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기술의 역설…연극 ‘센과 치히로’가 남긴 ‘아날로그’의 과제

박정선 2026. 4. 9. 11:02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상상력의 여백이 만든 압도적 몰입감

최근 서울 공연을 마친 연극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평균 객석 점유율 100%를 상회하며 유료 점유율 98%, 누적 관객 수 약 19만 명을 기록했다. 이는 2026년 상반기 공연계 최고의 성적으로, CJ ENM 역대 공연 라인업 중 단일 프로젝트 시즌 사상 최다 관객 동원이자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개관 이래 단기간 내 최다 관객을 동원한 전례 없는 기록이다.화려한 LED 스크린, 3D 매핑 등 첨단 디지털 기술 도입에 매몰된 현시점에서, 이 작품은 정교한 퍼펫(인형)과 역동적인 신체극이라는 ‘아날로그적 문법’의 위력을 증명했다는 것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TOHO Theatrical Dept.

국내 대극장 공연의 주류 트렌드는 ‘영화적 시각화’다. 무대 전면에 고해상도 LED를 배치하거나 프로젝션 매핑으로 가상 공간을 실감 나게 구현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연극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원작의 판타지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영상 대신 회전 무대와 정교한 세트 전환, 그리고 인형극과 배우의 유기적인 결합을 선택했다. 관객은 눈앞에서 세계가 ‘변형되고 생성되는 순간’을 물리적으로 목격하게 된다.

특히 공연의 백미로 꼽히는 ‘도어 시퀀스’는 애니메이션의 역동성을 무대로 완벽히 옮겨냈다. 수많은 문이 열리고 닫히는 찰나를 퍼펫티어들이 직접 움직이며 정교한 동선을 구축했고, 배우들은 슬로모션과 리드미컬한 움직임으로 화답하며 관객들에게 초현실적인 몰입감을 선사했다.

한 공연 관계자는 “최근 무대가 디지털 기술의 정교함에 치중하면서 관객이 느낄 수 있는 물리적 질감이 사라지고 있다”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배우의 호흡이 투영된 오브제를 통해 영상이 줄 수 없는 ‘실재감’을 확보한 것이 주효했다”고 분석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연출은 인형을 조종하는 퍼펫티어를 무대 위에 그대로 노출한 점이다. 일반적으로 공연 기술은 그 원리를 숨겨 관객을 환상에 빠뜨리려 하지만, 이 작품은 인형을 움직이는 인간의 노동을 감추지 않는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앞서 공연한 박정민, 박강현 주연의 공연 ‘라이프 오브 파이’ 역시 같은 방식으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여기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원근법을 활용한 입체적인 연출과 히사이시 조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11인조 라이브 오케스트라의 선율로 구현하며 작품의 결을 한층 풍성하게 채웠다.

최근 미디어 아트 도입에 열을 올리는 국내 대형 작품들은 종종 ‘영화적 매끄러움’을 추구한다. 기술의 발전은 불가능했던 표현을 가능하게 하지만, 무대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관객이 스스로 상상할 수 있는 여백은 줄어드는 역설적인 현상이 발생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무대 기술의 지향점이 반드시 ‘실사와 같은 재현’에 있지 않음을 시사한다. 아날로그적인 무대 문법은 디지털 기술보다 투박할 수 있으나, 그 투박함 속에 담긴 물리적 에너지는 관객과의 정서적 교감을 끌어내는 핵심 동력이 된다. 기술 지상주의에 매몰된 현재의 제작 환경이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 작품은 명확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연극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성공은 한국 공연계에 시사점을 던진다. 화려한 기술 도입이 반드시 작품의 질이나 흥행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작품에 따라 서사를 돕는 강력한 도구로 활용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을 때 무대의 생동감을 사라지기 마련이다.

한 공연 기획자 A씨는 “공연은 기술적 완성도를 높이는 것만큼이나 공연만이 줄 수 있는 현장성과 여백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도 고민해야 한다”면서 “‘센과 치히로’가 증명한 아날로그의 힘은 단순한 복고적 취향이 아니라 기술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무대 문법에 대한 대중의 갈증이 반영된 결과”라고 꼬집었다.

Copyright ©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