다. ESG 공시는 기업을 규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글로벌 자본이 한국 시장에 투자할 수 있도록 만드는 최소한의 신뢰 인프라다. 실제로 자산 2조 원 이상 상장사의 상당수는 이미 자발적으로 ESG 정보를 공개하고 있다. 의무화는 새로운 부담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관행을 제도화하는 과정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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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SG 이미지 |
| ⓒ 연합=OGQ |
이 문제는 정부의 기후금융 정책과도 직결된다. 정부는 2035년까지 약 790조 원 규모의 기후·전환금융 공급 계획을 제시했다. 그러나 ESG 공시가 부실하다면 이 막대한 자금이 실제로 탄소 감축에 기여하는지 검증할 방법이 없다. 이는 정책의 신뢰성을 훼손하고, 재정 자원의 비효율적 사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공시는 자금의 흐름을 바로잡는 나침반이다.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정책은 결국 방향을 잃는다.
결론적으로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 조절'이 아니라 '방향 전환'이다. 첫째, 공시를 자본시장법 기반의 법정공시로 전환해야 한다. 거래소 공시는 과도기적 수단으로 제한하고 명확한 전환 시한을 설정해야 한다. 둘째, 공시 대상을 조기에 확대해야 한다. 연결자산 30조 원 기준은 지나치게 협소하며, 자산 2조 원 이상 상장사로 확대하는 것이 국제 기준에 부합한다. 동시에 종속회사 면제 조항은 즉각 재검토되어야 한다. 셋째, 제3자 인증 의무화 일정을 명확히 해야 한다. 공시의 신뢰성은 인증을 통해서만 확보될 수 있으며, 주요국 수준에 맞춰 공시 도입과 동시에 또는 단기간 내 시행되어야 한다.
ESG 공시는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이는 환경 정책이 아니라 자본시장 정책이며, 기업 규제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의 문제다. 2028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개최국으로서 한국이 글로벌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공시 체계를 유지한다면, 그 비용은 결국 기업과 투자자, 국민 모두에게 돌아갈 것이다.
'코리아 프리미엄'은 선언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투명한 정보 공개와 신뢰할 수 있는 제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점진적 유예가 아니라,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과감한 방향 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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